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박사는 루게릭병으로 말을 못한다. 대신에 인텔이 제공한 말하는 컴퓨터 장치를 조작해서 기계 음성으로 대화를 이어간다. 최근에는 컴퓨터의 음성도 비교적 사람과 유사하게 발음할 수 있지만, 호킹 박사는 그걸 사절하고 기계음을 자신의 상징적 음색으로 활용하고 있다. 최근 BBC와의 인터뷰 중에 기자가 “최신 인공지능을 이용한 소통장치로 개선해보면 어떻겠냐”는 질문을 던지자 그는 답변 중에 인공지능의 위험성에 대해 언급했다. “완전한 인공지능의 개발은 인류의 종말을 점치게 한다. 지금까지의 초기 인공지능 기술은 유용성을 충분히 입증했지만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인공지능이 등장할 가능성에 두려움을 느낀다.” 그리고 “인간은 생물학적 진화가 느려서 기계지능의 발전에 대적할 수 없고 결국은 추월당하게 될 것 같다”고 근거를 말했다.

인공지능에 대한 그의 생각이 상당한 반향을 일으키면서 테슬라 모터스의 이안 머스크와 마이크로 소프트의 빌 게이츠도 잇달아 인공지능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나섰다. 국내 학자 중에서도 두뇌 전문가로 알려진 김대식 박사가 최근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비슷한 경고를 하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인공지능의 확산으로 사람의 일자리가 점차 사라질 것이란 두려움을 갖는 일반인들은 이런 유명 인사나 학자들의 경고를 설득력 있게 받아들인다. 초월적 인공지능으로 무장한 로봇들이 인간을 말살시키고 기계들의 세상을 만들어 갈 것이라는 영화 <매트릭스>나 <터미네이터>적 시나리오가 득세하게 된다. 만약 인공지능이나 로봇이 최종적으로 인간을 해치게 된다면 그런 기술은 더 이상 발달하지 않도록 미리 싹을 잘라야 한다는 감정적 대응을 유발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조심스럽다.

인간의 본능을 인공적으로 재현?

인공지능을 다룬 영화들도 유토피아적 관점보다 디스토피아적인 관점이 대부분이다. 인체를 복제해 대량생산하고 지능을 다운로드한다든지, 초월적 힘을 가진 로봇들이 인간을 말살시킨다는 관점들이다. 그런데 최근에 개봉한 영화 <엑스 마키나>는 미모의 인조인간을 등장시켜 새로운 차원의 질문을 던지고 있다. 과연 인간이 만든 로봇이나 인공지능이 ‘인간의 감성적 본능을 재현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영화에 등장하는 ‘에이바’는 인체의 몸을 그대로 재현한 기계장치다. 다만, 사람과 구분하기 위해서 몸의 일부분을 기계로 들어내 놓고 과시한다. ‘에이바’를 제작한 극중 인물인 ‘나탄’은 천재적인 로봇과 인공지능 개발자이며 인터넷검색 사업으로 엄청나게 돈을 번 갑부다. 그는 외딴 산골에 설치한 연구실에서 혼자 살면서 인조인간을 개발 중이다. 그 인조인간의 성능을 검증하기 위해 자신이 운영하는 회사에서 가장 유능한 컴퓨터 프로그래머인 ‘칼렙’을 선발해 연구시설로 초청한다. 그리고 그에게 자신이 개발한 로봇이 사람과 구분될 수 없을 만큼 지적인 능력을 갖췄는지 판별하는 실험을 함께 해줄 것을 제안한다. 호기심에 제의를 수락한 주인공 ‘칼렙’은 인조인간 ‘에이바’의 섬세한 표정과 화술에 그만 반하고 만다. 영화에 등장하는 또 다른 미모의 인조인간은 말은 못하지만 개발자 ‘나탄’의 섹스 시중까지 한다. 신체 구조상 완벽하게 만들 수 있지만 인공지능의 최종 단계인 의식 면에서도 과연 인간을 대신할 만큼 완벽한지를 가늠한다는 것이 이 영화의 줄거리다. 인간의 감성과 본능을 본뜬 인조인간이 가능할 수 있다는 설정이 <엑스 마키나>가 그간 인공지능을 다루어 왔던 다른 작품들과 차별화되는 점이다. 사실 로봇이 인간보다 더 똑똑하다는 설정은 흔한 이야기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면서 오싹함을 느끼는 이유는 로봇인간 ‘에이바’가 인간의 본능적인 생존의식과 대항능력을 그대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관객을 혼란에 빠뜨리기 충분할 만큼 잘 만들었다.

‘칼렙’과 ‘에이바’의 대화 장면은 지극히 솔직하고 꾸밈없이 서로를 드러내 놓고 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놀랍고 두렵게 느껴진다. 과연 ‘인조인간이 저 정도의 의식을 발현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계속해서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숨죽이게 하는 재미가 있는 반면에 가슴이 답답한 긴장감도 안겨준다. 특히, ‘에이바’의 섬세한 동작, 이를테면 걸음걸이나 서 있는 자세, 스타킹을 끌어 올리는 장면 등은 ‘칼렙’에게 상대가 로봇이란 사실을 망각시킬 정도로 충분히 매혹적이다. 급기야 그녀가 그에게 성적인 관심이 있냐고 유혹하는 질문을 던지자 ‘칼렙’은 혼란에 빠진다.

