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을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이정록 <의자>

인간을 ‘생각하는 동물’이라고 한다. 동물과 구별하는 탁월한 능력의 하나인 인간의 사고능력은 어디서 출발하는 것일까. 느낌이다. 느낌이 없으면 생각도 존재하지 않는다.

느낌을 다른 말로 하면 감성이다. 오감을 통해 자극되는 각종 대상을 느끼고 자기화하는 성질이다. 여기서 자기화란 객관적인 것을 주관화하는 힘이다.

사실 객관이라는 말에는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어떤 대상에서 바라볼 때 누구나 똑같은 느낌을 받고 그에 대한 이해를 공유한다는 말이기에 그렇다. 누구나 같은 느낌과 이해를 갖고 있기에 보편타당한 것 같지만 이런 객관만을 중시하고 강조하다 보면 창조력이 사라진다.

인터넷 포털사이트에는 닭의 벼슬이 빨간 이유를 묻는 질문에 ‘수없이 많은 모세혈관으로 이뤄져 있기 때문’이라는 답변이 있다. 과학적인 설명이다. 과학적 설명은 객관에 몰입을 가져온다. 주관적인 생각이 들어갈 틈이 생기지 않는다. 그만큼 상상력이 저하된다.

그러다 보니 어떤 응답자는 ‘그런 질문을 하다니 바보 아닌가’라고 되묻기도 한다. 객관에 몰입돼 주관적 상상의 날개를 전혀 펼치지 않은 결과다.

필자가 어릴 때 돌아가신 할머니가 들려주신 닭의 벼슬이 빨간 이유다. 수많은 암탉이 모인 자리에서 수탉 두 마리가 싸움이 붙었다. 두 마리의 수탉은 암탉들에게 자신이 더 훌륭함을 자랑하기 위해 먹기 시합을 했다. 닭은 잡식성이기 때문에 두 마리의 닭은 아무거나 마구 먹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한 닭이 커다란 돌을 삼켰다.

이를 본 다른 닭은 깜짝 놀랐다. 상대 닭이 먹은 돌은 닭의 눈으로 보기에는 바위와 같았다. 자신은 작은 돌은 먹어봤지만 그처럼 큰 돌은 먹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돌을 먹은 닭은 그만 돌이 목에 걸리면서 숨을 못 쉬게 됐다. 얼굴이 빨개지면서 머리까지 빨개졌다. 가까스로 돌을 넘기기는 했지만 그때의 빨개진 머리 벼슬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할머니가 즉석에서 꾸며낸 얘기이든, 민담으로 전해 내려오는 얘기이든 상관없다. 이 이야기 속에는 세상 살아가는 삶의 태도와 닭을 사람처럼 인식하고 거기에 인간의 생각을 삽입한 문학적 상상력이 담겨 있다. 그러니 대상을 바라보는 감성이 다르고, 이야기를 꾸미는 상상력이 동원된다.

인간의 생각에는 두 갈래 길이 있다. 하나는 이성적 판단에 따른 생각이고, 다른 하나는 상상이다. 사물을 정확히 판단하는 이성은 나아가 어떤 체계적인 결과를 얻게 된다. 과학이다. 과학은 우리에게 객관화된 지식을 알려주지만 생각하는 법을 가르쳐주지는 않는다.

반면 상상은 대상을 바라보고 새로운 이야기를 꾸민다. 이야기를 꾸미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각도의 관찰 즉 감성을 일으켜야 한다. 그래야만 다른 차원의 이야기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들려준 ‘닭의 벼슬이 빨간 이유’처럼 말이다. 이것이 바로 문학적 감성이다. 이 감성이 상상력을 키우고 상상력은 세상을 진화시키는 창조의 힘으로 발전한다.

이정록 시인의 시 <의자>도 감성에서 비롯된 문학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시다. 시인은 자신의 어머니의 말을 빌려 감성이 무엇이지 알려준다. 어머니가 ‘꽃도 열매도, 그게 다/의자에 앉아 있는 것’,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라는 표현은 감성에서 기인한 관찰이다.

학교 교육을 제대로 받지도 못한 우리네 어머니들은 이처럼 감성이 살아 있었다. 이 감성이 시인으로 하여금 시라는 창조적 언어를 만들어내게 했다. 감성은 이처럼 우리에게 삶의 지혜와 무한한 상상력을 주는 창조의 샘물이 된다.

황인원 시인·문학경영연구원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