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리적인 것’이 여럿 모이면 더 큰 ‘합리적인 것’이 될까.

대개는 그러할 것이나 종종 그렇지 않은 일도 생긴다. 초등학교 가을 운동회 때 씨름판을 둘러보면 안다. 씨름선수들이 치열하게 샅바 다툼을 할 때면 어김없이 관중석에서도 자리다툼이 벌어진다. 앞사람이 일어서면 뒷사람들도 일어나 까치발을 하거나 앞사람을 밀며 시야 확보 경쟁을 한다. 각자가 경기를 잘 보려고 하는 행동이지만, 결국 모두가 경기관람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이 빚어진다. 이른바 ‘구성의 모순’(fallacy of composition)이다.

지금의 한국경제도 대내적으로는 ‘구성의 모순’에 빠져 있다. 불투명한 미래에 대비하는 데는 개인이든 기업이든 절약과 저축이 최선이다. 하지만 모든 국민이 소비를 줄여 돈을 아끼다 보니 물건이 팔리지 않아 재고가 쌓인다. 기업의 입장에서도 글로벌 경기침체로 수출길이 좁아진 데다가 내수가 부진하니 허리띠를 졸라맬 도리밖에 없다. 최대한 인력 감축, 신규고용 억제 등 비용절감에 나서고 설비투자를 미루는 선택은 합리적인 기업운영 방식이다. 하지만 이 같은 소비부진과 투자감소는 국민소득을 줄이고 경제 전반을 침체의 늪에 빠뜨리고 있다.

물론, 경기침체가 대내적 요인 탓만은 아니다. 수출의존도가 높은 상황에서 한국경제의 대외여건이 열악해지기도 했다. 미국을 제외하고 선진국 대부분이 경기침체를 걱정할 정도가 됐다. 탄탄한 성장기반을 구축한 독일도 예외가 아니다. 중국도 조만간 내년도 성장률 목표치를 낮출 것이란 보도가 나온다. 유가급락세로 러시아는 갑작스러운 경제위기를 맞고 있고, 금리인상을 앞둔 미국으로 돈이 쏠리면서 신흥국들도 졸지에 통화가치가 급락하는 통화위기에 직면해 있다.

해법은 우선순위를 정한 다음 그 중에서 선택하여 집중하는 것이다. 선진국 경기가 동반 침체되고 국제금융시장이 요동치는 불리한 외부여건을 우리 힘으로 역전시킬 수는 없는 일이다. 정부와 기업이 경각심을 갖고 대응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러나 경기침체의 내부요인, 즉 소비위축과 투자감소에 대해서는 정부와 기업이 손 쓸 여지가 적지 않다. 그러므로 이 부분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케인즈의 주장에 비춰보면 한국경제가 내부적으로 겪고 있는 상황은 ‘구성의 모순’ 가운데서도 ‘절약의 역설’(paradox of thrift)에 해당한다. 케인즈는 이런 경우 강력한 수요진작책을 해법으로 제시한 바 있다. 최경환 경제팀도 케인즈식 수요진작책을 추진 중이다. 정부는 지난 7월 이후 금리를 내리고 부동산 규제를 풀었다. 하지만 정책에 대한 저항이 갈수록 거세다. 효과가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민간 소비는 아직 살아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기업의 설비투자는 지난 3분기에 전분기 대비 마이너스로 돌아선 상태다. 이를 반영한 듯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내년 경제성장률 전망을 기존의 3.8%에서 3.5%로 낮췄다. KDI 수정치는 정부의 4.0%, 한국은행의 3.9%보다 크게 낮다.

하지만 비관하긴 이르다. 경제는 정책이 시장에서 반영될 때까지 상당한 시차가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속도보다는 방향이 중요한데 지금의 정책방향은 옳다. 케인즈식 경기침체 탈출법은 수요진작과 구조개혁의 병행을 골자로 한다. 최경환 경제팀 역시 구조개혁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내년에는 수요진작에 그치지 않고 불필요한 규제의 혁파를 비롯해 공공부문·금융·노동·교육 등 핵심분야의 구조개혁을 본격화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이 같은 내용은 정부의 ‘2015년 경제정책방향’에도 담길 것으로 보인다.

통화주의 대부인 밀튼 프리드먼은 ‘샤워실의 바보(A fool in the shower room)’라는 비유를 든 적이 있다. “샤워실에서 갑자기 물을 틀면 찬물이 나온다. 이를 못 참고 더운물 쪽으로 수도꼭지를 돌렸다가 뜨거운 물이 나오자 놀라서 수도꼭지를 다시 찬물로 돌리며, 결국 물만 낭비한 채 샤워도 제대로 못 하는 바보가 있다.” 정부의 어설픈 시장경제개입을 비판하는 내용이다. 갈팡질팡하며 일을 망치느니 차라리 경제를 방치해두는게 낫다는 뜻이다.

하지만 안팎의 위기, 장기침체의 위기를 감안하면 정부의 강력한 개입은 마땅한 일이다. 미국의 경제위기도 양적완화와 같은 강력한 정부개입이 없었다면 돌이키기 힘든 지경으로 몰렸을 것이 분명하다. 지금은 최경환경제팀이 기존의 정책기조를 견고히 유지하면서, 조급함과 외부저항에 휘둘려 '샤워실의 바보'가 되지 않도록 스스로 경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코노믹리뷰 편집인. 숙명여대 글로벌서비스학부 객원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