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코노믹리뷰 안영준 기자]


눈 내리는 한 겨울, 따뜻한 아랫목에서 시리도록 차가운 면발을 고깃국물과 함께 후루룩 들이키는 것이 겨울별미 냉면의 참맛이라 한다. 하지만 요즘처럼 30도를 오르내리는 무더위 속에 냉면은 도시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대표적 여름별미가 됐다. 한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이북음식이기도 한 냉면. <원조집 열전 2편>에서는 함흥냉면의 원조인 <오장동 흥남집>을 찾아 함경도 회국수의 맛을 찾아본다.

오후 3시, 초여름의 햇볕이 제법 뜨겁다. 작은 상가들이 촘촘히 모여 있는 오장동의 복잡한 거리를 걷다보니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열기가 얼굴을 휘감는다.
오장동. 함흥냉면의 원조거리로 알려진 곳이다.

특정 어느 집이 원조집이라기보다 오장동 자체가 함흥냉면의 원조라고 인식된 이곳. 하지만 오장동 골목에는 딱 세 곳의 함흥 냉면집이 있다. 1953년 문을 연 ‘오장동 흥남집’. 이듬해 문을 연 ‘오장동 함흥냉면집’ 그리고 80년에 생긴 ‘신창면옥’. 이 세 집이 바로 ‘오장동=함흥냉면’이라는 공식을 만들어낸 트로이카다.

그러나 몇 초 간격으로 태어난 쌍둥이도 형님 아우는 있는 법. 1년 먼저 문을 연 맏형 격인 오장동 흥남집을 찾았다. 이층으로 된 벽돌집의 깔끔한 내부. 60년 된 건물치고 깨끗한 것을 보니 증축을 한 모양이다.

1953년 함경도 흥남이 고향인 고 ‘노용원’ 할머니가 서울로 피난 내려와 생계를 위해 차린 작은 냉면집은 원래 ‘흥남옥’이었다고. 그러나 이곳을 찾는 실향민들에게 ‘흥남집’이라 불리며 자연스레 동네 지명을 따 ‘오장동 흥남집’이 돼 버렸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할머니가 운영하는 흥남집을 놀이터 삼아 뛰어 놀았던 어린 손자는 어느새 할머니와 어머니의 대를 이어 3대째 흥남집을 지키고 있었다. 함경도에서 즐겨 먹던 가재미(가자미의 북한말)회 냉면을 재현한 오장동식 함흥냉면의 맛은 어떨까? 냉면 마니아인 개인적 취향상 그 맛이 매우 궁금한 가운데 냉면 그릇에 얼굴을 묻고 숨 한번 안 쉬며 면발을 삼키는 중년 부부가 있어 슬쩍 말을 걸어본다.

“ 아버님, 여기 찾으신 지 몇 년 되셨어요?”
“ 내가 안사람과 여기 온 지 벌써 20년이 넘었지.”
“ 오래 되셨네요. 함흥집 냉면의 별미가 뭐라 생각하세요?”
“ 여기는 이 가재미 회가 최고지. 뭐가 맛있냐고 물어보면 딱히 모르겠는데 확실한 건 이 쫄깃거리는 회 맛을 다른 곳에선 맛볼 수 없다는 거요.”

건대입구에 산다는 예순두 살의 그는 날씨가 더워지면 매콤한 양념과 쫄깃한 가재미 맛이 생각나 일주일에 한두 번은 이곳을 찾는다고 한다. 이들 부부가 증명하듯 이곳은 특히 가재미 회를 넣은 회냉면의 인기가 높다. 식초에 절인 가재미의 쫄깃한 맛을 잘 살린 꾸미(고명의 북한말: 회를 뜻함)에 고구마 전분으로 뽑은 부드러우면서도 쫄깃한 면발이 손님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

특히 입맛에 따라 준비된 참기름, 식초, 겨자, 설탕, 갖은양념 등을 넣어 먹으면 그 맛이 배가된다. “열 마디 말보다 한번 맛을 보라”고 권하는 주인장의 말에 음식 촬영 준비를 하며 한쪽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가재미 회가 올려진 회냉면과 소고기 편육이 올라간 물냉면이 테이블 위에 올려졌다. 이곳에서 20년 이상 일을 했다는 이모님이 서슴없이 회냉면에 양념을 해 준다. 갖은양념(다대기)을 반 스푼 넣어 매운 맛을 높이고 식초와 겨자를 넣더니 설탕도 한 스푼 거침없이 투하.

마지막으로 참기름을 휙 두르니 그 고소한 향에 절로 침이 고인다. 다른 냉면집처럼 으레 수저와 함께 놓이는 가위는 요청할 때만 주는지 보이지 않는다. 다른 테이블 역시 딱히 가위를 달라고 요청하는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원래 제대로 냉면을 먹으려면 입으로 면발을 끊어 먹어야 면 고유의 향을 유지할 수 있단다.

매콤한 양면이 잘 비벼진 면발을 후루룩 먹어본다. 새콤, 달콤, 매콤하다. 양념 자체는 맛있긴 한데 여느 곳과 큰 차이는 없다고 느끼며 가재미 회를 함께 입에 넣는 순간, ‘이것이군!’ 하는 감탄이 스친다. 씹는 맛이 제대로다. 식초의 톡 쏘는 향이 느껴지며 입 안에서 매콤한 양념과 섞여 쫄깃거리는 질감이 꽤 인상적이다.

물냉면의 맛은 슴슴하다. 담백한 듯하면서 심심한 것이 독특하다. 물냉면 육수 맛이 특징적이라 말하는 기자의 말에 주인장 윤재순씨는 “물냉면 맛이 왜 이렇게 싱겁냐고 화를 내는 분들도 있다” 며 웃는다.

소고기를 삶은 첫 번째 육수와 사골을 삶은 육수를 섞어 진하지 않으면서도 담백한 맛을 낸 것이 흥남집 물냉면의 특징이라는 것. 매운 맛을 중화시키는 육수 역시 가마솥에서 갓 떠온 숭늉 같다. 사골국물에 무, 양파, 생강 등을 넣어 진하지 않게 끓였다고 한다.

“할머니가 생전 손맛이 참 좋았다”며 돌아가신 할머니를 떠올리는 윤재순 사장은 그 맛을 지키기 위해 할머니 손맛을 기억하는 30년 이상 함께 해온 주방 식구들과 매일 냉면을 먹어본다고 한다. 맛이 변하지 않았는지 확인해 보는 것. 주문이 들어오는 즉시 면발을 뽑아 쫄깃한 생면을 제공하는 것 역시 할머니 방식 그대로다.

“함경도 흥남 출신의 실향민이 오시면 아무래도 냉면 사리 하나라도 더 챙겨주게 되지요” 라고 말하는 윤재순 사장. 두고 온 고향을 그리워하며 노용원 할머니의 함경도 사투리를 듣고 그녀의 음식을 먹으며 버릇처럼 오장동 흥남집으로 발길을 돌렸을 실향민들의 그리움의 깊이가 새삼 가슴에 와닫는다.

찾아가는 길 : 을지로 4가역 8번 출구, 중구청 사거리에서 좌회전해 100m 직진
메뉴 : 회냉면, 비빔냉면, 물냉면, 섞임냉면, 온냉면 모두 8000원, 회무침, 수육 2만원대.
문의 : 02)2266-0735

최원영 기자 uni3542@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