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만남

목소리만 들어도, 뒷모습만 봐도 설렌다. 혹시 사랑일까. 들뜬 마음을 진정하기가 쉽지 않다. 연락이 올까 휴대폰을 붙잡고 메신저를 껐다 켰다 한다. 반하는 데 이유는 따로 없다. 굳이 묻는다면 당신은 그냥 ‘좋아서’라고 둘러댄다. “내가 A를 좋아하는 이유는 첫째….” 오히려 이런 식으로 구체적으로 이유를 대면 첫 느낌의 진정성까지 의심을 받게 될지 모른다.

물론 이유가 뚜렷한 경우도 있다. 관심사가 서로 비슷하다면 아무래도 쉽게 가까워지게 된다. 둘 다 게임에 관심이 있다면 어떨까. 게임 취향까지 같다면? PC방에 가서 서로에게 총을 쏘고 칼을 휘두르며 사랑을 싹 틔우지 않을까. 자연스럽게 연인 관계로 발전할 수도 있다.

넥슨과 엔씨소프트도 처음은 이랬다. 국내 게임시장의 두 기둥은 관심사로 이어진 사이다. 2012년 6월 두 게임사가 손을 잡자 모두가 주목했다. 넥슨이 김택진 대표로부터 엔씨소프트 지분 14.68%를 사들였다. 글로벌 게임사 일렉트로닉아츠(EA) 경영권 인수가 그들의 관심사였다.

야심찬 계획이었다. EA는 누구나 알 만큼 유명한 게임사다. 그렇다면 왜 넥슨은 지분을 사들였는가. 서울대 공대 선후배 관계인 김택진 대표와 김정주 넥슨 대표는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머리를 쓴 것이다. 김택진 대표가 지분 매각으로 챙긴 8045억원의 현금 실탄을 EA 인수에 활용한다는 계획이었다.

권태기

권태기는 사귄 지 얼마나 뒤에 찾아올까. 속설이 난무하지만 정확한 건 없다. 분명한 건 많은 커플이 권태기를 경험하며, 그걸 이유로 헤어진다는 사실이다. 권태기라는 말로 뭉개지지만 이유야 복잡 미묘하다. 관심사로 이어진 커플 몇몇은 연애 초기에 서로를 만난 걸 쉽게 후회하곤 한다. ‘우린 천생연분’이라며 난리를 치다가도 성격 차이의 덫에 걸려버린다. 관심사에 가려진 속살에 실망하는 것이다.

EA 인수는 실패로 돌아갔다. 둘을 이어준 관심사가 비눗방울처럼 터져버린 것이다. 그 다음에는 성격 차이가 보였다. 여기서부터 이해관계가 갈린다. 엔씨소프트는 넥슨이 경영에 간섭하지 않기를 바랐다. 넥슨은 엔씨소프트와 적극적인 협력으로 시너지를 내고 싶어 했다.

서로 주장을 철회하지 않았다. 양보는 없었다. 갈등의 골은 깊어졌다. 지난 1월 넥슨이 엔씨소프트 지분 보유 목적을 단순 투자에서 경영 참가로 변경한다고 공시했다. 결국 경영권 분쟁으로 이어졌다. 일부에서는 업계 형님들답지 못하다고 눈살을 찌푸리기도 했다. “국내 게임 사업이 위기인데!”라며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도 있었다.

바람

관계가 뒤틀린다. 이만 끝내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런데 상대가 집착하면서 쉽게 놓아주지 않을 수 있다. 이대로 끝내는 건 아닌 것 같다고, 조금만 더 잘해보자고 하면서 말이다. 어쩔 수 없이 관계는 이어진다. 유통기한은 이미 끝났지만.

집착은 상대의 극단적인 행동을 유발하기도 한다. 심지어 ‘네게 상처를 주고 말겠다’는 자세로 대놓고 다른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이봐, 우린 끝이라고!’라는 메시지를 전하려는 건데, 갈 때까지 간 거다. 집착이 고심으로 변하는 시점이다. 속앓이는 깊어진다. 헤어지자니 두렵고, 용서하자니 나만 바보 되는 것 같고. 관계의 끝이 보이는 듯하다.

엔씨소프트는 갑자기 넷마블게임즈를 끌어들였다. 넥슨을 상대로 경영권을 지켜내기 위해서다. 지난 2월 엔씨소프트는 넷마블에 자사주 195만주(8.93%)를 넘겼다. 넷마블 신주 2만9214주(9.8%)를 받으면서 말이다. ‘포괄적 협력’이라는 모호한 이유로 넷마블과 손을 잡으면서 자연스럽게 넥슨과는 거리를 두는 전략이다.

이별

이별이 가까워졌다. 초심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해보자고 애원해보든지, 서둘러 우리 끝내자며 차는 시늉이라도 하면서 자존심 세울지 선택해야 한다. 같은 미래를 보고 함께 갈 수 없다면, 갈라서야지만 서로에게 도움이 된다면 과감하게 이별을 결정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넥슨은 자존심을 택했다. 엔씨소프트 지분을 말끔히 정리하기로 했다. 더 이상 실익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엔씨소프트가 넥슨의 경영 참여를 완강하게 거부했고, 넷마블과 협력하면서 경영권은 안정적으로 가져갔기 때문이다. 협력 의사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상황인데 굳이 지분 관계를 지속할 이유가 있을까.

일상으로

“나 헤어졌어.” 이 한 마디엔 남들의 이말 저말이 주렁주렁 덧붙는다. 주로 헤어진 연인을 같이 욕해주는 식이다. 차라리 잘 됐다는 반응이 많다. 이제 네 갈 길 가라고, 더 좋은 남자나 여자를 만나라고들 한다. 고개 끄덕이며 위로받는 당신이다.

넥슨과 엔씨소프트는 성격이 달랐다. 넥슨이 서비스에 중점을 둔다면 엔씨소프트는 개발에 중심을 둔다는 식으로 업계 관계자들은 차이를 설명했다. 이제는 두 업체가 갈 길을 가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도 게임시장이라는 전장에서 경쟁자로 만나게 될 운명이다.

 

두 업체는 국내 게임 업체의 양대 산맥이다. 매출 규모로 따지면 넥슨이 1위고 엔씨소프트가 2위다. 넥슨은 지난해 1조6391억원의 매출, 4314억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했다. 엔씨소프트의 지난해 매출이 8387억원이니 제법 차이가 난다. 두 업체 모두 비슷한 고민거리가 있다. 온라인 게임이 호황기이던 시절 폭풍 성장을 했는데 시대가 변했다. 이제는 모바일이 대세라고들 한다. 두 업체는 플랫폼 변화에 더디게 대응했다. 최근에서야 모바일 게임 사업 해법을 적극 모색하고 있는 둘이다. 물론 방법은 각기 다르다.

차라리 잘 됐다. 서로 더 잘나가려고 경쟁하다 보면 각자가 역량을 키우게 될 수 있다. 라이벌이 둘 다 유명해지는 경우는 역사에 참 많았다. 둘의 경쟁은 게임업계 발전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한국 게임 산업의 미래가 그들에게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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