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의 가치 실현 방법에 현격한 차이… 나눔과 욕심 엇갈리는 삶의 자취

“여러분, 부자 되세요” 몇 년 전, 유행어가 될 정도로 ‘부자 바람’을 일으킨 모 신용카드사의 광고카피다. 지금은 새해 인사나 덕담, 기념일 축하 멘트 등 일상에서 흔히 사용하는 말이 돼버렸다.

대한민국은 언제부턴가 ‘부자 되기 열풍’에 휩싸였다. ‘10억 만들기’ ‘부자 아빠 되기’ 등 부자가 되는 비결을 담은 책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오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경제 서적을 탐독하는 데 열심이다. 곳곳에 열리는 부자 재테크 강좌마다 늘 만원사례다.

지난해는 부자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들이 줄을 이었다. 12대에 걸쳐 부를 이어 온 경주 최부잣집을 다룬 <명가>, 조선 여성 CEO(최고경영자)의 선구자격인 김만덕의 일생을 그린 <거상 김만덕>, 실존 인물은 아니지만 재벌 2세들을 소재로 한 <부자의 탄생>까지.

드라마 속 주인공을 통해 보이는 부자상은 하나같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고 있다. 이들을 롤 모델로 주목해야 할 부분은 부자가 된 이후부터다. ‘어떤 부자가 될 것인가' ’부를 가치 있게 쓰려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묻는 것이 사회적으로 고민해야 할 중요한 명제로 떠올랐다.

선진국 부자들 기부문화는 생활

부자(富者)의 사전적 의미는 ‘재물이 많아 살림살이가 넉넉한 사람’이다. 하지만 부는 사회에서 축적한 산물이므로 사회 공동체를 위해 사용돼야 한다는 논리가 깔린다.

내가 만든 물건을 사는 사람이 있어야 부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당연한 이치다. 부자는 자신의 재산을 불리는 데만 머리를 쓰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이끄는 리더로서 선행과 모범을 보여야 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최근 부자들의 사회적 의무와 책임을 강조한 ‘리세스 오블리주’(richesse oblige)가 더욱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이유다. 여기에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도덕과 책임은 물론 기부나 후원, 봉사, 세금 등 나눔의 덕목까지 모두 포함된다.

미국이나 프랑스 등 선진국 부자들은 나눔의 의무를 특권이자 책임인 동시에 행복으로 여긴다. 돈에 대한 가치와 기부문화가 건전하게 뿌리내린 결과다.

한국 부자들의 인식은 이에 훨씬 못 미치지만 사회적 책임을 강화하려는 노력은 점점 나아지는 듯하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최근 발간한 ‘2009년 기업·기업재단의 사회공헌백서’에 따르면 2009년 주요 기업들의 사회공헌 지출 비용이 2조6517억 원으로 전년보다 22.8%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세계적인 경기 침체에도 사회공헌비 지출을 늘려 취약계층에 대한 지원을 크게 강화한 것으로 풀이된다. 또 사회공헌 관련 전담부서 설치 비율이 90.4%, 예산제도 도입 비율이 89.9%, 경영 방침의 명문화 비율이 80.3%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돼 사회공헌 활동의 내용도 체계화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나눔, 기업의 사회공헌 활동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진정성이다. 지역사회를 진심으로 돌보려는 마음과 책임을 다하려는 진심어린 마음이 밑바탕에 깔려 있어야 한다.

한동철 부자학연구학회 교수는 “진짜 부자는 돈으로만 기부하는 게 아니라 정신으로 베풀어야 한다”며 “내가 가진 것을 주더라도 생색을 내지 말고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진정한 부자란, 베푸는 마음이 부자여야 한다는 얘기다.


기부와 자선 실천하는 흥부형 부자

한국은 이상한 나라다. 부자를 꿈꾸면서 한편으론 부자에게 손가락질한다. 부자들에 대해 나쁘게 생각하는 이유는 재산을 모으는 과정에서 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일 게다.

우리나라는 예부터 학문을 중시한 유교 사상으로 인해 부자에 대해 좋은 평가를 해 주지 않았다. 전래동화를 보더라도 부자는 심성이 고약하고 욕심이 많은 인물로 묘사된다. 끝도 없는 욕심을 부린 이들의 말로는 항상 벌을 받거나 화를 당해 잘못을 뉘우치는 모습으로 매듭지을 때가 많다.

<흥부전>에서도 욕심 부리다 쫄딱 망한 놀부와 베푸는 마음씨로 가난뱅이에서 부자가 되는 흥부가 등장한다. 이에 빗대 부자를 착한 흥부형 부자와 나쁜 놀부형 부자로 나눌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 한국의 흥부형 부자로는 누가 있을까.

이들은 정도(正道)를 걸으며 몸소 베풀고 자선을 통해 선을 실천한다. 평생 동안 모은 수억 원의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는 떡볶이 할머니나 김밥 아줌마도 그 중 하나다. 기업가와 경영인들이 모은 돈을 어떻게 쓰고 있는지에 관심을 모아야 한다.

우선 창업 초기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장애인과 어려운 불우이웃을 지원하고 장학사업을 통해 봉사를 펼쳐 온 김순진 놀부NBG 회장이 있다. 1989년 ‘놀부장학회’를 설립해 지난 20여 년간 매년 국내외 우수한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다.

2001년부터 ‘놀부 외식 논문 현상공모’를 열어 산학 교류를 활성화하는 등 인재를 육성하기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많은 학생들에게 배움의 터전을 조성해 주기 위해 2006년에는 숙명여대와 순천향대에 강의실을 기부했다.

