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오전 11시 삼성전자 서울 서초 사옥.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굳은 얼굴로 기자들앞에 섰다. 그동안 해외출장이나 공식행사에서 스치듯 모습을 드러냈던 그였지만 23일은 말 그대로 이 부회장이 중심이었다.

그는 무거운 목소리로 메르스 사태의 중심에 선 삼성서울병원의 실책을 인정하고 책임을 통감하는 한편, 향후 재발방지를 포함한 그룹차원의 후속조치를 약속했다. 대국민 사과를 끝으로 사라지는 이 부회장의 어깨 너머로 정신없이 플래시가 터졌다. 23일은 이 부회장의 생일이었다.

신속한 사과, 그리고 타이밍

이재용 부회장이 메르스 사태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그룹차원의 후속조치를 약속하는 대국민 사과를 했던 23일, 또 하나의 ‘사과’도 눈길을 끌었다. 바로 표절 논란에 휘말린 신경숙 작가다. 신 작가는 23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를 통해 자신을 향한 의혹을 일부 인정하는 분위기를 연출했다. 신 작가는 "문제가 된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 '우국'의 문장과 자신의 단편소설 '전설'의 문장을 여러 차례 대조해 본 결과, 표절이란 문제 제기를 하는 게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완전한 사과는 아니었다. 신 작가는 "아무리 지난 기억을 뒤져봐도 '우국'을 읽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이제는 나도 내 기억을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됐다"고 부연했기 때문이다. 즉 충분히 문제제기를 할 상황인 것을 인정하지만, ‘자신이 의도적으로 잘못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한 셈이다. 신 작가의 해명이 면피성에 그친다는 비난이 폭주하는 배경이다.

이 지점에서 이 부회장은 어떨까. 일단 사과의 타이망과 메시징은 준수했다는 평가다. 위기관리 전문가 정용민 스트래티지샐러드 대표는 이 부회장의 사과를 두고 자신의 SNS를 통해 “흠 잡을 곳이 없는 메시징”이라고 평가하는 한편, “사과와 함께 고개를 숙인 장면, 개인사를 활용한 공감의 유도, 기대와 신뢰에 미치지 못했다는 점을 분명히 하는 문제의 특정, 문제해결의 강력한 의지 천명, 명확한 해결책 제시, 의료진까지 아우르는 조심스러운 케어, 핵심의 전후 반복 모두 훌륭하다”고 평가했다.

특히 정 대표는 문제해결의 의지를 강하게 천명한 부분에 높은점수를 줬다. 최근 ‘아몰랑’ 논란에서 확인되지만 논란에 휘말려 코너에 몰리는 순간까지 주체와 객체를 혼동하고 소위 유체이탈형 사과를 반복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정치권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 신 작가의 경우에도 이러한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사과경영, 부끄러운일 아니다

2010년 2월 24일 도요타 아키오 당시 사장은 미국 워싱턴D.C 하원의원 청문회에 참석했다. 당시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에서 렉서스 ES 350이 급발진 사고를 일으켜 일가족 4명이 사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키오 사장은 8시간 동안 이어진 청문회 장소에서 끊임없이 머리를 숙이며 눈물을 흘렸다. 자신이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아내며 유족들에게 진심어린 사과를 했다.

청문회에 임함에 있어 글로벌 자동차 1위 기업인 도요타의 수장이 진솔하고 신중하게 질문에 답변하는 모습도 기어이 여론을 움직였다. 이후 도요타는 1000만대 이상을 리콜하는 사상초유의 극약처방을 통해 환골탈퇴를 거듭했고, 지난 5월 8일 도요타는 2조8000억엔의 영업이익을 예상하며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지난해 2조원에 달하는 적자를 낸 소니의 히라이 가즈오 CEO도 비슷한 상황을 연출했었다. 그는 56년간 이어지던 배당기록이 중지되고 모바일 분야 직원 100명이 회사를 떠나는 충격적인 몰락의 중심에서 전격적인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 자리에서 히라이 가즈오 CEO는 고개를 숙이며 자신들을 믿어준 주주들에게 진심어린 사과를 하는 한편, 새로운 성장동력을 반드시 찾겠다고 다짐했다. 이후 소니는 실적부진의 늪에서 벗어나기 위해 게임 및 가상현실 기기에 대한 공격적인 투자와 더불어, 이미지센서 등 다양한 가능성을 타진하며 나름의 성과를 거두고 있다.

물론 일본의 사과경영이 무조건 옳다는 것은 아니다. 이 또한 면피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과의 타이밍과 메시징을 정확하게 전달한다는 것은 곧 사태의 본질을 꿰뚫고 있으며 이해하고 있다는 증거다. 그리고 논란을 체화시켜 깨끗하게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또한 이날의 이재용 부회장의 사과는 사회의 아픔을 삼성이 함께하겠다는 약속이기도 하다. 이런 측면에서 이 부회장의 사과가 새롭게 조명받고 있는 셈이다.

여기서 재계 일각에서는 이 부회장의 23일 대국민 사과가 일종의 선언적 측면에서 상당한 의미를 가진다고 본다. 이 부회장은 삼성서울병원을 운영하는 삼성생명공익재단의 이사장이다. 그리고 삼성생명공익재단의 전 이사장은 이건희 회장이며, 재계에서는 삼성생명공익재단이 사실상 삼성의 비전과 영혼이라고 본다. 즉 고 이병철 창업주에서 시작된 삼성의 정신이 삼성생명공익재단을 통해 대물림되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 부회장이 재단의 이사장으로 취임하자 일각에서는 “삼성의 영혼을 뜻하는 재단의 이사장직에 이 부회장이 선임된 것은 결국 ‘삼성=이재용 공식’을 완성하겠다는 뜻”으로 풀이했다. 자연스럽게 이 부회장이 23일 그룹 전면에 나선 장면과, 그 원인이 자신에게 삼성의 영혼을 연결해준 삼성서울병원에 있다는 점은 묘한 지점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게다가 지금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을 두고 외국 행동주의 펀드인 엘리엇과 한 판 승부를 벌이는 상황이다. 삼성이 오너일가의 사유물은 아니라는 전제로, 이 부회장의 리더십이 필요한 위기의 순간, 그가 전면에 나섰다는 점도 흥미로운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