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는 시해당하지 않았다⑤

▲ 소설가 겸 칼럼니스트.

주한 러시아 공사 베베르가 노력한 결과 고종의 아관파천을 이끌어낸다.

아관파천을 이끌어낸 러시아는 1894년 대원군을 앞세운 일본의 경복궁 점령사건으로 온통 친일파로 도배를 해 버린 조선의 조정을 친러 일색으로 바꾼다. 그리고 그 정권을 기반으로 본격적인 조선 강탈에 들어간다.

러시아 군함에 있던 수군 120명을 무장시켜 서울에 주둔시킨다. 그리고 1896년 5월 14일 베베르-고무라 각서를 체결하여 친러 정권을 인정받고 일본이 을미난동의 책임을 시인하게 했다.

뿐만이 아니라, 일본은 러시아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파견하여 1896년 5월 28일에서 6월 29일에 걸쳐 비밀협정을 맺으려 한다. 이 협정에서 일본은 ‘북위 39도선을 경계로 조선을 분할통치하자’는 제안을 한다. 하지만 조선의 왕을 손아귀에 넣은 러시아는 이 안을 수용하지 않고 공동 점거할 것만을 협의하자고 한다. 또, 러시아는 경원・종성 광산채굴권, 인천 월미도 저탄소 설치권, 압록강 유역과 울릉도 살림 채굴권 등의 경제적 이권을 탈취한다. 러시아는 아관파천을 빌미로 조선 땅에서 군사, 정치, 경제의 이득을 한꺼번에 손에 쥐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을미년 난동의 최대 수혜국은 러시아다. 죽지도 않은 남의 나라 국모가 일본에 의해 시해당했다고 부추겨서 자기네 이익 챙기기에 급급했던 것이다. 재주는 왜놈들이 부리고 돈은 러시아 붉은 곰들이 챙긴 것이다.

어쨌든 일본은 을미난동에서 참담한 결과를 자초했다. 명성황후가 시해당하고 안 하고는 차치하고 목격자들에 따르면 일본이 일으킨 난이라는 사실은 확인되었다. 조선의 모든 것을 차지하기 위해서 일으킨 난 때문에 얻는 것보다는 잃는 것이 많게 된 것이다. 그것이 일본으로서는 끝까지 자기네가 명성황후를 시해한 것을 고집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만일 일본이 을미난동은 사건대로 실패하고 조선에서의 이권은 잃을 대로 잃었다는 것이 사실대로 밝혀져진다면, 그 사건 당시 총리였던 이토 히로부미는 물론 외무대신 무스 무네미스까지 영원히 일본 정계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기왕 그리될 바에야 처음에 시해를 시도한 목적의 전부는 못 얻더라도 반이라도 건지자는 것이 당시 일본 위정자들의 책략이었다.

▲ 위키피디아

조선을 겁줌으로써 일본이 조선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것은 못하더라도 조선의 자존심만은 최대한 짓뭉개자는 것이다. 그래서 점점 자신들이 조선의 국모를 시해했다는 것을 공공연히 ‘민비사건에 대하여’라는 논문 같은 저술이라는 명목으로 드러내는가 하면, 우리나라 광복 후 지금까지도 들먹이고 있는 것이다.

자신들이 실패한 난을 성공한 거사로 만들어 두고두고 우리 민족을 욕보이자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자존심을 영원히 짓뭉개자는 것이다. 지금도 매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벌어졌던 날이 오면 당시 난에 참여했던 일본 낭인들의 후손들이 사과를 한다고 우리나라를 방문하고 있다.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겠지만 실로 그 진실성에 의문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다시 그날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그 사건 이후 난동을 주도했던 오카모도 류노스케의 행적이다. 당시 난동에 참여한 중심인물들은 일본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무죄방면된 후, 이토 히로부미의 배려 아래 무스 무네미스가 자리를 만들어서 준 자리를 하나씩 꿰차고 탄탄대로를 달린다. 그 즉시 보답을 받았던, 아니면 훗날을 예약 받았던 모두 자기가 가고 싶은 길을 갔다.

미우라는 추밀원 고문으로 추대되었고, 시바 시로는 중의원을 여러 번 지냈다. 구스노세는 육군대신까지 했다. 그 외에도 겐요사 양아치들 빼고 중심인물들은 다 하나씩 보답을 받았다.

하지만 당시 외무대신인 무스 무네미스의 양아들로 친아들 이상으로 가까웠고 그 사건의 핵심인물로 사건을 진두지휘했던 오카모도는 1897년부터 줄곧 중국을 떠돌다가 결국 1912년에 객사하고 만다. 그는 그날 자신들이 황후를 시해하지 못한 것을 알기에 어떻게든 시해함으로써 실패한 거사를 성공한 거사로 만들기 위해 발버둥쳤던 것이다(6회 마지막회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