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일보하기 위해서는 기존 것을 부수는 ‘파괴적인 힘’이 필요하다.

새로운 판세를 읽는 승부사는 이 파괴의 힘과 돌파구를 중요시 여긴다. 경영자는 파괴적인 힘과 기술을 추종하는 방식이 아니라, 리딩하는 형태로 사용한다. 결과에 대한 책임도 피하지 않는다. 대체로 흥하는 기업과 경영진은 '익숙한 것과 잘 결별한' 경우다. 변화하지 않는 것이야 말로 '가장 조용한 리스크'일 것이다.

메리츠화재는 올 상반기 가장 극적으로 바뀌고 있는 보험사다.

타사와 비교할 수 없는 독보적인 파괴력으로 변신을 꾀하고 있다. 변화의 끝에 무엇이 기다릴 지는 아직 모른다. '긁지 않은 복권'과 같다.

혹자는 '무모한 도전이 메리츠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 지 미지수'라고 우려했다. 하지만 현재는 '자기 조직이 처한 현실을 마주하고, 주어진 난제를 해결하고자 솔직하고 과감한 행보를 잇고 있다'는 반응들이 우세하다.

지난해 말 메리츠화재는 임원 절반(16명)을 교체하고, 올 2월말에는 임직원 2570명의 15.8%인 406명을 희망퇴직으로 속히 내보냈다. 이 과정이 언론과 업계에 알려졌는데, 경영진의 무모한 결정으로 치부됐다.

업계에서 YB로 불리는 메리츠화재 김용범 대표이사 사장. 그를 경영 외형만 보고 판단하기는 아직 이르다. 기업 리더로서의 본질적 가치는 향후에 평가받게 될 것이다. 보험사 경영 결과는 경영자가 떠난 뒤에 나타난다.

메리츠 곳곳에 YB의 ‘파괴적인 힘’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기자의 눈에는 '화전민(火田民)'의 농사 기술이 오버랩 된다. 처녀지나 휴경지를 새로이 경작할 때 불을 놓아 야초와 잡목을 태워버린 다음 그 땅을 농경지로 쓰는 방식이다. 주로 고립된 특수한 지역에서 많이 사용된다. 메리츠는 지금 익숙한 것들을 다 태워버리고 있다. 새로운 것들이 자랄 것이다.
 
YB는 영업 실적을 강요 받아온 메리츠에 '생산성'이라는 화두를 던졌다. 대표로서 내정됨과 동시에 임직원을 내보내면서 회사 방향성을 제시했다. 고통스런 방식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지속경영 가능한 기업'을 준비한다는 해석도 나왔다. 그는 매출이라는 허세를 앞세우기보다 '수익의 질'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깨진 유리창을 그대로 놔둬선 안 된다. 작은 것부터 시작하자'는 생각으로 혁신의 씨앗을 뿌린 것으로 보여 진다.

YB는 작은 것부터 요구했다. 그것을 토대로 꿈꾼 것은 묵직했다. '기업으로서의 메리츠화재 가치 키우고 높이기'.

"전자결재를 전면 시행하고, 대면결재를 금지해 주십시오"

"문서작성을 80% 줄여 주십시오"

"정시에 퇴근해 주십시오"

대면결재는 업무자의 문서작성에 과도한 시간을 쓰게 했다. 또 보고자의 시간을 파편화시켜 생산성을 떨어뜨린다는 게 YB의 생각이었다. 또한 사인해야 하는 결재자의 시간을 과도하게 뺏기 때문에 '결재'는 폼 잡는 행위가 아닌, '생산성 하락의 주범'이라고 봤다.

이 같은 결정 기저에는 '메리츠화재는 덩치 큰 대형 손보사 경영 방식을 무작정 따라가선 안 된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어찌 보면 '보험업종'이라는 정형화된 장르를 깨뜨리면서 새로운 보험업 모델을 만들려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한 조사에 따르면 한국 직장인들이 일과 중에 문서작성에 쓰는 시간은 전체 근무시간의 약 50%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YB도 이 같은 상황을 목격했다. '직원들이 가치 있는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쓸데없는 일을 열심히 한다'고 봤다.

YB는 대면결재를 쓸데없이 시간 죽이는 '기업악의 근원'으로 판단해 이를 없앴다. 대안은 전자결재.

소모적인 에너지  사용도 줄였다. 회사에 머문 시간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일에 얼마나 집중하는지가 평가받아야 한다는 그는 "상사가 퇴근하지 않아도 할 일을 마쳤으면, 내일을 위해 퇴근하시고, 가족과 함께 하는, 저녁이 있는 삶을 복원해 주십시오. 이는 직원들의 요구와도 맥을 같이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기 위해 회의 방식도 바꿔야 했다. YB는 '다들 싫어하는 회의'에서 벗어나 '목적이 분명한 회의 문화'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여러분은, ‘회의’라고 하면 어떤 단어들이 떠오르십니까? 회의는 직장인들이 하기 싫은 업무 3위 안에 들 정도로 끔찍하게 생각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회의에 대한 인식이 나빠진 이유는 대다수 리더들이 회의하는 방법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모르는 상태에서 회의를 이끌기 때문입니다. 전 임직원 여러분께 효율적 회의 방법에 관한 책 '30분회의'가 배포될 것이니, 세 번 이상 정독해주세요. 회의 문화 혁신을 위한 워크숍도 개최될 예정입니다"

대면결재 금지, 회의 문화 변화에 이어 YB가 주도한 ‘변화와 혁신, 세 번째 시리즈’는 ‘벽 없는 조직 만들기’.

