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찍질?’

영화 제목으로는 좀 잔인하다 싶었다. 흑인 노예 또는 가학·피학성애자가 등장해야 어울릴만한 제목 아닌가! 그런데 음악 영화란다. 같은 제목의 재즈 연주가 등장한다는 것이었다.

영화를 보기 전부터 기대를 갖게 만드는 몇 가지 이야기를 들었다. 단 19일 만에 만든 영화임에도 아카데미 3관왕에 빛나고, 주인공인 ‘앤드류(마일즈 텔러)’가 대역 없이 모든 드럼 연주를 직접 했고, 그 연주가 대단히 훌륭하다고 한다. 특히 ‘미친 학생’과 ‘폭군 선생’의 대립이 영화의 메인 구도라는 점이 흥미를 끌었다. 영화를 보기 전까지 말이다.

미친 학생과 폭군 선생

(주의! 이제부터는 다량의 스포일러가 등장한다.)

드럼을 치는 앤드류는 최고가 되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다. 그의 스승인 플래처(JK 시몬즈) 또한 최고의 연주자를 만들기 위해 학생들을 한계까지 몰아넣는다. 스승의 눈에 띄어 좋은 연주기회를 잡았던 앤드류는 중요한 재즈 경연 날 사고로 연주를 망쳐버리고, 그 자리에서 스승과 주먹다짐을 벌인다. 이 사건으로 미친 학생과 폭군 선생 모두 학교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얼마 후 학교를 떠난 두 사람이 어느 재즈 바에서 다시 만난다. 그때 스승의 말은 영화 속 명대사로 유명하다.

“There were no two words in the English language more harmful than good job.(‘잘했어’처럼 쓸데없는 말은 없어!)”

몇몇 비평가들은 이 대사에 무척 감명을 받은 모양이다. 플래처는 인간의 성장과 한계의 극복을 위해서는 절대 만족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그가 학생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바로 한계의 극복이고, 그러한 교육철학은 ‘찰리 파커’의 일화를 소개함으로써 정당화한다. 찰리 파커는 모던 재즈의 창시자이기도 한 색소폰 연주자이지만, 초창기 연주 실력은 형편없었던 모양이다. 그의 솔로 연주에 격분한 드러머가 심벌즈를 그에게 던져버렸던 것이 계기가 되어, 절치부심의 노력 끝에 최고의 뮤지션이 되었다는 일화이다.

자신의 제자를 공연에 끌어들인 스승은 제자를 끝까지 몰아붙인다. 앤드류가 준비했던 곡과는 전혀 다른 곡을 연주함으로써 그를 마치 형편없었던 찰리 파커처럼 만들어버렸다. 얼마나 당황했을까? 무대를 떠나려던 앤드류는 자리로 돌아와 당당하게 연주를 시작한다. 스승과 함께 연주하기로 약속했던, ‘위플래쉬’와 ‘카라반’을 이끌어간다. 그것도 아주 훌륭하게 말이다. 마침내 앤드류가 웃고, 플래처가 웃고, 영화는 그렇게 끝난다.

채찍질보다 잔인한 성취주의

영화 감상평은 극으로 나뉜다. 미래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서 용기를 얻었다는 사람들과 목적을 위해 수단을 정당화하는 잔인함에 불쾌했다는 사람들이 있다. 둘 다 성취주의적인 관점이다. 성취주의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마지막 장면의 멋진 드럼 연주는 엄청난 역경을 극복한 결과였고, 그렇다면 플래처의 폭력에 가까운 몰아붙임은 필연적인 요소였다.

정말 <위플래쉬>가 성취주의를 이야기하는 것일까? 과연 엄청난 경쟁과 미래의 성공에 저당 잡힌 인생은 행복할까?(앤드류는 성공을 위해 사랑하는 여자에게 이별을 선언한다. ‘너는 내 성공에 거치적거려!’)

