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가 명저 <미래를 살다>에서 한 말이 있다. “우리는 카르마(KARMA)에 달라 붙어있다. 카르마는 과거 모든 행동의 누적적 응보(業)이다. 우리는 무(無)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유산을 지고서 출발한다.” 이 구절을 정치판에 적용하면, 누가 권력자가 되더라도 온전히 자신의 뜻대로 세상을 바꾸지는 못한다는 뜻이 된다. 이 말에 기대어 요즘 세상을 놀라게 하는 미국 공화당 대선주자 도널드 트럼프의 공약성 발언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불안감을 덜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의 안하무인적 성격과 매사 돈으로 귀결시키는 가치관이 집권 후에 신중모드로 전환될 지는 누구도 확신하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트럼프의 성정에 일희일비해야 할 우리로서는 주한미군 철수 압박 등 여러 시나리오를 만들어 대응책을 검토해놓는 것이 상책일 것이다.

트럼프의 등장을 계기로 한때 세계적으로 각광받던 ‘CEO형 대통령’에 대해 반성이 일고 있는 것은 다행스럽다. 과거 국가경제가 방향성을 잃고 있었을 때 각국에서는 기업에서 성공한 CEO들이 나라도 잘 살려낼 것이란 기대감이 퍼져 있었다. 결과적으로 볼 때 그런 기대는 허상이었다.

우리도 경험했지만, 그들은 직접 비즈니스를 하겠다며 팔을 걷어붙이고 전 세계적으로 영업을 뛰고, 대규모 프로젝트를 국내외 자금으로 강력하게 추진하는 한편 혁신이 국가의 전 부문에 확산되도록 노력했지만 결실을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오히려 국가지도자가 장관들이 맡아야할 일에 매달리면서 정치‧사회‧문화 등 다양한 국가의 영역들에서는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 대학 교수는 <국가는 회사가 아니다(A Country Is Not a Company)>라는 저서에서 국가를 회사처럼 경영해선 안 된다며 CEO형 대통령에 대해 조목조목 비판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CEO들은 수출이 증가하면 일자리가 늘어난다고 여긴다. 수출 증가로 일자리가 늘어날 수 있지만 동시에 수입도 증가하면서 다른 부문에서는 공장을 닫는 일이 벌어진다. 미국이 일본에 보잉제트기를 수출한다면 그 대가로 일본의 자동차를 구입하게 될지도 모른다.

기업가들은 외자 유치가 늘면 무역 흑자가 날 것이라고 말하지만 착각이다. 지난 1980년대 멕시코는 무역 흑자였지만 1989년 이후 외국인 투자가 쏟아지면서 적자의 늪에 빠졌다. 외국인 투자의 상당 부분은 새로운 공장에 사용할 외국 장비를 수입하는 데 사용됐다. 수입 폭증으로 페소화가 급작스럽게 과대평가돼 수출이 둔화돼 막대한 무역 적자와 함께 페소화의 가치 폭락으로 이어졌다. 대규모 자본 유입은 대규모 무역 적자와 정확하게 일치했다.

CEO들이 국가 경제의 ‘복잡성’을 극복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것도 걱정이다. 미국 경제는 종업원 수가 최대인 GM보다 200배가 넘는 1억2000만명을 고용하고 있다. 수학자의 말을 빌리면, 구성원 간 상호 작용은 사람 수의 제곱에 비례하므로 미국 경제는 GM보다 수천, 수만 배 더 복잡하다.

CEO들이 기업과 국가 경제의 운영을 동일시하는 것도 문제다. 기업은 개방적인 시스템을 갖고 있지만, 국가 경제 운영은 폐쇄형 시스템에서 의사결정이 이뤄진다. 쓰레기 매립지 문제의 경우 지역 주민들은 비용을 지불하더라도 민간폐기물 처리 서비스를 이용하려고 할 것이지만, 국가는 쓰레기를 제3국으로 보내지 않는 한 어느 곳에 쓰레기 묻어야 할지를 반드시 결정해야만 한다.

CEO가 자신의 제한된 경영경험을 일반화하여 섣불리 국정에 반영하게 될 것도 우려해야 한다. 기업가들은 자신이 처한 매우 개별적인 상황 속에서 직관과 혁신을 통해 성공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성공비결이 어느 조직이든, 어떠한 상황에서든 통할 수 있으리라 기대해선 안된다. 성공에도 진리에 가까운 일반법칙이 있다면, 그것은 급변하는 상황에 맞춰 전략적 유연성을 발휘하면서 자기자신도 바꿔가야 한다는 것 정도이다.

크루그먼 교수는 이 대목에서 100개의 다리를 가진 지네의 우화를 소개한다. 일반화에 집착하는 세태에 경종을 울리려는 생각에서다. 하루는 아빠 지네가 열심히 걷고 있을 때 새끼 지네가 물었다. “내가 보니까, 아빠의 스물다섯 번째 다리가 땅에 닿고 나서 서른일곱 번째 다리가 땅에 닿더군요. 서른일곱 번째 다리 다음에는 어떤 다리가 땅에 닿게 되나요?” 당황한 아빠 지네는 자기 다리들을 보며 다리 동작의 일반 원리를 알아내려다가 답을 찾기는커녕 다시는 걷지도 못하게 됐다.

물론 CEO 출신이 대통령이 되면 결코 안 된다는 말은 아니다. CEO적 발상에 젖은 채 대통령 업무를 수행하다간 자칫 나라를 망칠 수 있다는 얘기다. 멀리서나마 트럼프가 정신 차리길 바랄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