콧대 높은 명품도 불황의 ‘된서리’에는 맥없이 꺾이는 듯 했다. 한국에서도 가장 인기가 높았던 구찌와 버버리 등의 영업이익이 계속해 줄고 있다는 뉴스가 심심찮게 들렸다. 2000년대 초반부터 경쟁적으로 명품을 사들이던 사람들이 지갑을 닫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것은 소량만 제작되는 초고가 명품들은 여전히 날개 돋힌 듯 팔려나간다는 사실이다. 글로벌 컨설팅 업체인 나이트 프랭크가 자산 3억 달러 이상인 '슈퍼리치(super rich)'를 대상으로 조사한 '2016년 부 보고서(Wealth Report 2016)'을 보면 세계 경기의 침체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지난해 명품 시계, 포도주, 자동차 등 초호화성 소비 지출을 늘린 것으로 나타났다. 불황에도 건재한 상위 0.5% 부유층과 자수성가한 젊은 갑부들은 남의 이목을 덜 끌면서도 희소성 있고 값진 물건들을 욕망했다. 전보다 내밀하고 고급스러워진 명품의 세계를 엿봤다.

‘명품 위의 명품’이라면 가격도 가격이지만 아무나 가질 수 없다는 것도 함의할 것이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생전에 롤스로이스를 구입하려다 거절당한 적이 있다. 영국 왕실의 자동차로 알려진 롤스로이스는 1904년 자동차와 항공기 엔진 제조사로 처음 설립됐다. 이들은 과거 실제로 전세계 대표 명사들로 채워진 고객명단을 가지고 자체 평가를 통해 판매를 했다. BMW 그룹에 매각된 현재는 그 정도는 아니지만 고가의 주문 제작 차량을 제공하는 업체라는 이미지는 여전히 강하다.

독일 자동차 메이커 벤츠는 롤스로이스와 벤틀리가 양분한 최고급 세단 브랜드에 마이바흐를 내놓고 승부수를 띄웠다. 마이바흐는 국내에서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차로 알려졌는데 이 차의 경우 차 값만 2~10억 원대에 달하고 1년 보험료는 국산 대형차 값에 육박하지만 출시와 함께 화제와 인기를 한 몸에 모았다. 최고급인 마이바흐 S클래스는 지난해 한국에 출시된 이후 한달 평균 100대씩 팔려나갔다.

남성들이 벤츠를 버리고 마이바흐로 옮겨 타는 동안 여성들도 익숙한 구찌 로고를 버렸다. 초고가 악어가죽 전문 브랜드로 유명한 콜롬보를 비롯해 가장 오래된 핸드백 브랜드 델보, ‘이탈리아 에르메스’로 불리는 수공예 가죽 브랜드 발렉스트라가 상류층 여성들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1000만 원대의 에르메스 가죽 백 또한 여전히 그 희소성으로 인기가 높다. 최소 1년은 기다려야 받을 수 있는데다 소재와 장식에 따라 1억 원대를 훌쩍 넘어선다.

이들은 수수한 외형과는 달리 수천만원에 달하는 몸값을 자랑한다. 로고가 드러나지 않지만 수제작 제품으로 이름 등을 각인해 주는 ‘인그레이빙 서비스’ 등 고객들에게 특화된 경험을 제공한다.

▲ 출처=발렉스트라

초고가 명품 소비자들은 백화점보다는 브랜드 단독매장인 플래그십 스토어나 명품 편집숍을 애용한다. 35세의 사업가 김영하씨(가명)는 “백화점은 세일이나 상품권 행사 등으로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지만 좋아하는 브랜드의 경우 플래그십 스토어를 이용한다"고 전했다. 그는 “플래그십 스토어에서는 공간적 여유가 있고 고객 서비스도 훌륭하다”며 “백화점에는 전시되지 않는 한정판 제품이 있다”고 뀌띔하기도 했다.

희귀 브랜드를 수입해와 판매하는 청담동의 '분더숍'이나 '10 꼬르소꼬모' 같은 명품 편집 숍은 재벌가 딸들이 운영하는 상위 0.5% 쇼퍼들의 ‘사랑방’이다. 최고 1000만 원이 넘는 키톤 양복이나 로고가 없지만 최고급 원단을 자랑하는 로로 피아나, 이탈리아 하이엔드 남성복 브랜드 브리오니, 최고 4000만 원까지 값이 매겨지는 구두 실바노 라탄지 등도 조용히 한국 시장에서 진출해 성장 중이다. 상류층 신사의 필수품 손목시계는 이름부터 낯선 유럽제가 대다수다. 바쉐론 콘스탄틴, 랑에 운트 죄네, 로저드뷔, 예거 르쿨트르, 리차드밀, 파텍 필립, 오데마 피게, 파네라이, IWC 등은 항공 기술 등 최첨단 소재와 기술을 적용해 가격이 수억원까지 올라간다.

▲ 출처=노에사

백화점 1층을 점령한 고급 화장품 중에도 아는 사람만 쓰는 초고가 제품은 따로 있다. ‘브란젤리나’ 커플이 사용하는 독일의 화장품 브랜드 노에사는 제품 평균 가격이 90만  원대에 달한다. 식물에너지로 피부 세포 재생을 촉진한다는 컨셉의 노에사는 별다른 마케팅 활동 없이 30∼40분의 일대일 피부 컨설팅을 제공하며 강남 여심을 사로잡았다. 지난 해 아모레퍼시픽이 출시한 75만 원대 '프라임 리저브 에피다이나믹 액티베이팅 크림'은 예약판매만으로 모든 물량이 판매돼 예상에 없던 재출시를 해야 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또 평균 30만원대의 니치 향수도 인기다. 딥티크, 세르쥬 루텐, 메종 프란시스 커정, 펜할리곤스 등의 유럽 향수들이 알음알음 팔려나갔다. 이러한 고가 향수 브랜드들은 매년 30% 매출신장을 보이는 반면 일반 향수와 화장품 매출은 3년 동안 성장 둔화를 겪고 있다는 연초의 신세계백화점 통계도 있었다.