‘에이바’는 상대방의 이야기만 듣지 않고 사람처럼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의 내용은 자의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이를테면 “만약 내가 이번 테스트에서 사람만큼의 의식수준에 도달하지 못한다고 판단되면 어떻게 되나요?” 또는 “왜 인간은 잘못해도 괜찮은데 로봇은 잘못하면 없애야 하나요?”와 같은 질문이다. 영화 제목 <엑스 마키나>가 ‘예전엔 기계장치’란 의미에서 암시하듯 이 영화는 이미 ‘인조인간이 기계가 아니라’는 설정을 해 놓고 시나리오를 작성한 것이다. 도저히 인간이 아니고서는 제기할 수 없는 질문들을 쏟아낸다. 로봇이 목적을 정하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서 거짓말도 하고 표정을 감추기도 한다. ‘칼렙’에게 “‘나탄’을 믿지 마라. 그는 너에게 거짓말을 한다”고 회유하기도 한다. 똑똑하다고 모두가 믿었던 ‘칼렙’은 가엾게도 인조인간의 지략에 속아 넘어간다는 게 밑 줄거리다. ‘에이바’의 말과 행동은 사람과 똑같다.

 

인공지능은 사람의 작품이다

인공지능은 사람이 만든 소프트웨어다. 아직 소프트웨어가 스스로 로직을 진화시킨다는 근거는 없다. 다만, 데이터는 학습을 통해 가다듬을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소프트웨어의 골격은 인간의 아이디어에 의존한다. 인간이 수정해주지 않으면 바뀌지 않는다. 그 소프트웨어가 작동하는 컴퓨터도 인간의 작품이다. 인간이 바꿔주지 않으면 스스로 하드웨어를 업그레이드하지 못한다. 로봇이 컴퓨터를 설계하고 제작한다는 설정은 몽상가의 몫이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은 사람이 정해준 틀 속에서 진화한다고 봐야 한다. 경계가 분명하다. 그 경계를 소프트웨어가 스스로의 힘으로 넘어설 수는 없다. 물론 최근 인공지능이 상당한 수준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영화 속 설정처럼 만능 인공지능(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을 갖는다는 가정은 너무 인간의 능력을 과대평가한 것이다. 인간은 ‘도대체 인간의 의식이 어디서 나오고 그것이 어떤 것인지’ 아직도 알지 못한다. 앞으로도 쉽게 알아내지 못할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사람처럼 알아서 닥치는 일을 처리할 수 있는 만능인공지능은 요원하다. 인공지능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보지 않는 이유다. 기계는 할 일을 미리 정해줘야만 한다. 같은 청소작업이라도 마당 청소기와 방 청소기를 구분해서 기능을 정해준다. 식당에서 설거지할 기계와 도서관에서 서가 정리를 맡을 기계의 전문성이 따로 있다. 따로 학습을 시키거나 소프트웨어를 맞춰줘야만 한다.

지능과 의식은 다른 영역으로 의식은 상당 부분 본능적인 작용을 수반한다. 공부한다고 늘어나는 것이 아니다. 생명이 위험하다고 느끼고 피하는 거나 성적으로 상대방의 사랑을 느끼고 섹스를 원하는 건 매뉴얼로 가르쳐 줄 수 없다. 기계가 자율학습한다고 만들어지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생명이 태어나면서 느끼는 희·노·애·락의 감정을 인간이 무슨 능력으로 기준을 세워준다는 말인가? 그것은 본능적으로 타고나는 감정이다. 영화 <엑스 마키나>의 작가는 인간이 태어나면서 갖는 본능적 욕구와 학습을 통해 터득하는 지능을 혼돈하고 있다. 상당수의 학자들과 명망가들도 인공지능을 말할 때 의식을 거론하는데 인공적으로 의식의 패턴을 창조한다는 꿈은 헛된 짓이라고 비평하는 전문가들이 더 많다.

특이점은 널려있다

기계의 학습속도가 인간의 학습속도보다 빨라서 지식이 높아지는 현상은 지금도 부분적으로는 경험하는 일이다. 인간은 개념을 이해하고 인공지능은 실무적으로 일을 처리한다. 인간은 답이 맞았는지 확인하고 기계는 문제를 직접 풀어서 답을 빨리 구하는 일을 한다. 인간은 답을 활용하는 일을 하면 된다. 기계가 답을 활용해서 다른 일을 하지는 않는다. 인간과 기계가 같은 일을 하면서 속도경쟁을 할 필요는 없다. 기계가 일을 자동으로 처리할 수 있다면 그 일은 기계에 맡기고 인간은 다른 일을 해야 한다.

흔히 기계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현상을 ‘특이점’이라고 말하는데, ‘무엇을 할 때 기계가 사람보다 더 나아지는가’를 살펴봐야 한다. 예를 들어 수학문제 푸는 속도는 이미 기계가 빠르다. 그걸 비교하면 특이점은 이미 지났다. 두뇌의 기억저장 용량을 말한다면 그것 역시 머지않아 기계가 능가할 수 있다. 사물을 이해하는 능력이라고 말한다면 아직은 사람이 우수하다. 만약 사람이 어떤 개념을 새롭게 이해하는 능력이 기계보다 뒤처지는 일이 발생한다면 그것은 사람의 판단력이 기계보다 못하다는 의미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이해하고자 하는 대상이 무엇인지가 더 중요하다. 중요한 대상은 ‘가치’라고 본다. 가치판단능력이 누가 더 우수한가를 비교해 봐야만 한다. 그런데 가치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다. 객관적인 기준이 없다. 그걸 기계가 더 잘 판단하는지를 가늠할 기준은 없다. 각자가 좋아하는 가수가 있고 장르가 다르다는 의미다. 인공지능은 우수할수록 사람에게 더욱 힘이 될 뿐이지 경쟁의 대상이 아니다. 한마디 덧붙인다면 영화 속에 나오는 인공두뇌는 밑도 끝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