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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마켓은행'은 서바이벌에서 살아남기 위한 미국 은행이 발상해낸 모델이다. 제2차 오일쇼크가 일어난 79년, 인플레이션이 심해지면서 은행 간 금리경쟁이 극으로 치달았다.

자산 가치가 폭락하는 80년대 중반 은행은 온갖 부실을 떠안은 신세가 됐는데 당시 '은행은 죽었는가'와 같은 최악의 전망들이 악령처럼 시장에 떠돌았다. 몰골이 처참해진 은행은 살아남기 위해 생존 방식을 즉각 수정해야만 했는데 전통적인 예대마진에 갇혀있다가는 굶어죽기 십상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덕분이었다. 제도적 장치도 힘이 됐다.

굶주린 은행은 철저히 투자은행으로 변모해갔다.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을 위해 과감히 인수합병에 뛰어들었으며 파생상품 투자에도 과감히 베팅했다.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통해 행원 1인당 생산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선회하다보니 기발하고 새로운 사업전략도 쏙쏙 등장하게 됐다. 그렇게 나온 것이 ‘슈퍼마켓은행’이다.

증권, 보험 등 금융상품의 교차 판매로 혁신의 범주를 넓힌 은행은 유통기업과 손을 잡고 뭔가를 내밀었다. 쇼핑고객에 대해 축적해놨던 '소비자정보'와 '브랜드파워'를 결합해 '수퍼마켓은행'이라는 독립법인을 출범시킨 것.

거침없이 '마트' 속으로 걸어 들어간 은행은 고객들의 장바구니에 금융도 담길 수 있다고 확신했고 그것을 증명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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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금융정보지 'Retail Banker International'에 따르면, 슈퍼마켓은행의 시초는 스웨덴의 슈퍼마켓체인 ICA다. ICA는 신용카드 매출과 관련해 은행에 지불하고 있는 수수료가 자그마치 카드매출액의 3.6%에 달하고, 매장당 총이익의 1/3 정도에 이르는 것을 발견, 서둘러 자사 신용카드제도를 도입해 고객들이 자사 점포에서 카드를 긁도록 유도했다.

마트와 은행을 결합한 실험과 도전은 영국에서 지속됐다. 대표적인 것이 'Sainsbury은행'이다. 영국 최대 슈퍼마켓업체인 'Sainsbury(1869년 출범)'는 97년 2월 스코틀랜드에 기반을 둔 'Bank of Scotland'와 50대 50으로 출자해 'Sainsbury은행'을 설립했다. 기세 좋게 뻗어나간 Sainsbury은행은 설립 8주 만에 10만 명의 고객을 확보하고 1900억원 규모의 예금 유치를 성사시키며 실적을 자랑했다.

583개의 슈퍼마켓에 15만 종업원을 거느린 Sainsbury 슈퍼마켓그룹이 보유한 고객은 1400만 명에 육박할 것으로 추산됐다. 마트에서 필요한 금융도 가입하면서 연계 서비스까지 누릴 수 있으니 고객이 마다할 이유가 없다.

'Sainsbury' 슈퍼마켓그룹은 식품유통이 주종이지만 커피점, 약국, 레스토랑, 음반, 서점도 운영해 고객 유입 경로가 넓었다. 영국에서 60억 파운드의 가치를 지닌 부동산개발회사도 보유했다.

 90년대에 24시간 폰뱅킹, ATM와 신용카드 서비스를 1000만 고객과 일반 소비자를 대상으로 공급하는 데 집중한 Sainsbury은행은  최근 2백만 명 정도의 예금고객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진다. 예금액은 20억 파운드((한화 약 3조 5270억 원)를 넘어섰다. 서비스도 개인대출, 저축성예금, 여행자보험 등으로 확장했다.

슈퍼마켓은행은 막강한 점포망과 고객친화적인 브랜드파워를 밑천으로 시금치묶음이나 선물꾸러미, 과자봉지처럼 금융상품도 매장에서 팔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 데서 비롯됐다. 돈은 있지만, 시간은 없는 고객들이 한 장소에서 소비재와 금융을 쇼핑하는 것이다. 그것도 통합포인트로 할인받고 결제하면서 말이다. 고객의 눈으로 보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게 '슈퍼마켓은행'이 갖고 있는 기본 프레임이다.

