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태욱 ㈜스토리엔 대표.

천 년을 하루 같이 한 여자만을 사랑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20년 전에 강제규 감독이 만든 영화 <은행나무 침대>의 극 중 인물 황 장군(신현준 분)입니다. 천 년 전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은행나무 침대로 환생한 공주 미단(진희경 분)을 차지하려는 당대 최고의 무관인 황 장군은 미단이 사랑하는 궁중악사 종문(한석규 분)을 없애려 하고, 미단은 종문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불사르는 천 년의 러브 스토리죠.

당시 영화를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은행나무로 만든 이 침대는 천년지애(千年之愛)를 품고 있습니다. 종문과 미단의 천 년 전의 사랑이 담겨 있었고, 미단을 연모하여 천 년 동안 그녀를 쫓아온 황 장군의 사랑을 담고 있었으며, 또 세월이 흘러 20세기에 그들은 그 사랑들을 이루려 했습니다.

서울 종로 교보문고 광화문점에도 천 년이 훨씬 넘는 나무에 담긴 스토리가 있습니다. 이 서점에는 지난 11월부터 대형 테이블 2개가 서점 한가운데에 놓여 있습니다. 길이가 무려 11.5m, 폭 1.5~1.8m에 이르고, 약 1.6톤 무게를 지닌 거대한 테이블입니다.

그래서 그 테이블에서 100여 명의 독자들이 한꺼번에 앉아서 독서를 할 수 있다고 하니 정말 그 크기가 어마어마하죠. 게다가 테이블에 사용된 나무는 무려 5만 년 된 대형 카우리 소나무인데요, 다행히도 이 나무는 뉴질랜드 북섬의 카우리 숲에서 5만 년 전 자연재해로 쓰러져 늪지대에 묻혀 있어서 원형을 고스란히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 테이블은 5만 년의 역사와 함께 지금은 고인이 된 교보생명 창립자 신용호 명예회장의 철학이 오롯이 담겨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 명예회장은 자서전에서 “책을 많이 읽힐 수 있도록 독자들과 만날 수 있는 광장을 만들어야 한다”고 할 정도로 책 읽는 공간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모양입니다. 따라서 이 테이블 때문에 교보문고는 책만 판매하는 서점이 아니라 책을 읽는 공간으로써의 교보문고로 한층 자라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교보문고 서울 광화문점의 소나무 테이블 모습. 사진=김태욱 제공

은행나무와 카우리 소나무 말고, 또 하나의 나무와 썸을 탄 스토리가 있습니다. 서울시 중구 정동길에 가면 캐나다대사관이 있습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대사관 건물은 V자 형태의 구조입니다. 건축의 효율성을 따졌을 때 이해하기 어려운데요, 그 이유에 고개가 절로 숙여집니다. 지난 2007년에 개관한 이 대사관은 건축 당시 중앙에 놓인 520년이나 된 회화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건물 면적의 손해를 보면서까지 나무를 피해 건물 형태를 V자로 지었다고 하니, 캐나다인들의 나무 사랑에 존경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천 년의 사랑을 연결해주는 은행나무, 책 읽는 공간을 독자에게 선물하는 5만 년 된 카우리 소나무, 캐나다인의 나무 사랑을 보여주는 520년 회화나무. 이렇게 나무에도 저마다의 스토리가 있습니다. 이 스토리는 과거의 역사도 담고 있지만, 나무가 새잎을 돋고, 낙엽을 떨어뜨리고, 또 나이테가 늘듯이 담긴 고귀한 스토리는 나무와 함께 나이테가 늘고 키가 자라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귀한 스토리는 단단한 열매가 되어 많은 사람에게 훌륭한 영양분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2015년 을미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교보문고에는 캐롤과 근하신년 메시지로 가득 차고 있습니다. 또 소나무 테이블의 스토리가 더 퍼져 나간다면, ‘5만 년 된 카우리 소나무, 100인의 독서 테이블’이라고 불리는 이 테이블에 스토리에 걸맞은 멋진 이름이 탄생하기를 기대해봅니다. 물론 이 서점을 찾는 시민들이 직접 만들어주면 더욱 의미가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