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형 부자들 일자리 창출 최우선 순위… ‘기업도 시민사회 일원’ 깨우침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네. 그 누구의 애인인지 자꾸만 보고 싶네.’ 경쾌한 기타음과 함께 울려 퍼지는 시니컬한 목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신중현의 ‘자꾸만 보고 싶네’는 금지 가요 목록에 올랐다. 지난 1970년대, 대한민국은 푹푹 찌는 듯한 한여름 ‘복날’을 떠올리게 했다.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부는 경제에서 살길을 찾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벤처 캐피탈리스트’였다. 해외에서 자본을 끌어와 될 성 부른 떡잎들을 밀어주는 것이 그의 업무였다. 대한민국은 허허벌판이자 민둥산 격이었다. 근로기준법은 사문화된 법에 불과했다. 고고와 디스코장은 억눌린 욕망의 해방구였다.

최종현 선경(현 SK)그룹 회장에게 70년대는 뜻 깊은 시대였다. 선경산업 사장에 부임했다가 3년 후 선경그룹 회장의 지휘봉을 물려받은 그는 자사가 가야 할 길을 에너지에서 찾았다. ‘석유에서 섬유까지’가 이 회사가 지향하는 ‘사업 포트폴리오’였다.

‘닭표 안감’으로 유명하던 직물 회사는 최 회장 부임 후 ‘환골탈퇴(換骨脫退)’한다. 직물회사(선경직물)는 섬유그룹으로 성장하고, 섬유그룹은 다시 정유로, 정유는 이동통신 회사로 화려한 변신을 거듭한다. 5대 그룹으로 성장한 재벌그룹 창업자들은 선견지명의 소유자들이었다.

그들은 맨손으로 한강의 기적을 만든 ‘해리 포터’였다. 정주영 현대건설 회장은 바지선에 대형 철골 구조물을 싣고 바다 건너 사우디로 실어 날랐다. 사우디 주베일 항만 공사를 공사기한 내에 성공시키기 위한 도박이었다.

경부고속도로 공사도 군사작전을 방불케 했다. 터널을 뚫다가 목숨을 잃는 근로자들도 속출했다. 1976년, 정주영 회장은 처음으로 국산자동차 ‘포니’를 생산한다.

섬유봉제 부자 김우중은 경쟁자에 비해 늦게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가 대우실업 주식회사를 세운 것이 67년. 이때는 대표적인 재벌들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난 이후였다. 김씨는 기업 인수합병으로 후발주자의 한계를 벗어났다. 후발주자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창업형 부자들은 기업가 정신이 투철한 도전자들이었다. 정치가들과 담판을 지어야 했으며, 세계 시장을 파고들어야 했다. 그런 그들에게 최고의 사회공헌은 일자리 창출이었다. ‘기업도 시민사회의 일원이다.’ 지금은 상식이 된 사회공헌의 기본 원리를 받아들이기에는 시장 환경이 척박했다.

YH 농성 사건은 부자들에게도 충격을 준 사건이었다. 열악한 처우에 항의해 신민당 당사를 항의 점거한 가발회사 YH무역의 여공은 경찰이 급습하자 당사 밖으로 뛰어 내리다 사망했다.

머릿결이 좋기로 소문난 한국 여성들의 머리를 재료로 만든 가발은 미국을 비롯한 해외시장에서 불티나게 팔리는 인기상품이었다. 여공들의 ‘반란’은 박정희 시대의 종언을 예고하는 경천동지할 사건이었다.


70~80년대 ‘사회공헌의 암흑기’

80년대는 흉흉한 소문으로 장을 열었다. 상갓집에서 만난 군사정부의 실세에게 멱살잡이를 당한 노(老) 경영자의 수모가 두고두고 회자됐다. 스크린에서는 애마부인이 관음증을 자극했고, 가수 이용이 국풍 81 행사의 히어로로 떠올랐다. 전두환 정부는 중복산업 정리에 공을 들였다.

