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스(TOMS)’라는 이름의 신발이 전세계적으로 크게 유행을 했다. 사실 탐스는 그 신발을 만들어낸 미국의 제조업체 이름이었는데, 특유의 개성적인 모양의 신발이 전세계 젊은이들 사이의 폭발적 인기를 끌어 나중에는 보통명사처럼 쓰일 정도가 됐다.

신발은 얄팍한 고무 밑창에 패브릭으로 발등을 완전히 감싼 모양이 수수하면서도 다양한 패턴과 컬러에서 오는 이국적인 멋이 있었다. 게다가 1켤레를 사면 1켤레를 제3국에 기부한다는 '착한' 콘셉트까지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탐스의 이 유명한 ‘원포원(1 for 1)’ 판매 방식은 탐스의 설립부터 지켜온 탐스의 가치이며 전략인 동시에 오랜 약속이 됐다. 

스칼렛 요한슨, 사라 제시카 파커, 키이라 나이틀리 등 할리우드 멋쟁이들이 앞다투어 탐스를 신고 언론에 등장해 탐스의 철학과 가치에 무언의 지지를 보냈다. 그러는 사이 탐스는 전 세계의 ‘감각’ 있는 멋쟁이들을 ‘개념’ 있는 지구인으로 만들어주는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지난 5월 내한한 탐스의 창립자 겸 신발 기부대장 블레이크 마이코스키(Blake Mycoskie)를 서울에서 만났고 이후 미국에 있는 그와 추가로 서면 인터뷰를 진행했다.

▲ 출처=TOMS

아르헨티나 여행 중 만난 맨발의 아이들

9년 전 아르헨티나를 여행 중이던 한 미국 청년의 눈에 해맑게 뛰노는 어린 아이들의 맨발이 들어왔다. 신발을 살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 아이들은 학교에 갈 수도 없고 질병에 쉽게 노출되었다. 그곳에서 중고 신발을 기증하는 자원봉사 활동 ‘슈드라이브(Shoe Drive)’에 참여할 기회를 얻은 마이코스키는 검은 맨발의 아이들에게 신발을 신겨주면서 한 명씩 모두 가슴에 안았다. 마음이 울렁였다.

신발이 아이들의 미래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에 대해 알게 됐지만 자선활동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신발을 기부하는 사람이 없어지면 아이들에게도 신발을 전달할 수가 없으니까. 기부에 의존하지 않고, 발이 자라서 또는 신발이 닳아서 새 신발이 필요할 때 지속적으로 아이들에게 신발을 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다 비즈니스 관점에서 접근해 보기로 했다.

그러다 생각해 낸 것이 신발을 한 켤레 팔 때마다 한 켤레를 기부하는 것이었다. 매우 간단하고도 합리적인 방법이라고 판단했다. “만약 신발 한 켤레의 구매를 통해 신발을 살 수 없는 가난한 아이에게도 신발 한 켤레를 줄 수 있다면 저는 매우 기쁠 것 같거든요.” 처음에는 한 학교 학생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을 정도를 마련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는 그렇게 단순하게 시작했던 아이디어가 오늘날의 탐스가 되었다고 했다.

탐스 신발의 대표적인 디자인은 '알파르가타'라는 아르헨티나 전통 신발에서 왔다. 마이코스키는 “아르헨티나에서 많은 사람이 신은 것도 보고 직접 신어보니 매우 편했다”면서 “탐스를 맨 처음 시작할 때는 신발에 대해 전혀 아는 게 없는 내가 직접 디자인했지만, 본격적인 탐스 비즈니스를 시작하면서 유명 신발 회사에 근무했던 신발 개발자 겸 디자이너를 영입해 디자인했다”고 말했다. 사업 초기에 아르헨티나 현지에서 신발 제조업자를 찾아 신발을 만들었고, 다행히 로스앤젤레스의 몇몇 매장에서 판매도 할 수 있었다.

당시 그가 아르헨티나에서 아이와 함께 있는 사진을 본 <LA 타임스>의 기자가 그의 아이디어에 관심을 가졌고 신문에 탐스 신발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그날만 웹사이트를 통해 2200켤레의 신발을 주문받았는데 아파트에 남은 재고가 150켤레밖에 없었다. 그는 “최초의 공급 문제를 겪었다”며 그날을 기억했다. “가족들과 친구들까지 동원해 고객들에게 배송이 늦어질 것을 안내했고 나는 곧장 아르헨티나로 날아가 공장 문을 열고 ‘무쵸스! 자파토스! 라피도!(많이, 신발, 빨리)’라고 외쳤죠.”

▲ 블레이크 마이코스키 탐스 창업자. 출처=이코노믹리뷰 노연주기자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악마 편집장이 나를?

