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사들 수수료 낮추고 서비스 질 높이고

다운사이징. 가격은 내리고 성능은 같거나 더 높게 만든다는 뜻이다. 이런 제품이 나온다면 소비자에겐 무척이나 반가운 일이다. 반대로 기업의 입장에선 피하고 싶은 전략이기도 하다.

그렇다 보니 다운사이징 전략은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는 업종에서 상대적으로 경쟁력이 뒤쳐진 업계에서 사용하는 필승카드란 뜻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가격을 낮추되 박리다매로 이익을 극대화시키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보니 탄탄한 경쟁력을 바탕으로 보수적 성향이 강했던 업종, 기업에선 거들떠보지 않는 경영전략이다. 최고의 제품을 갖고 있으니 알아서 하라는 자신감의 표현인 셈. 국내에서 가장 보수적인 업종으로 분류되는 금융업계, 그중에서도 증권업계를 떠올려보자. 확실한 서비스, 높은 수익성을 지향하는 특성상 다운사이징 전략은 딴 나라 이야기기에 불과했다.

그런데 현대증권과 미래에셋증권이 일을 내버렸다. 치열해지는 증권사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선빵’을 날렸다고 할까.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증권가, 그것도 국내를 대표하는 두 증권사에서 역발상이 시작됐으니 이유를 들어볼 만하다.


현대증권은 랩어카운트 상품의 다운사이징을 판매하겠다고 지난 10일 선언, 14일부터 판매에 들어갔다. 최고 3%에 달했던 수수료를 1.5%로 낮춰 팔겠다고 하니 고객 입장에선 환영할 일이다. 판매가 시작되자마자 수수료가 인하된 QnA투자자문랩 가입자는 일일 가입자 수보다 5배가 늘었다.

QnA투자자문랩의 다운사이징은 체질 개선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사람으로 치면 생활 패턴을 바꾼 것으로 ‘특정 음식만 먹다가 다양한 음식’을 섭취할 수 있으니 건강해지고, 자연스레 관리 비용이 낮아질 수 있었다는 게 현대증권의 설명이다.

개인 투자자 접근성 UP 긍정적 효과

우선 QnA투자자문랩은 기본 가입 금액을 3000만 원으로 정했다. 기존 5000만 원에서 2000만 원을 뺐다. 대신 1.5∼3%였던 수수료를 절반 수준인 1∼1.5%로 낮췄다.

1%의 수수료율은 일반 주식형 펀드보다 낮은 수치. 최경수 현대증권 사장은 “그동안 (랩어카운트) 가입자가 기관과 법인 고객 위주의 계좌가 많아 개인 고객의 접근성을 높여 만족도 높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더욱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실제 수수료는 낮췄지만 서비스의 질은 높아졌다. 단순히 1개 자문사와 연계됐던 상품 구조에서 벗어나 다양한 자문사를 활용한 상품 라인업을 갖췄다. 또 고객 수요에 맞춰 맞춤형 포트폴리오를 제공한다는 방침이다.

QnA투자자문랩은 투자일임계약을 통한 주식형 랩 상품으로 19개의 투자자문사가 주식투자전략 및 종목 선정을 통해 포트폴리오를 구성하고, 현대증권 랩운용부가 관리를 한다. 가입자는 성장형, 자산분배형, 가치형 중 한 개를 고르기만 하면 된다.

원하면 자문사를 변경할 수 있고, 별도 수수료도 없다. QnA투자자문랩은 시장 상황에 따라 주식 투자 비중을 0~100% 사이에서 조정할 수 있고, 10~15종목 내외의 종목을 선택 할 수 있어 수익률을 극대화시킬 수 있다. 공격적이면서도 전문적인 자산관리를 원하는 젊은 투자자에게 적합한 상품이란 얘기다.

미래에셋증권도 수수료 인하에 나섰다. 박현주 회장이 직접 선언, 랩어카운트 가입자 수가 일일 평균 30% 증가했다. 기존 3.0%의 수수료를 연 1.90%로 낮춘 것이 주요했다.

코스모, 피데스, 템피스, 인피니티, 레오, LS, 한국창의, 브레인, 프렌드자문사와 GS자산운용의 자문을 받는 자문형 랩어카운트 상품이 모두 해당된다. 박 회장은 “자문형랩 수수료가 그동안 비싼 편으로 수수료 인하를 주도하겠다”고 말했다.