박 대통령이 벌여놓은 좌판에서 중복되는 물건들을 치운 주인공이 바로 전두환 대통령이었다. 이 작업을 진두지휘한 지휘자가 김재익 경제수석. 경제수석 김재익의 작품인 ‘경제 자율화, 안정화’는 5공화국 최대의 치적이었다.

국제그룹 양정모 회장은 5공화국 집권의 최대 피해자였다. 그는 그룹이 공중 분해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이 사건이 부자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는 명확했다. 변화의 격류는 거셌다. 5공 정부는 시민단체, 노조 등에 철권통치를 유지하며, 부의 확대 재생산을 측면 지원했다. 사회공헌의 암흑기였다.

김우중 대우 그룹 회장, 이병철 삼성 그룹 회장은 이 시대를 이끌어간 쌍두마차였다. 김우중 회장은 세계 경영의 기치를 높이 들고 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럽으로 활동 무대를 넓혀갔다. 그의 세계 경영은 시대를 앞선 결단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한계도 뚜렷했다. 상생과 나눔은 적어도 그의 사전에는 없었다.

대한민국 최고의 부자인 이병철 회장은 반도체 사업에 진출한다. 삼성의 초일류 기업 도약을 부른 결정적인 한 수였다. 사업보국의 기치를 높이 든 그는 안양 컨츄리 클럽을 인수하고, 프로 골퍼도 스카우트한다. 이철희, 장영자 부부는 5공화국을 뒤흔든 졸부형 부자들이었다.

명동 사채시장의 큰 손이던 이들 부부는 자금난에 허덕이는 기업들에 현금을 빌려주고, 그 대가로 어음을 받아 이중 6000억 원 이상을 할인해 사용했다. 어음 폭탄을 맞은 일신제강, 공영토건이 순식간에 무너지며 이 사건은 5공 최대의 권력형 비리 사건으로 정권을 내내 괴롭힌다.

부자들은 80년대 철권통치를 묵묵히 견뎌야 했다. 사회공헌은 여전히 일자리 창출을 뜻했다. 3당 합당은 90년대의 개막을 알린 ‘초인종’이었다. 거대 여당인 민자당이 출범하면서 정치권은 격랑에 휩싸였다. 호랑이 굴로 제 발로 들어간 김영삼 민자당 대통령 후보는 정주영, 김대중 후보를 물리치고 대통령에 당선된다. 그는 금융실명제를 실시하며 부자들을 압박한다.

1세대 오너들 ‘사업보국’이 사회공헌

문민정부 시절 급성장한 부자가 한보그룹 정태수 회장이었다. 하급 세무공무원 출신이던 정 회장은 무일푼에서 출발해 한보라는 거대그룹을 만들어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천문학적인 정치자금이 도약의 디딤돌이었다. 문민정부의 몰락은 한보 거액 대출 비리 사건에서 출발했다.

‘종업원은 머슴에 불과하다.’ 정태수 회장이 청문회에서 던진 발언은 자수성가한 부자들이 근로자를 바라보는 시각을 가늠하는 창이었다. 97년 외환 위기는 대한민국 부자들의 운명을 뒤바꾸어 놓은 ‘변곡점’이었다. 봉고 신화의 주역 김선홍 기아그룹 회장, 장진호 진로그룹 회장, 한보 정태수 회장 등이 휩쓸려 떠내려갔다.

부자들은 나라 경제를 파탄 낸 장본인으로 손가락질을 받았다. 이러한 비판을 정면돌파한 주인공이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었다. 김영삼 대통령 집권기는 그에게 암흑의 세월이었다. 산업은행 대출이 꽉 막히며 옴짝달싹 할 수 없던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북한에서 재도약의 길을 찾는다.

1998년 6월16일, 그는 서산 농장에서 키운 소떼 500마리를 몰고 북한을 방문하면서 남북관계 개선의 한 획을 긋는다. 또 현대그룹의 수익 기반을 한반도 북쪽으로 넓히는데 성공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그의 소떼 방북을 신호탄으로 남북한 화해협력의 인프라가 급속히 확대된다.

개성공단, 금강산 관광을 비롯한 남북한 화해 협력의 첫 단추를 채운 인물이 바로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었다. 정 회장은 부자들의 사회공헌 역사에도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경영자였다.

