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태욱 ㈜스토리엔 대표.

‘운둔근(運鈍根)’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나요? 필자가 예전 직장인 오리온에서 홍보팀장으로 근무할 때 대표이사였던 김상우 사장이 자주 했던 건배사인데, 아직도 필자의 마음속에 오랫동안 남아있는 소중한 말입니다. 원래 운둔근은 고(故)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회장의 경영철학이 정리된 <호암어록>에 나와 있답니다.

김 사장의 설명에 따르면 직장에서 성공하는 데는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한데, 바로 운둔근이랍니다. 운(運)은 사람은 자신이 지닌 능력 하나만으로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운을 잘 타야 하는데, 여기에 공간(空間), 시간(時間), 인간(人間)이라는 세 가지 운인 삼간(三間)이 작용한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 둔(鈍)은 운이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둔함이 있어야 하며, 마지막의 근(根)은 그 운이 들어왔을 때 잘 품어 뿌리로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였습니다.

좋은 건배사는 누군가에게는 잊지 못할 삶의 지표가 될 수 있으며, 또 건배자를 기억하는 한 마디가 되기도 합니다. 즉 그 사람의 브랜드로 기억됩니다. 기업이 그 브랜드 아이덴티티(Identity, 독자성)를 표현한 방법으로 슬로건을 활용하듯이, 개인에게도 건배사는 개인의 슬로건이 됩니다. 특히 많은 사람에게 자신의 개성과 삶의 철학을 표현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는 송년회에서 건배사는 절호의 찬스라 볼 수 있죠. 그래서 건배사는 좌중을 흔드는 ‘15초의 미학’이라 볼 수 있습니다.

어느덧 12월이 되었으니, 여기저기서 송년회 모임이 잦아질 것입니다. 이왕이면 자신을 홍보할 수 있는 주어진 15초를 위해 자신만의 멋진 건배사를 만들어 보면 어떨까요? 기업 슬로건을 만들듯이 말이죠. 그 방안으로 먼저 건배사는 ‘유머 코드’가 있어야 합니다. 15초짜리 CF처럼 쫙 빨아들이는 흡입력이 필요합니다. 의미가 기발하여 좌중이 ‘와~’ 하고 감탄하거나, 표현이 재미있어 박수를 유도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영화 <빠삐용>의 제목을 건배사로 하면, ‘빠지거나 삐치면 용서하지 않는다’로 모임의 결속을 강조하는 유머 코드로 제격이고, 북미에 있는 폭포 ‘나이아가라(Niagara)’는 ‘나이야~ 가라’로 고전이 되어 버린 ‘99세까지 88하게 살자’는 9988(구구팔팔)처럼 연로한 분들이 청춘을 부르는 신나는 구호가 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건배사는 ‘리듬감’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로 약어를 사용합니다. 또 운율을 활용하여 두운(頭韻)이나 각운(脚韻)을 살려줍니다. 그리고 선창과 후창이 가능하면 금상첨화죠. 가령 ‘당당하게 살자, 신바람 나게 살자, 멋지게 살자, 져주며 살자’의 ‘당.신.멋.져.’는 적절한 약어 활용과 각운이 살아 있으며,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기억하자’는 의미인 ‘이 멤버~ 리멤버~’ 역시 각운을 살려서 선창과 후창이 쉽답니다.

마지막으로 건배사는 ‘스토리’를 남겨야 합니다. 물론 이 부분이 가장 어렵습니다. 자신에 대한 독특한 기억을 주고자 하는 거죠. 일종의 ‘퍼스널 스토리텔링(Personal Storytelling) 전략’입니다. 자신만의 키워드를 활용하고, 자신만의 짧은 스토리를 얘기하고 이를 건배사와 연결하는 겁니다.

만약 라면회사에 근무한다면 ‘가장 맛있는 라면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당신과 함께 라면입니다’를 활용할 수도 있고요, 조직의 관리자라면 ‘주.전.자.’도 좋습니다. 주.전.자.는 ‘주인의식을 갖고, 전문성을 갖추고, 자신 있게 살자’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경우 반드시 서두에 짤막한 스토리를 덧붙이는 걸 잊지 마세요.

한 달 뒤면 을미년(乙未年)이 지고, 병신년(丙申年)이 옵니다. 재작년 연말 때는 ‘새해가 밝아 양이 오고 말이 간다’는 ‘새.양.말.’이 건배사로 유행한 것처럼 병신년을 넣은 건배사는 어떨까요?

예를 들어 중년들이 모이는 동창회에서는 “내년 병신년을 맞이하여 건강하게 살자는 기원으로 (병) 병들지 말고, (신) 신나게 사는 (년) 한 해가 되자!” 라고 하고, 또 직장에서 송년회를 할 때는 ‘힘들고 어려운 병신년을 맞이하여 꿋꿋이 일하자는 의미로 시조 한 수 올립니다. (병) 병이면 어떠하고 갑이면 어떠하리, (신) 신께서 주신 이 자리 (회사 이름, 팀 이름) (년) 연연하지 않고 태평성대 (최강홍보팀, 매출달성) 이룩하리~’라고 한다면 예쁨 받는 훈훈한 송연회가 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