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한국을 방문한 한 해외 핀테크 업계 전문가는 “지금 은행 다니는 사람들 모두 사표를 쓰라”고 했다. 미래 금융 산업의 패러다임이 ‘손바닥 위 금융’ 핀테크(Fintech)를 중심으로 완전히 변화할 것임을 강도 높게 전한 것이다. 미국에서 1951년 신용카드가 처음 등장했을 때도 안정적인 소득을 자랑하는 은행원들에게 사표를 쓰라고 하지는 않았다.

핀테크는 모바일 결제 및 송금, 클라우드 펀딩 등 정보기술(IT)을 기반한 새로운 형태의 금융기술이다. 현재 명실상부한 핀테크의 세계 수도는 영국 런던이다. 런던의 핀테크 기업은 현재 1만7000여 개로 영국 핀테크 기업의 시장 가치는 1조달러(약 1100조원)로 추산된다. 최근 아시아에서 부는 핀테크 바람도 심상치 않다. 전문가들은 지난 3~5년간 미국과 유럽에서 일어났던 핀테크로의 변화가 아시아에서 단기간에 걸쳐 더 큰 규모로 생겨날 것이라 보고 있다.

 

싱가포르는 아시아의 금융 허브로 과거 금융 서비스 경험을 핀테크 분야에 적용하고 있다. 지난 5월 러시아의 핀테크 전문 벤처캐피털인 ‘라이프 닷 스레다’는 아시아 시장 투자 확대를 위해 본사를 싱가포르로 이전하는 파격적인 조치를 단행했다. 글로벌 핀테크 업계가 싱가포르를 주목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스타트업 육성을 위한 싱가포르 정부 차원의 보조금, 세금 공제, 인센티브 등 다양한 혜택이 있고 DBS, OCBC 등 범아시아적 싱가포르 은행과의 제휴로 아시아 시장 진출을 위한 자원 투입에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

일본은 핀테크 보급을 위해 17년 만에 금융 규제를 완화하려고 한다. 일본 일간지 <닛케이>에 따르면 일본 핀테크 시장의 규모는 약 50억엔으로 1.5조엔에 달하는 세계 시장 규모에 비하면 아직은 저조하다. 하지만 지난 9월 일본 금융청은 핀테크 관련 법 규제 정비를 논의하기 위해 금융심의회를 열었다.

전통적 금융 강국들과는 달리 신흥 강대국 중국은 알리바바 등 IT 기업들의 비관련 다각화 일환으로 핀테크가 사용되고 있다. 싱가포르 투자지주사 마블스톤의 조승현 회장은 “은행 계좌도 없던 시절부터 온라인 결제를 위해 사람들에게 알리페이를 쓰게 하고 개인과 개인 간(P2P) 대출 플랫폼의 시토격인 미국 렌딩클럽보다 훨씬 큰 규모의 루팩스(Lufax)를 만들어낸 중국을 보면 아시아에서 핀테크가 어떻게 커가야 할지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영국 핀테크 육성업체인 ‘앤틱’은 최근 서울에 아시아의 ‘핀테크 허브’를 설립하고 1500억원 규모의 자금을 펀드로 조성해 유망한 국내 핀테크 스타트업에 집중 투자하기로 했다. 앤틱은 국내 언론과 만난 자리에서 한국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IT망과 정부 의지 등 인프라가 가장 좋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중국은 정부로 인한 불확실성이 있고 일본은 핀테크에 대한 관심이 크지 않은 것 같다는 설명이다.

마블스톤도 올해 크라우드펀딩, 자산운용 등 7개 섹터로 구성된 아시아 핀테크 통합 플랫폼 ‘펀드이스트(FundEast)’를 아시아 4개국에서 공식 출범했다. 그는 결제 등의 초기 단계 핀테크 카테고리에서 스퀘어 등 업계 선도 기업들이 나온 미국이나 유럽에서 경쟁하기보다는 통합된 플랫폼이나 선도 기업이 전무한 아시아에서의 시작이 더 유리할 수 있고, 또 잠재 시장 자체도도 아시아가 훨씬 크다고 본다. 마블스톤은 1단계로 아시아 각국에서 10~15개 기업들을 합병해 펀드이스트를 싱가포르에서 출범한다. 한국에서는 보험 관련 업체와 GA를 인수할 예정이다. 1단계로 모인 그룹을 싱가포르나 홍콩에 상장하며 바로 자금을 추가 조달해 2단계로 아시아 각국의 증권사와 보험사 등을 인수할 예정에 있다.

