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밤. A 기자는 초조한 얼굴로 으슥한 벤치에 앉았다. 약속시간이 지났지만 정보원 B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CIA에게 당한건가.” A는 입술을 깨물며 차가운 밤의 공기를 폐 속 깊숙이 쓸어 넣었다. 손에 쥔 녹음기의 틈으로 진득한 땀방울이 안개처럼 스며드는 불편한 느낌.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뒤돌아보지 말고 앞만 봐.” 기다렸던 B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젖어든다. A는 약간 놀랐지만 애써 평온하게 대답한다. “놀랐잖아요. 미행은 없었어요.” “그래도 방심하지 마. 놈들은 어디에나 있으니까.”

불편한 시간이 하릴없이 흐른다. 이윽고 초반의 흥분이 약간 가시는 것을 느낀 A가 밤하늘을 비춘 달빛에 마음을 빼앗길 무렵, B의 말이 예고 없이 시작됐다. “스타트업 업계에서 아이디어 빼앗기라는 것을 들어봤나?” “글쎄요. 약간은….” “애송이로군.” B는 스산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초기 스타트업은 다른 기업과 아이디어를 공유할 때 NDA(비밀유지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아서 아이디어를 통째로 빼앗기는 일들이 많았어. 최근에는 좀 나아졌지만 아직도 뭣도 모르는 스타트업은 여전히 당하고 살지.” “그래서요?” “뭐 다른 영역도 마찬가지지만 NDA의 범위나 개념도 흐릿한 것이 사실이야. 올해 초 스타트업 얼라이언스를 표방하는 곳이 특정 기업의 아이디어를 무단으로 가져갔다는 주장도 결국 이런 문제에서 시작된 거지.”

날씨가 추워진다. B의 말은 이어졌다. “지난 4월 있었던 S 그룹의 O 스타트업 지적재산권 도용문제도 마찬가지야.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아야 하는 대기업이 스타트업의 ‘생각’을 카피하는 일은 비일비재하지. 아, 그것도 있군. 최근 대기업이 된 K는 얼마 전 스타트업 네트워킹 현장에서 제대로 저격당했어. 스타트업과 만나 함께 사업을 영위할 것처럼 말하고는 그 아이디어만 날름 빼간다는 비판을 받았었거든. K 덕분에 L 스타트업 등 몇몇 스타트업이 속절없이 당하곤 했지. 현장에서 W 스타트업 대표가 K 부사장에게 격렬하게 항의했다나봐. 지금 상황이 그래. 안 그래도 힘든 스타트업에 접근해 그야말로 모든 것을 ‘홀라당’ 빼먹으려는 자들이 많지. 심지어 스타트업 중에서도 서로의 아이디어를 빼가는 일이 많다고. 완전 정글의 왕국이야.”

B는 말을 이어갔다. “스타트업에도 그들만의 리그가 있어. 유명한 투자자와 인연이 되면 잘 나가지. 물론 능력이라는 것 인정해. 하지만 도가 지나쳐. 심지어 B급 투자자로 여겨지는 사람과 인연이 되어 투자를 받으면 후속투자는 요원해지는 것이 현실이라고. 그것뿐인가? 투자자 물색은 물론 정부 지원금에 브로커가 있어. 당장 한 푼이 아쉬운 스타트업에 접근해 지원금을 유치할 수 있게 도와주며 과도한 지분을 요구하는 방식이지. 다행히 요즘은 사라지고 있지만 분명 어두운 단면이야. 마냥 나쁘다고만 보기에는 애매한 문제지만 결국 이러한 논란 자체가 빛과 그림자야.”

B는 킬킬거리며 달빛 아래로 떨어지는 자신의 그림자를 보았다. 말은 이어졌다. “스타트업을 경력직원 입사용 스펙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많아. 여기에 소위 멘토라는 사람들도 달라붙지. 훌륭한 멘토도 많지만 그 사람이 왜 멘토인지 아무도 모르는 사람도 많다고. 전문적으로 정부 지원금을 따내는 멘토와 스타트업의 조합이 여전히 문제로 부각되고 있어. 그것뿐인 줄 아나? 정부 지원이 많이 좋아지고 있지만, 지나치게 관 중심의 마인드가 깊숙하게 배어있는 것도 무시하지 못해. 전국의 C 센터에서 가장 발달된 기능이 ‘의전’이라는 농담까지 나온다고. 사실은 아니지만 왜 이런 말이 나오는지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해.”

말을 마친 B는 의미심장한 얼굴로 말했다. “우리나라는 스타트업이 성공하기에 매우 어려운 나라야. 이익집단이 반발하면 스타트업의 아이디어는 그대로 사라지지. H 스타트업과 C 스타트업이 이런 위기에 직면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야. 게다가 대기업이 달려들고, 같은 스타트업끼리 물고 뜯지. 정부 지원은 좋아지고 있지만 계속 삐걱대고 체리피커, 가짜 멘토, 브로커, 취업용 스펙을 위한 창업자 등도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어. 이 과정에서 정부 지원금의 안락함에 빠져 소위 거지근성에 젖은 스타트업도 나타났어. 비용을 들여 관련 컨퍼런스나 세미나를 열면 ‘스타트업이니 무료로 해줘요’라고 말하는 사람들까지 있다니까? 상황도 어렵지. 최근 어린이날이 끼어있던 황금연휴에 인재채용 J 스타트업이 2달 월급을 줄 테니 연휴 끝나면 나가라고 직원들을 구조조정하기도 했어. 이런 상황이다 보니 못한 스타트업들이 뭉치고 뭉쳐 길을 모색하려고 해도 어려운 것이 사실이야. 최근에 Y의 경우 전환사채, 꽉 막힌 자금흐름 등으로 논란이 되고 있다고. O2O를 바탕으로 탄생한 기업들도 투자유치 외에는 아직 실질적인 수익성을 증명하지 못하고 있어. 심지어 미국에서는 스타트업 열풍이 꺼지고 있다는 소식까지 들려.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글쎄요.” A가 머리를 긁적이자 B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어려워. 결국 우리는 폭탄 돌리기를 하고 있는 거라고. 이 과정에서 실력 있는 진짜배기들이 다칠까봐 걱정이야.” B는 답답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니 A 기자, 명심해. 이제 체질을 개선해서 생태계를 시작하는 단계부터 대수술을 해야 해. 관행이라는 이름의 악습을 걷어내고 진짜 스타트업의 옥석을 가려야 한다고. 분명 욕을 많이 먹을 거야. 하지만 이건 반드시, 누군가 해야 하는 일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