여름 휴가를 내게 편한 날로 정하지 않고 일명 ‘땡처리’ 항공권이 나는 날로 잡는 것이 습관이 됐다. 이것이 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한 망할 놈의 '아비투스(계급에 따라 구분되는 문화적 취향의 특성)'인가 싶기도 하다. 45만원짜리 월셋집 사는 대도시 월급쟁이라는 나의 계급은 ‘땡처리’ 휴가와 미용사와의 실랑이 끝에 영양을 뺀 펌 시술이 구별짓는다. 하긴 예전엔 집에서 실컷 누워있거나 밀린 일을 처리하는 데 휴가를 받아썼다.

사람들이 내게 종종 해외 취재원을 상대하면서 가장 함께 일하기 어려운 나라가 어디냐고 물었다. 내가 경력이 미천하고 사고가 편협하고 성정이 쩨쩨하다는 것을 감안하기를 먼저 당부하고 대답한다. “독일인.” “독일 사람.”

곧장 돌아오는 반응은 눈썹을 치켜 올린 질문자의 “왜?” 하는 외마디 되물음이다. 성실하기로 이름난 독일 사람들이 왜 상대하기 어렵냐는 것인데, 사실 예전의 나는 그들이 자신들이 만든 자동차마냥 안전하고 건실하다는 인식에 '거대한' 회의를 가졌었다.

경제지 기자가 상대하는 것은 기업 홍보 담당자이거나 홍보 대행업체인데, 이들 중 최고는 단연 미국인들이다. 미국에서 홍보 전문가의 위상은 변호사·의사 등의 전문직, 일명 ‘사’자 직업에 버금간다. 첨단 기술업계에서 일하는 홍보 담당자는 공학박사 학위를 갖고 있기도 한다. 이들은 보도자료를 내고 기자와 놀아주는 사람들이 아니다. 기업 의사결정권자 대신 기술 인터뷰를 응하기도 하고 ‘고스트 라이터’로 경영자 대신 칼럼 기고를 해주기도 한다. 능력도 권한도 있고 근면하다(거짓말은 좀 하지만). 일본도 근면성에서는 뒤지지 않는다. 밤이고 낮이고 전화를 받고 답을 줬다.

그런데 독일인들은 참 틀려먹었다. “저 휴가 갑니다. 2주 뒤에 돌아와서 보내 드릴게요” “저 휴가 와있어요. 님도 나중에 와보세요. 여기 정말 좋네요” 하기 일쑤였다는 말이다. 휴가는 항상 장기로 떠나고 휴가기간을 침해받는 것은 누구라도 끔찍하게 여겼다.

독일인은 1년에 최소 4주간의 유급 휴가, 최대 14개월간의 육아휴가, 임금의 약 70%가 지급되는 최대 72주간의 병가가 법적으로 보장돼 있다. 독일 자동차 회사 다임러는 휴가기간 이메일 자동 삭제 프로그램을 시행 중이고 폴크스바겐은 근무시간이 끝나면 이메일을 차단, 출근일에 다시 보내준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도 매년 부부동반으로 여름휴가를 가는데 3주 이상을 쓴다.

올 여름에도 그들 중 몇몇은 내게 말할 것이다. “기자님도 휴가를 가세요. 쉬고 돈 쓰세요. 그게 경제죠. 업계 보도요? 누가 죽고 사는 일이 아니잖아요?” 억울하면서도 부럽다. 땡처리 항공권을 뒤졌다. 나는 독일인에게 휴가를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