90년대 벤처갑부 ‘졸부 행태로 물 흐려’

1998년, 벤처 졸부들은 하룻밤에 1000만 원이 넘는 술판을 벌였다. 주식으로 정치권이나 언론사 기자들을 치정극에 얽어매었다. 이러한 치정극의 백미(白米)가 바로 벤처 부자 윤태식이었다. 그는 자신의 부인 수지 김을 살해한 뒤 그녀를 북한의 간첩으로 몰고 갔다. 윤씨는 벤처 바람을 등에 업고 날아올랐다.

유망 사업가로 스스로를 포장하며, 김대중 대통령까지 접견하는 등 승승장구하던 그는 돈과 권력을 향해 불나방처럼 날아드는 파렴치한이었다. 정현준, 진승현을 비롯한 벤처 부자들은 줄줄이 쇠고랑을 찼다. 유명 여배우에게 최고급 승용차를 선물하는 벤처 갑부의 행태가 세인들의 입방아에 올랐다.

벤처 바람은 대한민국에 치유하기 어려운 ‘상흔(傷痕)’을 남겼다. 기업가 정신도 뒷걸음 치고, 나눔과 상생의 정신도 실종된 암흑기였다. 2000년, 밀레니엄 세기의 개막은 이러한 기류에도 일대 전환을 알린다. 태평양 건너 미국에서 부는 변화의 바람은 기업 시민사회의 도래를 예고한다. 변화의 발단은 2002년 미국 기업인들을 둘러싼 추문.

에너지 기업 엔론, 통신기업 월드콤이 회계 장부에 분칠을 하고, 실적을 부풀려 투자자들에게 막대한 손해를 안겼다.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는 미국인들의 지구 온난화 불감증에 경종을 울린 신호탄이었다.

글로벌 기업들은 이때를 전후해 자사의 비즈니스 모델에 대수술을 감행하며 변화에 대응한다. 사회공헌은 대한민국 부자들에게도 생존의 문제로 부상한다. 일자리 창출이 사회공헌이라는 말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기에는 사태가 심상치 않았다.

사회공헌서도 새로운 富 창출

지난 2006년 겨울, 최태원 SK회장은 달동네에서 연탄을 실어 나르는 등 불우이웃들을 위한 사회공헌 활동에 나섰다. 그는 또 올림픽 후보지인 강원도 평창에 임직원들과 내려가 손수 김장 김치까지 담갔다. 대기업 총수들이 직접 김치를 담그거나 배식을 하는 것은 흔한 풍경이 됐다.

이들 뿐만이 아니다. 삼성그룹은 임원 부인들이 삼성의료원에서 사회 봉사를 한다. 남편의 성명이나 직급을 밝히지 않는 것이 관례다. 고되고 힘든 병원 업무는 초일류기업에 다니는 잘 나가는 남편을 둔 부인들에게 버겁다. 대한민국 부자들은 나눔과 상생의 철학을 임직원은 물론 그 가족들과도 공유하고 있다.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을 비롯한 재벌가 3세 경영자들도 사회공헌에 적극적이다. 전략이론의 대가인 마이클 포터의 이론을 받아들여, 기왕이면 전략적 사회공헌을 추진하자는 목소리도 세를 얻고 있다. 전략적이라는 단어가 고상해 보이지만 그 의미는 명확하다.

사회공헌 활동이 되돌릴 수도 거스를 수도 없는 대세라면, 돈을 쓰더라도 가급적 이윤 창출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가자는 것이다. 일본의 도요타나 미국의 제너럴일렉트릭이 귀감이다. 지난해 베스트 셀링카 캠리로 미국 내 실지를 회복한 도요타는 프리우스로 꿩도 잡고 알도 챙기고 있다.

‘사회공헌’과 ‘이윤추구’. 이 두 마리 토끼를 한 번에 잡는 노하우가 요즘 대한민국 부자들의 고민이다. 기업의 사회공헌 전략을 다룬 라는 책이 화제가 되고 있는 배경이다.

박영환 기자 yunghp@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