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세의 벤은 정부의 시니어 인턴십 프로그램을 통해 30세 여성 CEO 줄스의 온라인 쇼핑몰에 취업한다. 예민한 성미의 워킹맘인 줄스는 벤이 제 역할을 할 거란 기대는 커녕 그의 존재가 그저 불편하기만 하다. 하지만 40년 경력의 직장 생활 베테랑인 벤은 곧 특유의 친화력과 연륜으로 직장 내 인기를 독차지하고 그런 벤에게 차츰 마음을 여는 줄스. 일과 가정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그녀의 삶 전체에 균열이 오는 사건들이 벌어지면서 벤은 그녀의 부하직원인 동시에 조력자, 아니 ‘베스트 프렌드’가 돼 손수건을 건넨다.

낸시 마이어스의 영화 <인턴>은 나이 듦의 미덕에 대해 말하고 있다. “뮤지션에게는 은퇴가 없대요. 음악이 사라지면 멈출 뿐이죠. 제 안엔 아직 음악이 남아있어요”라고 말하는 노년은 결코 지루하고 추레한 것도 공포스러운 것도 아니었다. 영화관을 나오면서 ‘참 아름답긴 하지만 지금은 멸종해 버린 신사의 손수건이나 도시 전설, 어른들을 위한 동화 같은 것일 뿐’이라고 마른 침을 삼키고 이내 잊어버렸다.

‘이상한 박사’와의 면접 “인턴 필요하세요?”

얼마 전 SNS에서 이런 영화 같은 일이 한국에도 있다는 뜻밖의 게시물이 올라왔다. 이메이션코리아 전 대표이자 한국 마케팅업계 대부 격인 이장우 박사가 한 IT 스타트업에 인턴으로 취업했다는 소식이었다. 조인혁 '푸룻랩(FruitLab)' 대표와 이장우 박사를 만난 것은 인맥관리 서비스 ‘그레이프(Grape)’ 베타오픈 론칭 파티에서였다. 이태원의 수제버거 집에서 열린 파티에서 유쾌하게 웃고 떠드는 젊은이들 사이 유독 눈에 띄는 한 사람, 이장우 박사가 맞았다.

일주일 뒤 삼청동의 카페에서 둘을 다시 만났다. 조인혁 프룻랩 대표는 오랫동안 구성해 온 아이디어를 구현해 세상에 내놓기 위해 지난해 창업에 뛰어든 30대 청년이다. 조 대표는 독일계 회사에서 컨설팅과 해외 영업 업무를 담당했다. 개발자들을 찾으러 두 발 벗고 뛰었고 지인을 동원해 로고를 만들고 실리콘밸리까지 한달음에 달려갔다. 그러는 사이 서비스는 조금씩 원하던 모습을 찾는 듯했다.

“서비스 오픈 전에 페이스북에 페이지를 개설했어요. 그런데 ‘인턴 필요하세요?’라는 댓글이 달린 거예요. 그래서 ‘네 필요하죠’라고 했더니 ‘저 어떠세요?’ 하는 거예요.” 조 대표는 그렇게 이장우 박사를 처음 만났다. “저는 사실 영화 <인턴>을 못 봤어요. ‘다음 주쯤 어디서 보자’ 이렇게 약속을 하고 약속 장소에 가서 앉아는 있었지만 사실 제 수첩에는 ‘이상한 이장우 박사 인터뷰’라고 써놨으니까요.”

약속 시간을 15분쯤 남기고 이 박사가 약속 장소로 들어오는 걸 봤다. 화장실로 뛰어 들어간 박사는 금새 조 대표 앞에 섰다. 면접을 위해 머리부터 얼굴, 옷차림 모두 완벽하게 손질한 모습이었다. 조 대표는 "전 스타트업을 하면 옷을 못입어도 돼서 좋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는데 언제나 멋진 모습의 박사님을 보고 '옷차림이 주는 프로페셔널한 이미지라는 힘이 있구나' 하고 배워요"하고 말했다.

이 박사도 조 대표를 만난 것이 ‘운명’이라고 했다. 3주 전, 지방 강연을 위해 집을 나섰는데 기차를 놓쳤단다. 다음 열차를 기다리면서 페이스북을 열었다가 우연히 ‘그레이프’ 페이지를 보게 됐다. 인턴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한국 3M에는 세일즈맨으로 입사해서 12년 만에 3M에서 분사한 이메이션코리아에서 한국인 대표가 됐어요.” 그러는 동안 그는 경영학, 예술학, 디자인학 등 박사 학위만 3개를 취득했다. 조 대표는 “처음엔 그렇게 대단한 분인지는 몰랐어요”라고 웃는다. “그래서 인턴이 아니라 고문으로 모시겠다고 했는데 박사님은 한사코 고사하시는 거예요.”

