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첫 째주 토요일 오후, 알록달록한 버스 다섯 대가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미국의 ‘벨 헤이븐(Belle Haven)’에 잇달아 도착했다. 시골 마을에 입장한 버스가 울컥울컥 토해낸 사람들은 복색이 각양각색이었다. 하얀 수염이 멋진 노(老) 건축가도 있었고, ‘차도남’ 스타일의 디자이너들도 눈에 띄었다.

구소련의 붕괴를 예상한 미래학자 피터슈워츠가 가장 유망한 직종으로 꼽은 도시 설계가들도 이들 중에 섞여 있었다. 건축, 디자인, 도시전문가를 비롯한 분야별 전문가 수백여 명이 토요일 휴일을 기꺼이 포기한 채 소도시로 몰려 온 것은 이례적이었다.

이들을 블루칼라들의 거주지역인 미국의 ‘벨 헤이븐’으로 불러들인 주인공은 하버드대학 출신의 페이스북 창업자인 마크 주커버그였다. 주커버그는 소셜 네트워크 업계의 ‘빌 게이츠’다.

전 세계에서 페이스북의 시민권을 획득한 회원들만 무려 5억여 명. 그는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로 아프리카, 유라시아, 북미 대륙을 단숨에 제패한 현대판 칭기즈칸이다.

하지만 페이스북 제국을 창업한 이 앳된 얼굴의 소셜 네트워크 전문가가 건설, 디자인을 비롯해 이종분야 전문가들을 초청한 이면에는 깊은 고민이 있었다. 그는 최근 페이스북 글로벌 본사를 ‘팔로 알토’에서 ‘벨 헤이븐’으로 이전하는 작업을 진행 중인데, 이 작은 마을로 이사를 가려고 하니 풀어야 할 과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임직원들의 편의도 챙겨야 했지만, 히스패닉, 흑인, 아일랜드계가 주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지역사회에 녹아 들어가는 것이 고충이었다. 이 회사 캘리포니아 팔로알토 캠퍼스는 마치 전쟁터의 ‘벙커(bunker)’를 떠올리게 했다. 가입자들의 소통을 돕는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의 본사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목소리가 꼬리를 문 배경이다. 하지만 페이스북 본사가 새로 옮겨갈 장소는 ‘섬’을 방불케 했다.

페이스북 직원들의 핵카톤 토론과는 반대로, 구글 직원들은 ‘지메일(G-mail) 답글’을 즐긴다. 이메일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공유하는 방식이다.



지역 주민들이 거주하는 곳과 멀리 떨어져 있는 점이 한계였다. 꾸준한 소통을 꾀하기가 간단치 않았던 것. 이뿐만이 아니었다. 직원들을 위해서도 생활편의시설을 구축해야 했다. 국경으로 통하는 도로는 늘 꽉 막혀 있었고, 물건을 살 매장도 부족했다. 자녀들의 교육을 담당할 학교도 신통치 않았다.

임도 보고 뽕도 딸 묘책이 절실했다. 소셜 네트워크 전문가들인 이 회사의 임직원들만으로 풀어낼 수 없는 난제들이 꼬리를 물었다. 주커버그가 주말을 맞아 초청한 전문가들에게 준 과제는 지역사회와의 소통이었다.

페이스북 글로벌 본사 임직원들이 이 블루칼라 지역에 자연스레 녹아들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해 달라는 것이 그의 주문이었다. 디자이너, 건축가, 도시계획가 등 미국 각지의 전문가들은 기꺼이 그의 초청에 응하며 주말 휴식을 반납했다. 사람들의 소통을 돕는 것이 주특기인 페이스북도 건물 배치를 바꾸거나, 도로의 용도를 바꿔 지역민들과 교류를 뒷받침할 노하우는 부족했던 것.

전문가들은 4개 팀을 구성했다. 이들은 팀별로 동네를 둘러보며 주민들과 대화를 나누고 스케치를 하는 등 해결책 마련에 돌입했다. 이날 회의에서는 주커버그를 흡족하게 한 톡톡 튀는 안들이 쏟아져 나왔다.