투자금액이 적은 고객이 수수료에 민감하다는 것은 증권가에 널리 알려져 있다. 고액 투자자에 비해 수수료가 낮은 상품으로 갈아타기 쉽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 비춰봤을 때 현대증권과 미래에셋증권에서 선보인 낮은 수수료 랩어카운트의 가입자는 꾸준히 증가할 전망이다.

그래서일까. 일부 증권업체를 중심으로 랩어카운트 상품의 수수료 인하가 논의되고 있다. 가장 발 빠르게 대응한 곳은 SK증권이다. SK증권은 일부 자문형랩과 일임형랩의 수수료를 50% 인하하기로 했다. 연 2.0%의 자문형랩 수수료는 0.99%로, 최고 연2.8% (1억 이하)의 수수료를 책정했던 일임형 상품 일부를 1.4%로 적용키로 했다.

혜택은 기존 고객에게도 동일하게 제공한다는 게 SK증권의 설명이다. 대우증권과 한국투자증권, 하나대투증권도 수수료율을 소폭 낮춘 자문형 랩을 상품 출시를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넘어 해외형 출시 ‘의미 있는 변화’

삼성증권과 우리투자증권은 수수료 인하 대신 서비스 강화로 고객 만족도를 높인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동안 부실했던 자문형 랩을 퇴출시키는 등 상품 관리의 질로 승부를 보겠다는 것이다.

경쟁사의 다운사이징 전략에 서비스 질로 맞선다는 뜻이기도 하다. 양사는 자문형 랩어카운트 시장에서 1위와 2위를 다투고 있는 곳이다. 자문형 랩 잔액이 꾸준히 늘고 있고, 선두 기업으로서 보다 다양한 상품을 선보일 계획도 갖고 있다(표-참조).

삼성증권은 세계적 자산 운용사인 미국 레그메이슨과 랩어카운트 자문 및 상품 공급에 관한 업무 협약을 체결, 미국 직접투자 랩을 출시할 예정이다. 지난 1월 중국 최대 운용사인 ‘화샤기금(華夏基金)’과 업무협약에 이은 결실로 자문형랩 상품의 범위를 국내에서 해외무대로 확대, 경쟁력 확보에 나섰다.

우리투자증권은 현재 출시 중인 랩어카운트 상품의 선별해 높은 수익률을 제공, 수수료 인하에 부담을 덜어주는 쪽을 택했다. 운용성과 등 정량적 평가 기준과 자체 평가시스템인 PSR분석을 통해 문제가 있는 상품 판매를 중단하기로 한 것.

대신 국내 전 자문기관에 대한 지속적인 모니터링 및 평가를 통해 우수 자문기관을 확대해 나가기로 했다. 또 복수 매니저 운용 서비스인 멀티매니저랩, 중국주식 자문형랩, 헤지펀드 펀드랩, 시스템 트레이딩 랩 등 특화된 상품의 서비스를 제공할 예정이다.

현대증권과 미래에셋증권의 랩어카운트 수수료 인하는 분명 증권가에 큰 변화를 몰고 왔다. 수수료 인하를 이끌었고, 상품의 질적 제고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목돈을 굴리기엔 이보다 더 좋은 상품이 있을까. 주춤하는 증시를 맞아 여러 조건과 견줘봐도 펀드보다 진화되고 있는 랩어카운트 상품의 매력은 재테크 종결자로서 손색이 없어 보인다.

수수료 인하경쟁 일단은 긍정적 효과

증권가의 수수료 경쟁은 어떤 결과를 가져다주게 될까. 수수료 전쟁이 이제 막 시작됐으니 결과는 뚜껑을 열어 보기 전까진 아무도 모른다. 다만 수수료 경쟁이 각 증권사에 어떤 영향을 주게 될지는 주가의 움직임으로 짐작할 수 있다.

KTB증권은 현대증권의 수수료 인하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목표주가는 1만8000원. 조성경 KTB증권 애널리스트는 보고서를 통해 중개(브로커리지)수수료 수익과 랩어카운트·ELS 등 WM수익이 상승한 점을 긍정적인 요인으로 꼽았다.

수수료 인하 대신 질적 서비스를 내세운 삼성증권과 우리투자증권에 대한 평가도 긍정적이다. 임승주 교보증권 연구원은 보고서를 통해 랩어카운트 선두주자로 고액 자산가가 많이 몰려 있다는 점을 주목했다. 미미한 수수료 보다는 서비스의 질적인 면에 비중을 두는 고액 자산가의 특성상 고객 이탈이 적을 것이란 게 이유다.

김세형 기자 fax123@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