또 회사 전 직원이 참여하는 ‘놀부사랑의 봉사단’을 만들어 수양부모협회 반찬 지원, 장애인문학지 지원, 사회복지시설 자원봉사 활동, 소년소녀 가장 돕기 등을 전개하고 있다.

‘길거리 노점 성공 신화’를 이뤄낸 김석봉 석봉토스트 대표도 흥부형 부자다. 토스트 차량으로 시작해 300여개 매장을 둔 ‘석봉토스트’ 프랜차이즈 사업으로 키워낸 김 대표의 역량도 대단하지만 더욱 눈길을 끄는 건 꾸준한 나눔 실천이다.

독거노인과 장애인복지관을 찾아 토스트를 구워주거나 점심을 제공하고 소외계층을 위한 인형극공연, 위문공연 등의 봉사를 꾸준히 이어오고 있는 것. IMF 시기에 직장을 잃고 자신보다 생계가 어려워진 사람들을 보며 도와야겠다는 마음을 먹은 게 봉사를 시작한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김 대표는 “얻어먹던 ‘거지 근성’을 없애려면 작지만 베푸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결심이 섰다”고 말했다.

탈세·편법, 사리사욕 놀부형 부자

소년원 출신 기업인으로 자수성가한 김인배 구룡종합건설 대표. 택시 운전, 연탄 배달 등을 하며 모은 돈으로 작은 건설회사를 세우고 연간 100억 원대의 매출을 올리는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어린 시절 친구들과 함께 라면 두 박스를 훔쳐 오토바이를 타고 도망친 일로 소년원에 처음 가게 됐단다. 김 대표는 “악착같이 돈을 버는 것도 좋지만 남의 가슴을 아프게 하면서까지 돈을 벌고 싶지 않다”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매일 누군가를 도와줄 수 있는 데서 오는 마음의 풍요로움에 감사하다는 마음을 갖는다”고 말했다.

놀부형 부자는 자기 배를 채우는 데만 급급한 유형이다. 개천에서 용 나듯이 갑자기 재산을 모아 졸부가 될 수는 있지만 개인의 사리사욕에 눈이 멀면 그 부는 오래 가지 못한다. 특히 교묘하게 법망을 피해 세금을 내지 않는 부자들이 많다. 이들을 무임승차자라는 뜻의 ‘프리 라이더’(Free Rider)라고 부른다. 국회의원이나 대기업 임원들이 무더기로 비자금 조성과 탈세 혐의로 조사를 받는 일은 부지기수다.

최근 탈세 의혹을 받고 있는 태광그룹의 사례도 그렇다. 검찰 조사에 따르면 이호진 태광그룹 회장은 태광산업의 제품을 편법으로 빼돌려 판매하는 등 회사 돈 424억여 원을 횡령한 혐의를 받고 있다. 횡령 배임 탈세 등을 통해 모두 1100억 원대의 부당 이익을 챙긴 혐의로 지난 19일 구속영장이 청구된 상태다.

이를 두고 40대 재벌이 몇 천억, 몇 백억 원씩 탈세하는 것이 정상적인 사회냐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철강업계 3위 회사인 동국제강도 해외거래가 많아 역외탈세를 뿌리 뽑겠다는 국세청의 세무조사 대상이 되고 있다.

또 남을 돕지는 못할망정 야구방망이로 사람을 때린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사촌동생 최철원씨 얘기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물류업체 M&M의 전 대표인 최씨는 SK가의 2세가 고용 승계 문제로 마찰을 빚은 탱크로리 기사에게 폭행을 가한 후, ‘매값’으로 2000만 원을 건네 물의를 일으켰다.

199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닷컴 열풍을 타고 떠오른 자수성가형 젊은 CEO들에게서도 놀부형 부자의 그림자를 발견할 수 있다. 장래가 촉망받던 벤처 졸부들은 갖가지 불공정 백태를 저지르며 하나둘씩 사라져갔다.

‘광고를 보면 현금을 준다’는 아이디어로 1세대 벤처 스타로 각광받던 골드뱅크 창업자인 김진호씨가 대표적이다. 회사 돈을 횡령한 혐의로 구속과 집행유예·고발을 당하는 과정에서 회사는 망하고 벤처업계에서 퇴출당했다.

부유층의 기부 활동을 평가할 때면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0개 회원국 중에서 꼴찌라고 한다. 정경유착, 탈세 등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한국 부자들의 ‘습관’ 탓이 커서일까.

부자들 탈세는 용납못할 사회악

‘이 세상에서 누구도 피할 수 없는 확실한 것은 죽음과 세금뿐이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 벤저민 프랭클린의 말이다. 다시 말해, 죽음과 세금만큼은 간절히 회피하고 싶다는 뜻이다. 탈세와 체납은 부자들에게 달콤한 유혹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기업들이 재산을 해외로 빼돌리고 탈세하는 것은 한마디로 범죄다.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20일 종합국감에서 탈세 방지를 위해 행정적·제도적 지원을 적극적으로 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세금 내는 것을 피하지 말고 정당하게 돈을 많이 벌고 세금도 많이 내자. 그것이 애국하는 길이고 기업인·부자들이 해야 할 일이다”

포브스가 발표한 ‘2010년 억만장자 순위’에서 세계 최고 부자로 선정된 워렌 버핏이 부시 행정부가 실시하려던 기업의 법인세와 상속세 감세를 반대하며 한 말이다. 세금을 잘 내는 것만으로도 나눔의 반은 벌써 실천한 것이다.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부자들이 부담했던 공공봉사 의무 ‘레이투르기아’(Leitourgia)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 볼 일이다.

전희진 기자 hsmile@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