이 박사의 생각은 달랐다. “저도 원래는 그냥 한국 기성세대죠. 처음 미국 본사에 갔을 때 미국의 수평적 직장 문화를 경험하고는 ‘아, 조직은 이렇게 열려 있어야 한다’하고 깨달았어요. 은퇴한 이후에 여러 브랜드들의 자문과 강연, 집필 같은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결국 사회적으로 공헌할 수 있는 일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요. 재능은 있지만 마케팅에는 약한 스타트업들에 내 경험과 노하우를 전하고 싶다는 것이 결론이었죠.”

“네트워크 파티? 마케팅의 원칙은 같으니까!”

이들이 이르면 올해 말 정식으로 론칭하는 ‘그레이프’는 인간관계에 관한 애플리케이션(앱)이다. 명함을 주고받고 상대방의 단편적 정보를 휴대폰 등에 저장해 뒀는데도 다시 그를 만났을 때 ‘어디서 만난 누구였는지’ 알 수 없어 당황했던 기억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이 앱은 이름이 아니라 다양한 자연어와 연관 검색어로도 연락처를 검색할 수 있게 하고, 앱을 실행하는 것만으로도 같은 장소와 시간을 공유하는 사람들을 자동으로 저장해 줘 과거의 만남을 추적해 준다.

조 대표는 “온라인 인간관계가 실제 인맥이 되려면 반드시 오프라인으로 대면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레이프는 그것을 도와주는 앱입니다”라고 말했다. SNS 속 인맥에 집착하던 만남의 패턴을 실제의 만남을 통해 비즈니스 파트너, 친구 등 인연을 맺는 것으로 옮겨오는 모바일 기반 앱이라는 설명이다.

“그레이프는 만남의 앱이에요. 이전까지의 명함 앱이 통계(Statistics)라면 그레이프는 흐름(Flow)이죠.” 조 대표만큼이나 확신에 찬 목소리로 서비스를 설명하는 이는 회사의 신입 인턴 이장우 박사였다. 그는 “미국에 애플(사과)이 있다면 한국엔 그레이프(포도)가 있다”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누구보다 빠르게 회사가 만든 서비스의 성격과 강점을 파악하고 회사의 미션을 공유했다.

다른 분야라고 할지라도 통하는 현장에서 익힌 ‘마케팅의 원칙’은 비슷했다. 창업 후 처음으로 서비스를 소개하고 베타서비스 오픈을 축하하는 자리를 기획했을 때였다. 이 박사는 일요일 오후라는 시간을 고려해 더 많은 인원을 초대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100명 정도가 기대 정원이라면 20~30명은 더 초대해야 한다는 말씀이셨죠. 실제로도 그랬습니다. 정말 예상한 만큼의 손님들이 와서 성황으로 진행됐거든요.” 인턴 이 박사는 작은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네트워크 파티에서 손님들에게 줄 메시지를 만들었는데 그건 도장을 파서 종이에 찍어내기로 했거든요. 파티를 준비하느라 바쁜 와중에 돌아보니 박사님이 말도 없이 먼저 나서서 도장을 찍고 계신 거예요.”

이장우 박사는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속도도 젊은이보다 빨랐다. 언제가 조 대표가 지나는 말로 동영상 기반 SNS ‘페리스코프’에 대해 말했는데 이 박사는 하루 만에 익혀 활발하게 사용하고 있었단다. 이 박사는 “마케팅은 젊은이들이 잘한다는 인식 때문에 사실 같이 일하는 친구들은 대부분 30대 초중반이에요. 의사소통도 전혀 문제없어요. 워크숍도 같이 가고 조언도 많이 구하고 친하게 지내요.”

조 대표는 “저는 원래 이상한 사람들이 좋아요. 이상하다는 건 남들과 다르다는 것이고 '이상하다'는 남들의 말에도 변하지 않으려면 진짜 자존감이 높아야 하거든요”라고 하면서 “저는 이상한 사람들이 많은 회사로 만들고 싶어요”하고 여유 있게 웃어 보였다.

이 박사는 “영화 <인턴>에 그런 대사가 나오잖아요. ‘음악이 있는 한 뮤지션에게 은퇴란 없다’고요.” 인터뷰가 끝나면 삼청동의 곱게 물든 나뭇잎들을 동영상 방송으로 찍어  팔로워들에게 보여줄 거라는 그는 자신이 맞은 세 번째 ‘스물’, 사회초년생의 설렘, 나이 듦이 가르쳐 준 지혜를 한껏 즐기고 있다. 아직 그에게 연주할 음악이 한참이나 남아 있으니까.

 

[정정합니다] 지난 12월 2일 발행한 이코노믹리뷰 제 790호 지면 기사 중 [사람이 답이다- 60대 ‘열혈’ 인턴 이장우 3M 전 대표와 30대 CEO 조인혁 단독 인터뷰] 내용에서 ‘이장우  3M 전 대표’를 ‘이장우 이메이션코리아 전 대표’로 고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