부자들은 일상의 소품도 클래식한 디자인의 견고한 내구성을 가진 것들을 선호한다. 수십만원대 우산이나 수백만원대 만년필이 이들의 애장품이다. 영화 ‘킹스맨’ 요원들이 사용하는 우산은 영국 여왕도 즐겨 든다. 이 수제 우산은 250년 전통의 스웨인 아데니 브리그 제품으로 가격은 50만 원대다. 영화 ‘발키리’에서 톰 크루즈가 ‘다빈치 코드’에서는 톰 행크스가 들었던 가방도 이 회사가 만들었다. 수제 우산을 처음 국내에 들여온 것은 제일모직이 2006년 한정 수량 수입한 영국 폭스 엄브렐라였다. 삼성물산 패션홍보 담당은 현재도 란스미어에서 판매 중으로 가격은 25~35만 원대라고 전했다.

영화 ‘쉘부르의 우산’으로 알려진 프랑스 우산 브랜드 쉘부르 우산은 저가 모델 없이 20만원 후반에서 50만 원대다. 우산대나 손잡이는 80-100년 된 단풍나무로 만들고 우산대는 카본 스틸과 18K, 24K의 금으로 수공 제작해 고전미를 살렸다. 쉘부르 우산을 수입하는 아미커스앤코는 “높은 가격대 때문에 젊은 층이 쓰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20대 고객도 많다”고 전했다.

▲ 출처=버투

국내에는 출시되지 않았지만 영국에 본사를 둔 초고가 휴대폰 버투(Vertu)는 1000만 원대다. 장인들이 손으로 크리스털 화면과 사파이어 자판 등의 귀한 소재로 조립하고 몸체에 고급 가죽을 씌워 자인의 서명까지 새겨 넣는 등 정성으로 만드는 수제 스마트폰 버투는 구입 후 6개월마다 가죽을 교체해 주는 등 사후 관리까지 꼼꼼하다. 가장 비싼 모델은 3억원이 넘었다. 달한다. 버투는 지난해 홍콩 기업에 팔려 중국의 억만장자들을 겨냥하고 있다. 

명품 소비자들의 소비 패턴이 ‘소유’를 넘어 ‘경험’으로 확장 중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보여주기’식의 소비보다 ‘즐기기’식 소비를 지향하는 부자들은 개인비행(private flights), 예술품 경매, 요트, 와인, 오디오 등 보이지 않는 것에도 아낌없이 돈을 쓴다.

아시아 최초의 명품 전문교육기관 럭셔리 비즈니스 인스티튜트(LBI)의 권윤정 전무는 “초고가 럭셔리 소비자층은 상속재벌이 가장 큰 포션을 차지한다”면서 “연예인, 스포츠 스타, 벤처 사업가 등의 자수성가형 신흥 부자들도 최근 늘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그는 이들의 소비 품목에는 차이가 있다고 설명한다. 상속재벌들은 자수성가형 신흥부자에 비해 라이프 스타일 아이템에 높은 소비를 보인다는 점이 특이점이다. 예컨대 신흥부자들이 에르메스의 버킨백을 소비한다면, 상속재벌들은 에르메스의 캐시미어 실내복을 소비하는 식이다. '보여주기' 위해 소비할 수 없는 라이프 스타일 품목에는 고가의 침대도 들어간다.

선진화된 철강기술을 바탕으로 한 스웨덴은 초고가 명품 침대로 유명하다. 스웨덴 명품 침대 브랜드 해스텐스의 경우 최고급 한정판 모델인 ‘비비더스’는 변두리 전세 아파트값에 맞먹는다. 같은 스웨덴 출신의 침대 브랜드 덕시아나도 전세계 갑부들에게 80년 전통을 지닌 ‘최고의 제품’이라는 평판을 얻고 있다. 두바이 7성급 ‘부르즈 알 아랍’ 호텔의 121개가 설치돼 화제가 되기도 했던 덕시아나 침대는 1000만~2500만원대로 고급모델의 경우 1억이 넘어간다. 일반 침대보다 3배 이상 많은 자체 스프링을 사용하는데다 매트리스는 일일이 손으로 조립해 가슴·허리·엉덩이 부분을 다른 하중으로 떠받칠 수 있도록 하는 등 수면의 질적 향상을 기했다는 설명이다.

▲ 출처=덕시아나

2000~3000만원 대의 미국 프리미엄 냉장고 서브제로 냉장고와 엔트리 제품만도 8000만원에 달하는 골드문트 오디오, 르 꼬르뷔지에의 소파, 몰테니 가구, 고가 다이슨 청소기, 80인치 이상 초대형 UHD TV 등은 상류층의 혼수품목으로도 빼놓지 않고 이름을 올리고 있다.

권 전무는 경기가 침체기로 접어들게 되면 무리해서 명품을 소비하던 중산층들은 소비를 중단하고 부유층만이 소비를 이어가기 때문에 초고가 명품의 판매가 더욱 도드라져 보이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부유틍 소비자들은 초고가 명품을 단순한 소비재로 보지 않고 소장가치 나아가 투자의 가치까지 있다고 믿기 때문에 다른 업계에 비해 영향을 덜 받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는 “로고 브랜드가 '평범한 사람들이 즐기는 특별한' 소비가 됨에 따라 초고가 제품 실소비자들은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그들만의 리그(이너써클)’에서만 통용되는 새로운 기준을 찾는 것"이라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