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은 글로벌 무대를 좌우하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기업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양극단의 시선이 상존한다. 눈부신 기술력을 바탕으로 끈질기게 글로벌 무대를 두드렸던 대한민국의 자랑이지만, 한편에서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절대강자의 잔인성을 발견하기도 한다. 미국과 유럽의 심장부에 아로새겨진 삼성 로고를 바라보며 느끼는 벅찬 감동과, 소위 삼성 공화국이라는 말로 대표되는 절대권력의 비정함을 동시에 느끼는 셈이다.

이 지점에서 삼성 사장단이 사회민주주의자를 초청해 복지국가와 경제민주화에 대해 공부하고 나서 눈길을 끈다. 30일 삼성전자 서초사옥에서 열린 수요사장단협의회에 진보 경제학자로 분류되는 정승일 사회민주주의센터 대표가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정 대표는 장하준 캠브리지대학교 교수와 함께 대표적인 진보 경제학자로 여겨진다. 함께 '쾌도난마 한국경제' 등의 책을 내며 사회 공동체의 재벌 지배구조 개입의 당위성을 강력하게 주장한 인물이기도 하다. 베를린자유대학교 정치경제학 박사를 받은 뒤 대안연대회의, 금융경제연구소, 과학기술정책연구원 등에서 활동한 바 있다.

정 대표는 수요사장단협의회에서 신자유주의의 맹점을 집중적으로 지적했다. 또 사회적 안전망 확보 및 양극화 해소를 위한 기업의 역할을 주문했으며 경제민주화 주요 과제의 현황과 추진방향을 제시함과 동시에 적극적인 삼성 역할론을 강조해 눈길을 끌었다.

적나라한 상황비평도 이어졌다. 정 대표는 "현재 경제학자들이 내놓는 담론이나 기업들의 행태는, 몸은 어른인데 사고는 어린아이 같다"며 "세계 8위의 경제 강대국 위상을 지켜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어 그는 "대기업들이 저마다 사회공헌을 위한 재단을 설립해 장학생들을 양성한다고 하지만 단순히 회사에서 부릴 일꾼을 양성하는 수준"이라며 "한국의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는 문화와 예술, 인문학 등의 분야도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지점에서 그는 삼성을 이탈리아의 메디치 가문과 비유하며, "삼성이 한국의 메디치가 되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메디치 가문은 이탈리아의 중부지방 피렌체 공화국의 평범한 중산층 가문이었으나 이후 은행업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하면서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했고, 중세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명문가로 발전한 바 있다. 특히 예술과 문화의 수호자로 명성을 쌓으며 인문학의 후원자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마지막으로 그는 "창조경제는 결국 10여년전 나온 탈추격(Post Catch-Up) 시대의 개념"이라며 "기초과학을 양성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삼성이 법인세 및 연구개발에도 공격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재계에서는 삼성이 진보 경제학자로 분류되는 정 대표를 초빙해 경제민주화 및 기업의 사회적 역할론에 대한 담론을 나눈 것 자체가 의미심장하다는 평가다. 일단 성장할 수 있다면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한편, 최근 수면 위로 부상하고 있는 경제민주화 패러다임도 선점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시간적으로 이재용 체제가 완전히 자리잡지 않은 상태에서 재벌개혁을 주장하는 학자를 초빙한 것 자체가 파격이라는 말도 나온다.

다만 정 대표는 투기자본의 횡포를 극도로 경계하며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을 반대했을 당시 삼성 편에 서서 합병에 찬성했던 전례가 있다. 게다가 기업의 역할론을 주장하면서도 재벌운용에 적절한 운신의 폭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펼쳤다는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성의 30일 정 대표 초빙은 그 자체로 의미있다는 평가에 중론이 쏠린다. 고정관념을 부수고 새로운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겠다는 의지를 보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근 삼성은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와 김상조 한성대 교수 등 다수의 진보인사를 초빙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이번 정 대표 초빙도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다양한 가능성'을 찾기 위한 삼성의 노력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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