페이스북 본사 바로 옆을 레스토랑, 할인점, 교통 환승 타운이 어우러진 허브(HUB)로 조성하는 방안도 등장했다. 도로를 사이에 끼고 있는 인접 지역까지 걸어서 이동할 수 있는 구름다리를 만들자는 안도 나왔다.

운행을 중단한 철도를 다시 이어 직원들의 교통편의를 돕고, 지역사회와 교감의 폭을 넓히자는 방안도 등장했다. 페이스북 캠퍼스로 통하는 문을 대폭 늘리자는 아이디어도 있었다. 페이스 북 주변의 늪지에 모듈방식의 창업지원센터(incubating center)를 설립하자는 제안도 관심을 끌었다.

마크 주커버그는 사내 임직원들은 물론, 외부 전문가들이 웃고 떠들며 아이디어를 교환할 멍석을 펼쳐주었다.

페이스북 성공 불러온 소통방식

핵카톤이 이노베이션 방법론이자, 아이디어 수혈의 창구로 주목받고 있다. 전 세계에서 회원 5억여 명을 확보하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페이스북 성공 비결의 하나가 핵카톤이라는 점이 알려지면서 글로벌 기업들의 폭넓은 관심을 끌고 있는 것.

핵카톤은 해커(hacker)에 마라톤(marathon)을 합성한 용어. ‘여러분 우리 핵카톤 합시다’ 페이스북 직원들은 이 말과 더불어 함께 회의실로 모여들어 끝짱 토론을 한다.
시간이나 격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진행하는 아이디어 회의는 늘 왁자지껄하다.

피자와 콜라, 스낵 등을 자유롭게 먹고 마시며, 계급장도 뗀 채 전개하는 핵카톤 회의는 흔히 아이디어 파티에 비유된다. 피자와 콜라, 스낵 등은 이 회사의 핵카톤을 상징하는 단어가 됐을 정도다. 회의에 따르는 구속이나 속박을 없앤 것이 특징.

제품 개발자들도 프로젝트의 종류와 진행 일정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각자의 아이디어와 의견을 교환할 수 있도록 한 핵카톤 회의는 페이스북 초고속 성장의 지렛대다. 파티를 하며 샴페인을 즐기듯 아이디어 토론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 것이 이 회사 전사적 제안 프로그램의 특징.

핵카톤은 진행 중이다. 페이스북 출범 초기에는 문호가 주로 사내의 임직원들에게 제한돼 있었지만, 최근 아이디어 수혈의 창구가 사외 전문가들로 확대되고 있는 점도 눈에 띈다. 건축가, 예술가, 디자이너를 비롯한 이종 분야 전문가들이 집중적인 구애의 대상이다.

페이스북 본사를 옮기는 벨 헤이븐 프로젝트가 대표적 실례다. 물론 이러한 크라우드 소싱 전략이 페이스북의 전유물은 아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했다. 중세의 메디치 가문은 음악가, 미술가, 철학자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을 불러 모아 르네상스 시대의 도래를 앞당긴 주역이다.

세계적인 마케팅 사관학교 프록터앤갬블의 C&D(Connect & Develop)전략도 또 다른 형태의 핵카톤이다. 자사가 보유한 인재풀에서 벗어나 외부에 연결하고(connect), 이런 식으로 확보한 아이디어를 밑천으로 혁신적인 상품이나, 서비스를 개발하는(develop) 이 전략은 이 회사의 라플리 회장을 상징하는 단어가 됐다.

지난 2004년 북미시장을 사로잡은 이 회사의 프링글스가 바로 이러한 전략의 산물이었다. 이 회사는 감자 칩 위에 동물의 문양을 찍는 ‘노하우’를 이탈리아 볼로냐에 있는 한 작은 빵집에서 터득했다. 자사의 연구원들을 동원해 식용 잉크와 분사기를 직접 개발했다면, 시간과 비용을 감안할 때 프링글스의 성공 여부를 장담할 수 없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진단이었다.

페이스북은 이러한 두뇌 아웃소싱 전략에 다시 아날로그적 감성을 더했다.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비롯한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에서 벗어나, 이종 부문의 전문가들이 서로 얼굴을 맞대고 자유롭게 놀고 떠들 수 있는 ‘멍석’을 펼쳐주었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시너지이다.

