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보다 여자 마음을 더 잘 아는!’

쑥스럽지만, 이런 수식어가 필자를 소개하는 글 대부분에 등장한다. 마치 강조라도 하듯, 위에 제시한 것처럼 아예 처음부터 ‘여자보다’로 시작하는 경우도 많다. 다른 사람들이 써주는 소개는 물론이고, 어찌하다 보니 경우에 따라서는 필자 스스로도 ‘여자보다’로 시작하는 뻔뻔함을 보이는 경우도 있다.

여자 마음을 잘 아는 정신과의사

난센스다. 어떻게 여자보다 여자 마음을 더 잘 알겠는가? 그런데도 왜 자칭타칭 ‘여자보다 여자 마음을 더 잘 아는 정신과의사’가 되었을까? 시작은 200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필자의 저서 중 하나인 <심리학 초콜릿>의 편집자가 책을 출간하는 과정에서의 일 때문이다. 편집자가 여자의 마음을 잘 알아준다고 감동을 했던지, 아니면 여성들을 주 독자층으로 생각하며 쓴 책인데 필자가 남자인 것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인지, 필자 소개란에 ‘여자보다’로 처음 소개하였다. 그 후 <심리학 초콜릿>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덩달아 저자 소개글도 나름 유명해졌던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거 없는 이야기인 것만은 아니다. 정신과의사가 되기 전부터 여성 심리에 관심이 많다 보니 일반 남자들보다는 여자에 대해서 많이 알기는 할 것이다. 또 박사학위 논문이 여성 호르몬과 심리에 대한 것이고, 또한 일부러라도 여자에 대해 더 많은 공부를 하게 되니, 다른 남성 전문가보다도 조금 안다고 해도 결코 말도 안 되는 과장은 아닐 것이다.

남자를 놀라게 하는 여자만의 비법

그런데 도대체 왜 남자는 여자의 마음을 모르는 것일까? 물론, 거꾸로 여자도 남자의 마음을 잘 모른다. 필자가 그 문제의 <심리학 초콜릿>을 집필할 때의 일이다. 책의 소재를 좀 더 현실적으로 구성하고자, 20대 여성 4명과 함께 카페에서 미팅을 한 적이 있다. 모임의 의미를 설명하고, 이야기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경악을 금치 못할 일이 벌어졌다. 세상에, 필자가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자기들끼리 대화를 주고받는 것이었다. 남자들 사이에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회사에서 점심 식사 후, 커피 자판기 앞에 삼삼오오 모여 떠들고 있는 남자들을 본 적 있는가? 틀림없이, 한 남자만 이야기를 하고 다른 남자들은 경청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이야기하는 사람은 십중팔구 선임자이고, 나머지 후임들은 절대 이야기를 끊거나 자기들끼리 떠들 수 없다. 만약 허락 없이 중간 끊기나 지방 방송을 하는 후임은 훗날 좋지 않은 보복(?)을 당하기 십상이다. 사냥하러 다니던 원시 종족 시절, 리더 이외에는 입을 꼭 다물고 사냥감을 추적해야 하는 습성이 유전자에 남게 되어 생긴 결과이다. 필자도 그런 남자들 사이에서 교육받고, 근무하고, 생활하다가, 갑자기 이야기 중 끼어들어 자기들끼리 떠드는 모습에 심사가 뒤틀렸었다.

그런데 더욱 경이로운 것은, 부아가 치밀어 필자가 했던 이야기가 무엇인지 물어보았는데 놀랍게도 모든 내용을 정확히 꿰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남자들은 한 번에 한 가지 일밖에 못 한다. 하지만 여자는 두세 가지 일을 거뜬히 해낸다. 아내가 음악을 틀어놓고, 전화를 하면서, 식사를 준비하는 모습을 보면, 정말 부럽다. 멀티플레이어가 따로 없다. 경이로운 일이다.

남자와 여자는 다른 별에서 왔다

남자와 여자가 전혀 다른 종(種)이라는 의심은 상담실에서도 일어난다. 남편과 대화가 안 되는 문제로 상담을 받은 주부가 있었다. 명절에 시어머니 때문에 속상하다고 남편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심각하게 듣고 있던 남편이 며칠 말이 없다가 갑자기 하는 소리가 ‘이혼’이란다. 아내는 그저 ‘시어머니가 힘들다’는 하소연을 하고 위로를 받으려 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뻔하고 간단한 이야기’에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반응’이냐며 흥분을 했다. 그렇지만 남편의 이야기는 전혀 달랐다. 남편은 시어머니 때문에 힘들어 하는 아내가 몹시 안타까웠다. 어떻게 하든 그 문제를 해결해주고 싶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적절한 해결방안이 떠오르지 않더란다. 그런 고민 속에서 정말 진지하고 심각하게 생각해낸 해결책이 이혼이라는 것이다. 아내가 싫어서가 아니고, 진심으로 걱정한 끝에 내렸는데 말이다.

