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말부터 근대 초의 유럽인들이 후추를 그처럼 즐기지 않았거나 쉽게 구할 수 있었더라면 세계사의 흐름은 꽤 달라지지 않았을까?

오늘날 중동지역의 전쟁이 석유전쟁이라면 중세 말부터 근대 초까지 이어진 여러 전쟁은 향료전쟁이었다. 유럽 인들은 일찍부터 후추와 육계 같은 동방의 향료에 크게 의지해야 했다. 왜냐하면 당시의 농업기술로는 대부분 땅이 경작에 적절치 않아 대개 소나 양 같은 가축을 길러 고기를 먹었고, 따라서 포도주는 물론 후추 같은 독특한 양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겨울철에는 사료가 크게 부족해 종자가축 외에는 한꺼번에 도살할 수밖에 없었고(19세기까지 그런 소나기 도살이 행해졌다) 당연 히 많은 양의 고기를 장기간 갈무리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유럽인들은 우리처럼 가축의 피와 내장도 먹었 는데 그것들을 상하지 않게 보관하기는 더욱 어려웠다.

후추는 고기의 독을 없애고 맛을 더해줌은 물론 갈무리 에도 아주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후추는 포도주와 달리 유럽산이 아니라 먼 동방에서 수입한 것이라 아주 비싼 값에 거래되었다. 풍랑이나 해적 혹은 다른 장애로 교역 이 순조롭지 못할 경우 후추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그럴 땐 후추 낱알을 밀폐된 실내에서 핀셋으로 하나하나 집어서 다룰 정도였다.

미라 가루가 그랬듯이 최음제로도 사용된 후추는 때론 화폐 역할도 했다. 그리하여 후추는 양모, 모직물, 포도주와 더불어 중세 말~근대 초의 가장 중요한 교역상품이었고 후추 중개무역은 당연히 큰돈을 버는 업이 되었다. 당시 후추와 같은 동방산 향료가 유럽 소비자에 이르기까지 흔히 12단계를 거쳤는데, 각 단계의 상인들 모두 큰 돈을 벌었다고 한다. 아랍인들이 원산지의 한 곳인 몰루카 제도에서 공짜나 다름없는 헐값에 구입한 후추는 그처럼 여러 단계를 거치면서 원산지 가격의 수십 배로 뛰었다.

후추 중개무역을 주도한 자들은 제노바와 베네치아 등 이탈리아 상인들이었다. 그들은 알렉산드리아를 비롯해 동지중해의 항구들을 왕래하면서 아랍인들이 몰루카 제도를 비롯한 동남아시아에서 구해 온 향료를 사서 유럽으로 실어갔다. 이 중개무역상들은 때론 이슬람 제국, 셀주크 튀르크, 오스만 제국의 술탄들과 지중해 해적들 에게 목숨을 잃거나 상품을 뺏기는 등 곤경에 처하기도 했지만 굴하지 않고 동방물산을 거의 독점적으로 거래해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후추는 전후 8회에 걸쳐 200여 년간 지속된 십자군전쟁을 일으키기는 데도 큰 몫을 했다. 명목상 십자군운동은 셀주크 튀르크로부터 예루살렘의 기독교도들을 구하고 성지순례의 길을 열기 위한 것이었지만, 셀주크 튀르크 의 방해로 어려워진 후추 교역을 원활히 하려는 것도 중요한 동기였다. 과도한 후추 기호(嗜好)와 높은 가격이 유럽 기독교도들을 동방으로 몰려가게 했던 것이다. 당시엔 기독교 성직자들도 후추를 갖기 위해서 기꺼이 금고를 열었지만 제1회 십자군 원정 때 2만여 명의 농민십자군을 사지로 이끈 은자 피에르도 후추 때문에 나섰다는 설도 있다.

어느 날 300여 명의 매춘부들이 십자군과 함께 중동의 한 항구에 상륙했는데, 다름이 아니라 화대로 후추를 구입해 가기 위해서였다. 십자군을 따라 중동에 간 일부 상인들은 적군에게 무기를 팔고 그 돈으로 후추를 사서 거금을 벌기도 했다. 한편 십자군전쟁에 참전한 영주나 기사 중에는 후추 교역에 손댔다가 파산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근대 초에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대양 진출을 자극한 것도 후추와 같은 향료와 황금이었다. 이탈리아 중개상을 제치고 동방물산을 직수입하려 한 포르투갈의 바르톨로 뮤 디아스가 1488년 초에 아프리카의 희망봉에 도달했고 바스코 다 가마는 주지하듯이 1498년 5월에 희망봉을 경유해 인도에 도달했다. 그 후 수차례 인도를 왕래 했던 다 가마는 그때마다 다량의 향료를 거래해 최고 60 배에 가까운 이윤을 남겼지만 이후 포르투갈 상선들이 자주 인도를 왕래하면서 후추를 비롯한 동방물산의 가격은 1/2로 하락했다.

콜럼버스가 목숨을 걸고 대서양 항해를 감행한 것도 인도 직항로를 개척하기 위해서였다. 포르투갈처럼 동방 물산을 직수입하는 길을 열려던 스페인의 이사벨라 여왕과 인도 직항로를 열 수 있다고 믿은 콜럼버스의 합작품이 1492년의 대서양 항해였다. 포르투갈이 인도 직항로를 연 지 20년도 안 된 1504년경의 리스본에서는 이 전 가격의 1/5로 후추를 구입할 수 있었다니 인도 항로 에 대한 갈망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콜럼버스는 4차례나 항해하면서 서인도제도는 물론 베네수엘라까지 탐험했지만, 그곳이 인도가 아니라는 것을 죽을 때(1506년)까지 알지 못했다. 후추와 황금은 커녕 담배와 신대륙 풍토병인 매독만 가져온 콜럼버스는 스페인 국왕의 미움을 사서 결국 불운하게 생을 마감 했다. 주지하듯이 1497년부터 1503년까지 4회에 걸쳐 신대륙을 탐험한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그곳이 신대륙임을 밝혀냈다. 마젤란 역시 아시아 향료 제도로 가는 서쪽 항로를 찾으려던 스페인 왕 카를로스 1세(신성로마 황제 칼 5세)의 지원을 받아 1519년 9월에 세빌라에서 출항했다. 몰루카 제도에 양질의 향료가 많다는 것을 안 마젤란이 스페인의 카를로스 1세를 설득했던 것이다. 그는 길고 험난한 항해 끝에 필리핀을 거처 몰루카로 가던 중 원주민 에게 살해당했지만 그의 선단 중의 빅토리아호는 향료를 가득 싣고 희망봉을 돌아 1522년 9월에 카디스항에 도착 했다.

유럽인들이 후추를 그처럼 좋아하지 않았거나 후추가 귀하지 않았다면 인류사는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전개 되었을 것이다. 우선 십자군운동도 일어나지 않았거나 일어났더라도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인도 항로와 대서양 항로의 개척도 뒤로 미루어졌을 것이고, 그럴 경우 제국주의 유럽 각국의 아프리카, 아시아, 아메리카로의 진출 또한 적어도 근대 초에는 그렇게 활발 하게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글:진원숙 계명대학교 연금 수급자

 

 

 

 

 

 

 

이 기사는 사학연금공단 사보 '사학연금' 1월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