핵카톤이 글로벌 기업들 사이에서 주목받고 있는 이면에는 ‘시대 변화’가 있다. 애플을 비롯한 글로벌 기업들은 컴퓨터, MP3 플레이어 등 전통적인 텃밭에서 벗어나 인접 영역으로 활발히 진출하고 있다.

핵카톤이 이노베이션 방법론이자, 아이디어 수혈의 창구로 주목받고 있다.
전 세계에서 회원 5억 명을 확보하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페이스북의 성공 비결이 핵카톤이라는 점이 알려지면서 폭넓은 관심을 끌고 있다.

기업 ‘오픈이노베이션’의 화룡점정

삼성전자, LG전자가 애플과 맞붙는 등 전후방이 따로 없는 이종격투기의 무대가 펼쳐지고 있는 것이 글로벌 비즈니스 전장의 현주소다.

제품, 서비스의 라이프사이클도 급격히 짧아지고 있다. 테일러 시대의 유물인 ‘식스 시그마’만으로는 서비스,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결합의 시대를 헤쳐갈 수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닭 잡는 칼로 소를 잡는 격이다.

식스시그마를 도입한 기업들이 잇달아 사면초가에 처하게 된 이유는 시장 변화와 맞물려 있다. 초시계를 들고 공장 근로자들의 작업 패턴을 분석하던 테일러는 ‘관리와 규율’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근로자들은 감시와 통제의 대상에 불과했다. 테일러리즘의 적자인 도요타 자동차를 비롯한 일본 기업들의 부침(浮沈)은 이러한 변화를 엿보는 창이다. 지난 80~90년대는 식스시그마로 대변되는 품질관리 기법의 전성시대였다.

2차대전 당시 항공모함에 제로 비행기를 가득 싣고 태평양을 건너 하와이를 맹폭한 일본은 이번에는 가격은 저렴하면서도 품질은 뛰어난 제품으로 미국 시장을 뒤흔들었다. 미국 캐터필러(caterpillar) 등 거인들이 일본 기업의 공세에 흔들렸다. ‘욱일승천(旭日昇天)’하는 일본 기업들은 품질관리에 시큰둥하던 미국인들의 자존심을 짓밟았다.

제너럴모터스(GM)를 비롯한 미국 자동차 업체들도 고전을 면치 못했다. 일본 기업들은 미국 기업들이 홀대하던 품질관리 전문가 데밍 박사의 제자들이었다. 미국 기업들이 일본 기업들에 혼쭐이 나며 주목한 것이 품질관리 기법이었다. 모토롤라가 식스시그마를 개발했고, 이 품질관리 기법은 미국의 제너럴일렉트릭(GE)에서 꽃을 피웠다.

품질관리의 주도권을 다시 미국 기업들이 가져가면서, 미일 양국 기업들의 품질관리 대전에도 불이 붙었다. 제너럴일렉트릭은 식스시그마로 불량률 제로에 도전했다. 식스시그마는 바람처럼 아시아 기업들로 퍼져 나갔다.

인간관계 도외시 식스시그마 퇴장

엄격한 품질관리로 불량품 비중을 줄여 나가듯, 직원들도 정기적으로 평가해 상벌을 명확히 해온 이 글로벌 기업은 매년 두 자릿수 성장세를 유지하며 승승장구를 거듭했다. 삼성그룹을 비롯한 글로벌 기업들이 앞다퉈 이 품질관리 기법을 현장에 적용했다.

일부 기업은 사주의 후계자들이 식스시그마를 직접 챙길 정도였다. 하지만 세상을 뒤흔들던 이 품질관리 기법의 위세도 시들고 있다. 식스시그마의 대표주자들이 위기를 겪으며 회의론이 고개를 들고 있는 것.

에디슨이 창업한 초우량 기업의 대명사인 제너럴일렉트릭은 지난 2008년 불어 닥친 글로벌 금융 위기의 거센 후폭풍을 비껴가지 못했다.

매년 두 자릿수의 놀라운 성장세를 유지하던 이 글로벌 기업은 회사채 등급이 하락하는 등 수모를 면치 못했다. 파이낸스 부문의 금융계열사가 주택담보 대출사업에서 천문학적인 손실을 기록한 여파다.