그렇지 않다고 영화는 이미 말하고 있다. 식구들과 만찬 도중, 앤드류는 이렇게 말한다. “아무에게도 관심을 받지 못하고 심심하게 100살까지 사는 것보다는 요절을 하더라도 유명해지고 싶다!” 성공해서 주목받고 싶다는 이야기다. 성취 이외에 아무 것도 필요 없다. 찰리 파커의 이야기다. 그런데 알고 있는가? 누구보다 유명하고 화려한 삶을 살았지만, 찰리 파커가 약물 중독으로 인한 정신병으로 비참하게 세상을 떠난 사실을 말이다. 미래를 위해 저당 잡힌 괴로운 현실이 그를 철저하게 파괴했던 것이다.

독립, 성숙한 행복을 위한 필연

어떤 장면이 가장 명장면이었을까? 마지막 장면에서 보통의 연주보다 2배나 빠른 더블타임스윙기법의 ‘카라반’ 연주는 정말 숨이 막힐 정도였다. 엔딩 부근에서 플래처와 나누는 앤드류의 미소가 가장 아름다웠다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필자의 눈을 사로잡는 장면은 엉망으로 연주를 한 후 무대를 떠나기 위해 나설 때였다. 열린 틈 사이로 보이는 아버지와의 눈맞춤은 극도의 긴장을 자아낸다.

앤드류와 아버지는 여느 부자지간과는 다르다. 앤드류가 여자 친구에게 스스로를 괴짜라고 소개하면서, ‘이 나이에도 아직 아버지와 영화를 보러 온다’는 이야기를 한다. 힘든 일이 생기면 아버지가 누구보다도 먼저 달려와 도와준다. 어떻게 보자면 정말 더할 나위 없이 다정한 부자지간이다. 그런데 완벽해 보이는 부자지간이 실은 잔인한 함정이다. 그는 성인이었지만 아버지에게서 독립하지 못한 소년이었다. 아버지에게 늘 인정을 바라지만 아버지는 걱정을 하되 인정은 해주지 않았다. 마지막 장면에도 연주에 실패한 아이가 걱정이 되어 무대 뒤로 올라왔을 것이다.

짧지 않은 순간 아버지와 아들은 눈을 맞춘다. 걱정스러운 아버지의 눈빛과 갈등 속의 아들의 눈빛. 이전과 같다면 아버지의 품에 안겼을 것이다. 아버지는 진심어린 위로와 사랑으로 아들을 감싸안았을 것이다. 그런데 앤드류는 뒤돌아섰다. 그리고 용감하게 자기의 자리로 돌아와, 자신만의 연주를 시작한다. 그리고는 자신 있게 외친다.

“I'll cue you!(신호 줄게, 따라와!)”

진정한 성인으로 독립한 앤드류는 이제 음악을 이끌어나간다. 플래쳐와는 더 이상 스승과 제자 사이가 아닌, 동등한 음악인으로 마주한다.

도대체 아버지에게서 독립과 행복이 무슨 연관이 있을까? 미성숙한 인간은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알기 힘들다. 쾌락을, 칭찬을, 탐욕을 행복으로 알기 쉽다. 진정한 행복은 성숙한 사람들만의 특권이다. 그리고 성숙해지기 위해 독립은 필연적인 것이다.

행복해지려면 버려야 할 것

마지막 장면 앤드류와 플리처의 미소는 극복과 성취의 의미가 있다. 다만 그가 극복한 것은 견디기 힘든 한계점도 아니고, 그가 획득한 것은 흉내 내기 힘든 드럼 기법이 아니었다. 그가 이겨낸 것은 의존심이었고, 그가 얻은 것은 진정한 즐거움, 자유, 그리고 행복이었다.

미소의 다른 의미는 기쁨이다. 아버지를 극복하고 스승과 화해한 기쁨이다. 성숙한 성인이 되어 드럼 연주 본연의 목적인 즐거움을 되찾게 된 깨달음의 미소이다.

위플래쉬는 우리에게 성취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실은 성취 욕구 이면의 불행한 사실을 말하고 있다. 결국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성취보다는 극복하고 독립하고 화해하는 과정 속에 있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우리가 성취만을 쫓아 끊임없이 경쟁하고 스스로를 괴롭힌다면, 결국 성취 욕구는 거대한 채찍이 되어 우리를 고통스럽게 내리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