두 사람의 문제는 결코 드문 이야기가 아니다. 남녀의 차이 때문에 발생할 수 있는 흔한 종류다. 아내는 ‘위로’를 원했다. 그저 이야기를 들어주고, 박자 맞춰 주고, ‘아유! 힘들지! 어쩌니!’ 하는 말을 듣고 싶었을 뿐이다. 이런 것이 여자들의 특성이다. 그런데 ‘이혼’이라니! 날벼락이 아닐 수 없다. 남편 또한 답답할 노릇이다. ‘시어머니 고민’은 결코 아내의 생각처럼 ‘뻔하고 간단한 이야기’가 아니다. 아내가 생각하는 ‘말도 안 되는 반응’에는 남자의 독특한 심리가 담겨있다. 일반적으로 남자들은 상대의 고민을 들으면 무조건 해결해주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생긴다. 해결을 못해주면 심한 스트레스가 되고 심지어 열등감까지 느낄 정도이다. 잘 알다시피, 고부간의 문제란 결코 쉽게 풀릴 일은 아니지 않은가! 그러니 결론은 좀 엉뚱하지만, ‘이혼’이 되어 버린 것이다.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도 남과 여는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 대개 남자들은 스트레스를 받는 순간, ‘싸우느냐 도망치느냐’의 기로에 놓인다. 하지만 여자들은 다르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다정함 또는 친밀감’으로 풀어간다. 포탄이 떨어지는 전쟁터를 생각해보자. 남자들은 나가 싸울 것인가, 아니면 비겁하게 도망칠 것인가로 고민한다. 하지만 여자들은 서로를 안아주고 친밀한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두려운 상황을 헤쳐나간다.

이런 차이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도대체 ‘남자와 여자가 같은 종의 생명체일까’ 하는 생각도 든다. 다른 별에서 왔다는 주장도 있다. 이유는 뇌가 달라서이다. 남자의 뇌와 여자의 뇌는 수백만 년의 진화를 거치면서 살아남기 위해 각자 특성에 맞게 발달해왔기 때문이다. 주로 목적지향적인 남자는 사냥을 나가 소리 없이 한 마리의 사냥감을 추격해서 먹을 것을 해결하는 데 유용하다. 여자는 여러 집안일을 동시에 하며, 서로서로 모여 어울려 안전을 보장받고, 서로의 고민을 대화와 친교로 풀어나가도록 진화를 했다. 어찌 보면 이런 극단적인 차이가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기틀이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서로 다른 두 종족(?)이 한지붕 아래에 살면서 종족을 번식하고 맡은 바 임무를 잘 수행해왔으니 개별적인 종족의 삶보다 훨씬 효율적이고 발전적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행복도 성차별?

그렇다면 행복에 관한 남녀의 차이는 어떨까? 목적지향적인 사냥에는 남자가 유리하고, 관계지향적인 여자는 친교에 유리했다면, 누가 더 행복할까? ‘성취’와 ‘관계’ 중 어떤 것이 더 행복에 큰 영향을 끼칠까?

남자들은 성차별을 당한 것 같아 서운하겠지만, 행복에 있어서는 여자가 훨씬 유리하다. 우선 같은 조건이 주어졌을 때 행복을 느끼는 정도가 크다. 소소한 기쁨에도 크게 행복감을 느낀다는 뜻이다. 또한 불행을 받아들이는 데도 수용적이다. 불행은 존재하기 때문에 힘든 점도 없지 않으나 받아들이지 않고 부정하기 때문에 오히려 행복해질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한다. 성취에는 개인적인 차이가 크지만, 관계를 형성하는 데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점도 여성을 더 행복하게 하는데 한몫을 한다.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의 속성은 변하지 않겠지만, 인류는 변화한다. 그리고 행복도 변화한다. 변화는 남녀 차이에서도 일어난다. 남과 여라는 이분법적 분류는 점차 퇴색될 것이다. 남자의 고전적 역할을 유지한다면 분명 과거만큼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 반대로 여자 역시 지금까지의 태도를 고수한다면 행복에는 긍정적이라고 할 수 없다.

행복해지고 싶다면, 변화를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한다. 부끄러워하거나 주저하지 말고 서로를 있는 그대로 보고, 장점은 취하고 단점은 수정해야 한다. 단적으로는 남자는 좀 더 관계지향적으로, 여자는 좀 더 목적지향적으로 바뀔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행복해질 기회를 더 잡을 수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