한 달 후 그는 주문량의 신발을 가지고 LA로 돌아왔다. 2006년 7월이었는데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당시 개봉한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실제 주인공인 패션 전문지 <보그>의 편집장 안나 윈투어였다. 마이코스키 대표는 “나는 텍사스 사람이라 패션은 잘 모르지만 그가 부르면 반드시 가야 한다는 것은 알았다”고 웃었다. 그는 뉴욕에 갔고 기분 좋은 미팅을 가졌다. 세계 유력 패션지 <보그>에 탐스가 스타일리시하게 소개되자 가지고 있던 모든 재고가 일순간에 팔려나갔다. 노드스트롬 등 미국 대형 유통업체에서 연락이 왔고 그 여름에만 아파트에서 1만 켤레를 팔았다.

그래서 1만 켤레를 가지고 아르헨티나로 돌아갔다. “맨발의 아이들이 기뻐서 뛰어다녔죠. 그런데 한 여인이 나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면서 계속 울고 있어요. 내가 스페인어를 못 해서 내 친구 알레오에게 저분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묻고 '울지 마시라'고 전해달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알레오가 통역을 하던 중에 우는 거예요.”

알고 보니 그 여인에게는 세 아들이 있는데 집에 어른용 신발 한 켤레밖에 없어 한 아이가 학교에 가면 두 아이는 학교에 갈 수 없었단다. 그는 탐스 신발 덕분에 세 아들이 동시에 학교를 갈 수 있게 되었다면서 행복의 눈물을 흘린 것이라고 했다. 사실 그 전까지는 본격적으로 사업화할 생각이 없었지만 바로 그때 이 아이디어, 이 프로젝트야말로 인생 전부를 투자할 만한 값어치가 있다고, 열정을 모두 쏟아 부을 수 있다고 믿게 됐다. 그는 미국으로 돌아와서 소유한 다른 회사의 주식 33%를 모두 매각하고 탐스를 단지 프로젝트가 아닌 기업으로 만드는 데 집중했다.

 

신발, 안경, 커피, 가방도 모두 ‘1 for 1’

올해까지 그와 회사가 기부한 신발 수는 3500만 켤레가 넘는다. 현재는 신발뿐 아니라 아이웨어, 가방, 의류, 커피도 함께 운영하고 있다. 아이웨어 역시 안경이나 선글라스 한 개를 구매하면 다른 한 사람이 시력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돕는다. 교정용 안경, 의학적 처치, 안과 수술의 세 가지 방법으로 2014년 7월까지 탐스는 13개국 27만5000명의 사람들이 시력을 회복하는 데 도움을 줬다. 안경에 이어 2014년부터 커피 사업을 시작했는데, 이 역시 마찬가지로 고객이 커피백 한 개를 구매하면 한 사람이 일주일 동안 마시고 사용할 수 있는 물 140리터를 제공한다. 그는 “탐스 커피는 한국에서는 아직 만날 수 없지만 곧 한국 고객에게도 소개하기 위해 분주하게 준비 중”이라고 소개했다.

얼마 전 아버지가 된 마이코스키는 올해 봄부터 탐스 가방을 하나 구매할 때마다 안전한 출산을 돕기로 했단다. 그는 “비위생적인 환경에서의 출산은 감염의 위험이 높아 산모와 태아 모두 목숨을 잃는 경우가 많은데, 탐스가 현지의 기부 파트너들과 조산사들을 교육하고, 위생 출산 키트 (위생 패드, 탯줄 가위, 비누, 거즈 등)를 제공하며 안전한 출산을 지원하기로 했다”고 한다.

그는 어떻게 원포원 콘셉트를 신발 이상으로 확장하게 되었을까. 마이코스키는 “신발을 나누어주는 기부 여행을 다니다가 생존에 직결된 많은 문제를 발견하게 됐다”며 기부 여행에서 보고들은 것과 현지 사정에 밝은 100여개의 탐스의 기부 파트너와의 정기적인 보고, 피드백, 회의를 바탕으로 원포원 기부를 확장한다고 전했다. 그는 “현재 전 세계에서 도움과 지원이 필요한 상황을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지만, 가까운 미래에 추가적인 원포원 기부 아이템을 출시할 계획은 아직 없다”고 밝혔다.

▲ 출처=TOMS

마이코스키는 강연 등을 통해 한국 창업가들을 만났다. 그는 한국 젊은이들이 매우 열정적이고 에너지가 넘치며, 도전정신이 강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2011년에도 한국을 방문했다. 그때도 느꼈지만 한국인들은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받아들이는 것에 거부감이 없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러한 도전적인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성공의 비결을 공개했다. “대부분 우리는 인생에서 아이디어에 대해 토론은 하지만 그것을 실행에는 옮기지 못합니다. 그러나 저는 제 아이디어를 노트에 적고, 또 행동에 옮겼고 남들보다 조금 더 많은 에너지와 노력을 할애했기 때문에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회적 기업가인 그는 “요즘 소비자들은 기업에 점점 사회적인 책임을 요구하고, 사회적인 책임을 다하는 회사를 지지한다”며 “결국 비즈니스는 소비자의 성향과 요구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기업의 사회적 책임도 자연스러운 일이 될 것”이라고 인터뷰를 끝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