모토롤라도 삼성전자, LG전자에 시장을 내주며 스타 경영자 에드 잔더가 물러나는 등 한바탕 홍역을 치러야 했다. 토머스 프리드먼이 말한 ‘평평한 세상’의 도래는 식스시그마 시대에 종언을 고한다.

핵카톤은 이러한 시대 변화의 산물이다. 직원들의 자유로운 소통을 가로막는 장벽을 허물고 아이디어를 흐를 수 있도록 하는 집단회의를 뜻하는 이 용어는 시대 변화를 엿보는 창이다.

하버드대학 출신의 마크 주커버그는 핵카톤 시대의 선두주자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핵카톤이 뇌 과학의 성과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부력의 원리에서 금의 무게를 잴 수 있는 방법을 포착한 아르키메데스가 이러한 유레카(Eureka)의 순간을 맞은 장소는 목욕탕이었다.

격식에 얽매이지 않은 채 휴식을 취할 수 있는 편안한 장소가 아이디어의 공작소였던 셈이다. 휴식 전도사로 통하는 김정운 명지대 교수는 “정보의 크로스오버(cross-over)가 가능한 편안한 공상과 몽상의 상황을 자주 가질수록 우리는 더욱 창의적이 된다”며 새로운 유형의 회의가 최근 주목받는 배경을 설명했다.

페이스북 CEO 마크 주커 버그(맨 오른쪽)가 700여명 전 구성원 누구나 자유롭게 아이디어 제안을 할 수 있는 ‘핵카톤’을 진행하고 있다.(사진=AP연합)

페이스북은 이러한 두뇌 아웃소싱 전략에 다시 아날로그적 감성을 더했다.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비롯한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에서 벗어나,
이종 부문의 전문가들이 서로 얼굴을 맞대고 자유롭게 놀고 떠들 수 있는
‘멍석’을 펼쳐주었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시너지를 꾀한 것이다.

‘아이디어 배틀’ 국내 도입도 활발

출판사 쌤앤파커스의 회의실 외벽은 투명유리이다. 회의실 풍경이 한눈에 들여다보인다. 푹신푹신해 보이는 쿠션이 방문객들의 눈길을 끈다. 이 회의실이 한국식 핵카톤이 진행되는 무대다.

이 회사는 우리나라 출판가의 미다스의 손이다. 삼성 출신의 컨설턴트 전옥표씨의 <이기는 습관>이 이 회사의 작품이다. 요즘 같은 보릿고개에 3000권 정도가 팔려나가면 히트작으로 분류하지만, 이 회사에는 수십만 권 이상 팔려 나간 책들이 수두룩하다.

박시형 대표는 아이디어 파티에 성공의 비결을 돌린다. 이 회사는 매월 두 차례 임직원들이 참가하는 한국형 핵카톤을 연다. 계급장을 모두 뗀 채 펼치는 아이디어 대결의 전면전이다.

매달 중순에 팀장급들이 참가하는 회의를 하고, 월말에는 아예 회사 문을 걸어 잠근 채 임직원들이 설전을 벌인다. 회의실은 마치 수년 전부터 유행한 고급 노래방을 떠올리게 하는 분위기다.

다섯 명 이상이 선택한 아이디어가 결선에 올라가는데, 최종 결선을 통과한 아이디어가 콘텐트 상품으로 만들어진다는 게 그녀의 설명이다. 수십만 권이 팔려나간 아이돌 그룹 <빅뱅>의 자서전도 그렇게 빛을 보았다.

출간을 앞둔 도서라도 내부 회의를 통과하지 못하면 과감히 출판을 미룬다. 이 회사의 아이디어 토론 방식은 한국식 핵카톤의 가능성을 엿보는 창이다. NHN의 버닝데이(burning day)도 주목받는 한국식 핵카톤 회의다.

LG경제연구원 박은연 전 연구위원은 “누구나 똑똑하고 할 말이 있다는 생각으로 부서 간 장벽을 낮춰, 서로 다른 분야의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야기를 낮출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영환 기자 yunghp@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