몇몇 앞선 슈퍼마켓들은 자동차보험상품을 매장에서 팔기도 했다. 고객들은 장바구니에 담아온 보험상품 패키지를 뜯고, 가입신청서에 인적사항을 적어 우체통에 넣으면 이를 받은 보험회사가 가입수속을 처리하는 식이었다.

실적은 미진했지만 한국의 보험사도 마트를 통해 보험을 팔았다. 마트 분유코너에 어린이보험을 진열한 현대라이프가 이같은 방식을 따른 것이다. 진열대에서 성별과 나이에 맞는 보험 상품을 선택 후, 마트계산대에서 결제한 뒤 웹사이트에서 박스 안 보험선불권을 사용해 상품을 가입했다.

한발 더 나아가 영국 슈퍼마켓그룹 경영자들은 매장에서 금융상품도 팔되 브랜드도 직접 만드는 쪽으로 생각을 발전시켜 독립법인으로 슈퍼마켓은행을 탄생시킨 것이다.

▲ tescobank.com

영국의 슈퍼마켓 서열 2위 업체인 Tesco는 Sainsbury은행의 출범을 뒤쫓았다. 1997년 7월 Royal Bank of Scotland와 절반씩 투자해 Tesco Personal Finance(테스코은행)라는 은행을 설립했다. 역시 마트 고객이 금융을 이용하도록 다양한 미끼를 던졌다.

후발주자인 테스코은행은 선택과 집중으로 시장을 선점했는데 취급비용이 많이 드는 송금, 수표계좌 등의 결제성 업무는 모두 Royal Bank of Scotland를 이용하도록 유도하고, 고객 문의도 제휴은행의 텔레뱅킹(direct line)으로 해결했다.

뿐만 아니라 하루 24시간 연중무휴로 운영되는 폰뱅킹서비스 제공과 지리적으로 제휴은행과 거의 중복되지 않는 점포망 운영으로 효율성을 극대화했다. 숨가쁘게 집약된 마케팅으로 1년 만에 60만명 고객을 확보했으며 전국 12곳에 슈퍼마켓지점을 보유할 수 있게 됐다.

이같은 슈퍼마켓은행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멤버십포인트다. 모그룹 슈퍼마켓에서 고객이 상품구입시 사용하는 포인트카드는 고객 충성도를 높이며 은행은 고객정보를 충분히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슈퍼마켓 최초로 도입된 테스코은행의 Loyalty Card는 6개월 만에 전 고객의 80%에 해당하는 850만 장을 넘어서 영국 전체인구의 1/5(약 1300만명)을 차지할 정도로 인기를 불러모았다. 한국의 손보사들도 다양한 포인트사용과 적립 서비스를 제공하며 고객을 유인하고 있다.

CRM 전문가는 “기존 고객을 만족시키면 만족한 고객은 반복구매를 하며 다른 사람에게 제품에 대해 좋게 평가하며, 그 회사의 다른 제품에 대해서도 호의적인 반응을 보낼 뿐 아니라 경쟁업체의 브랜드와 광고에 관심을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특징이있다“고 말했다.

이종산업의 결합을 상징하는 슈퍼마켓은행은 세계무대에서 다양하게 펼쳐지고 있다. 꼭 슈퍼마켓이 아니더라도 다른 산업의 은행업 진출로 진화 중이다. 미국·중국·유럽에선 이미 1990년대 중순부터 산업자본의 은행 소유를 허용했고, 일본의 IT 기업인 소니와 라쿠텐(전자상거래업체), 중국의 텐센트(게임업체) 등은 이미 인터넷전문은행을 설립해 운영 중이다. 아직까지 한국에서는 상상으로만 가능한 일이다. 은산분리(산업자본의 은행 소유 금지) 규제 완화가 해결되지 않은 한은.

프레임을 달리해 은행업을 바라봐도 꿈을 이룰 방법이 없다. ‘규제 감옥’은 여전히 전통적인 ‘예대마진 시대’를 살고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