메리츠화재 구성원 개인들은 '개인의 세계'를 넘어서야 했다. 이어 팀과 부서를 뛰어넘어야 했고 사업부를 비롯한 회사 전체와 공동 목표 달성을 위해 상하좌우간 끝없이 소통해야 했다.

최고경영자의 불호령이 떨어진다 한들, 2000명 임직원의 커뮤니케이션이 갑자기, 부랴부랴 이뤄질 수 있을까.

YB는 예를 들었다. 2001년 애플이 아이팟을 갖고 나와 시장을 압도했을 때, 소니가 대항마 출시에서 번번히 실패한 것은 월등히 우수한 기술력에도 불구하고, 부서 이기주의에 매몰돼 사업부간 기술과 정보 공유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그렇다면 무엇이 메리츠화재의 소통과 협력을 방해하는 것이었던 걸까. 그는 소통을 가로막는 세 가지 주범을 꼬집었다.

첫번째. 공동의 목표보다 부서 목표를 우선시하게 만드는, 잘못 설정된 부서 목표

두번째. 비대하고 다층적인 조직도

세번째. 경직적이고 수직적인 조직문화

벽을 허물기 위해 YB가 제시한 처방전은 △공동의 목표와 부서 목표 일치 △슬림하고 수평적인 조직 △유연한 조직문화 만들기다.

이를 만들기 위한 아홉 가지 실천 사항이 직원들 앞에 떨어졌다.

1. 보안에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모든 정보와 데이터는 완전히 그리고 즉시 공유해주십시오.

2. 부서 간 소통할 때, 항상 공동의 목표를 염두에 두십시오.

3. 자기부서의 책임을 다른 부서로 전가하지 마십시오. 신뢰가 깨지고, 벽이 생깁니다.

4. 자기부서가 책임지고 결정하면 될 일을 가지고, 책임 분산 하고자 다른 부서를 끌어들이지 마십시오. 시간이 지체되고, 불신의 벽이 생깁니다.

5. 30분 회의할 때 대상자를 넓게 포함해 주시고, 모두에게 발언권을 주십시오.

6. 회사 내 위계와 서열은 역할에 한정된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인간 평등과 인격 존엄에 위배되는 발언과 행위를 중단해주십시오.

7. 윗사람 의중을 살피는 대신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주장해주십시오. 윗사람은 부하직원의 주장을 고깝게 생각 말고 더욱 북돋아 주십시오. 상명하복이 아니라 논쟁이 꽃 피는 회사가 이깁니다.

8. 부서원들 그리고 인근 부서원들과 하루에 한마디씩 안부를 챙겨주십시오.

9. 많이 접촉하고 부대껴야 소통이 활발해집니다. 틈 나는 대로 옆 부서와 식사해주십시오.

 

아...요청 사항이 많다. 직원들은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다. '파괴의 힘'을 동원해 익숙한 것들과 결별해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업무 이행여부는 다층적 조사를 통해 연말 인사평가에 반영된다!

 

끝으로 YB는 보험사 최고경영자로서 직원들에게 '행복'이라는 단어를 꺼냈다.

"임직원이 행복해야 하고, 일을 효율적으로 해야 합니다. 행복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일에 최선을 다 할 수 없으며, 또한 일을 효율적으로 하지 않으면 제한된 자원과 시간 속에서 남보다 앞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변화와 혁신은 여러분의 직무만족도를 높이고 업무효율성을 개선하기 위한 것입니다. 창사 이래 92년간 변화 없이 정체됐던 메리츠화재가 지난 3개월 만에 여러분이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YB의 혁신과 변화 초기 업계에서는 "메리츠의 쿠데타(임직원 정리)로 회사 성장이 5년 뒤로 밀려났다"는 우려가 있었다. YB의 도전이 무모하다는 시선도 있었다.

그로부터 약 3개월의 시간이 지난 지금 내부적으로는 '신기하게도 우리는 달라지고 있다'는 반응이 나온다. 직원들의 직장 만족과 사업비 경쟁력 강화 및 업무 효율성을 모두 잡아가고 있다는 평가까지 조심스레 나온다. 다음의 변화와 혁신 시리즈가 기대된다는 목소리도 들린다.

이쯤 되면 메리츠화재는 '다른 (대형)손보사를 흉내 내서는 최적의 퍼포먼스를 낼 수 없다'고 판단한 YB의 결단에 긍정적인 눈길을 보내도 될 것 같다.

자기 기업이 어떤 회사이고, 어떤 전략이 필요한 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 최고경영자에겐 가장 큰 '죄'다. 여전히 단기실적과 '허세'를 앞세우는 보험사 경영진이 많다. ‘내 임기동안만 아무 일 없으면 된다’는 그런 생각하겠지.

메리츠화재만이 가진 고유한 가치를 찾기 위해 YB가 선택한 혁신은 서서히 효과를 내고 있고, 이를 응원하는 쪽도 많아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