▲ 세계 모바일 결제 시장 규모. 출처=가이트너

한국 핀테크 기업이 해외 시장에 진출하는 것 못지않게 한국 시장의 다면적 변화가 요구된다. 천영준 연세대학교 기술경영연구센터 책임연구원은 결국 한국이 지향해야 하는 모델은 높은 기술 수준과 시장 개방도 그리고 금융 서비스의 질을 갖춘 싱가포르 모델이라고 본다. 천 연구원은 우리나라 핀테크 산업의 저변이 확대되기 어려운 이유로 한국 금융 산업 관련 제도의 보수성이 자주 지목되지만 가장 큰 원인은 시장 구조의 한계와 소비자들의 니즈 부족으로 보고 있다. 그는 “우선 금융 산업의 경우에는 2000년대 이후부터 ‘독점적 경쟁’ 구도로서 큰 혁신 없이도 비즈니스가 가능한 상황이고 거대 은행들은 위기 때마다 공적 자금을 받아 일종의 ‘안전망’이 구축되어 있기 때문에 금융사 최고경영진이 얼마나 중요하게 느끼고 있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지가 미지수”라고 했다.

그는 또 핀테크에서 일반 소비자에게 가장 피부에 와 닿는 서비스 기능은 ‘결제’인데, 모바일 결제가 신용카드를 대체할 만큼 안정적이고 간편하냐의 이슈가 해결되지 않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빈번한 정보유출 사고 및 해킹 사고가 이어지면서 안전성 문제가 눈앞의 현안으로 떠오른 것이다.

조승현 마블스톤 회장은 한국은 오히려 선진국보다도 금융기술 인프라가 발달되어 있고 수출 중심의 경제 기반이나 기업들 자체의 글로벌화가 상당히 더디다는 점을 한국 핀테크의 걸림돌로 꼽았다. 그는 불완전하거나 타이트한 규제나 환경을 탓하기보다는 현재 제도권 안에서 글로벌 흐름을 이해하는 비지니스 모델 개발을 당부했다. 대신 정부의 과감한 의사결정과 국민들의 높은 IT 기술 수용 수준은 한국 핀테크의 미래를 기대하게 한다. 천 연구원은 “예컨대 ‘온라인 보험 슈퍼마켓’ 정책이나 ‘인터넷 전문 은행’ 관련 정책은 업계에서는 정말 필요한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기관들도 많지만 정부가 직접 나선 정책 프로그램”이라면 “이런 점에서는 ‘관치금융’이라 하더라도 나름대로 효율적인 면이 있다”고 한다.

핀테크라는 새로운 파이를 놓고도 실랑이가 벌어졌다. IT기업들은 알리페이나 애플페이를 거론하며 금융 사업에 군침을 흘리고 있다. 정부는 인터넷 은행을 육성하겠다면서도 금산분리법과 금융실명제를 여전히 양 손에 쥐고 있다. 천 연구원은 궁극적으로는 금융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답한다. 금융은 고객에 대한 객관적 평가와 신용 공여를 통한 자금 중개 역할이기 때문에 타 산업 종사자가 쉽게 진출하기 어렵다는 것이 이유다.

<모바일트렌드 2016>의 저자 현경민은 "핀테크의 역할이 IT 기술을 기반으로 기존 금융의 문제를 해결하거나 새로운 금융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그는 "물론 IT가 리드하는 방식이라고 해도 금융사를 배제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마치 카카오톡, 유튜브, 네이버 등이 통신망을 배제할 수 없듯이 IT 기업들이 금융망을 이용해서 얼마나 새로운 서비스를 만들어내느냐의 문제라는 설명이다.

실상 핀테크는 스타트업 등 IT 기업과 은행 간의 결속력이 부족하면 끝내 성공하기 어려운 사업이다. 유럽 최대의 스타트업 육성업체 ‘스타트업부트캠프’의 공동 창업자 마커스 그너크는 한국의 스타트업들은 그들의 약점을 더 잘 이해하는 은행권의 전문가와 멘토들에게 다양한 지식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은행도 현재의 창구 금융 수준에 머무른다면 IT 사업자들의 위협 등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천영준 책임연구원은 현재 금융 산업은 고객들의 ‘관성’에 기반해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