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8일 삼성그룹이 단행한 ‘2011년도 임원인사’의 키워드는 ‘파격’이었다. 30대와 여성, 외국인 인재가 전면에 부각된 것.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양상이었다. 그 중에서도 삼성그룹 역사상 처음으로 비(非) 오너가(家) 30대 임원이 3명이나 탄생한 것은 특히 이례적이었다.

이는 최근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강조하고 있는 ‘젊은 리더론’과 무관치 않다. 삼성은 “젊은 조직으로의 변화가 불가피하다는 판단에 따라 향후 10년을 이끌 참신하고 유능한 젊은 리더를 과감히 발탁해 경영 전면에 등장시켰다”고 파격 인사의 배경을 밝혔다.

삼성의 30대 임원은 삼성전자에서 나왔다. 양준호 수석과 문성우 부장, 이민혁 수석 등이 그 주인공이다

디자인, 물류 시스템 분야서 큰 기여

재벌가 자녀가 30대에 임원에 오르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재벌닷컴이 지난해 12월 현직 임원으로 재직 중인 30대 그룹의 총수 직계 자녀 51명(아들 34명, 딸 10명, 사위 7명)의 승진 현황을 조사한 결과, 상무보(이사대우) 이상의 임원급으로 선임된 나이는 평균 31.8세였다.

이들이 사원으로 회사에 입사한 나이는 평균 28세. 입사 후 3.8년 만에 임원으로 ‘초고속’ 승진한 셈이다. 그러나 오너가 출신이 아닌 이상 30대의 젊은 나이에 임원이 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외부 영입이 아닌 내부 승진의 경우엔 더욱 더 ‘하늘의 별 따기’다. 지난해 3월 취업 포털 사이트 인크루트와 시장조사기관 이지서베이가 조사한 통계에 따르면 평사원이 임원으로 승진하는 데엔 무려 20년이 걸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입사 후 내부 승진만으로 이번에 임원의 자리에 오른 삼성전자의 젊은 리더 3인방에 특히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단시간 내 ‘직장인의 별’이 될 수 있었던 그들만의 비밀병기는 무엇일까.

VD(영상디스플레이) 사업부 디자인 그룹의 양준호 수석은 삼성 TV제품의 디자인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린 데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39세의 나이에 상무로 승진했다. 그는 2006년 보르도 TV를 시작으로 2010년 3D LED TV까지 혁신적 디자인을 주도하며 경영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얻고 있다.

양 수석과 동갑인 경영지원실 경영혁신팀의 문성우 부장은 카이스트 산업공학 박사 출신이다. 공급망관리(SCM) 및 유통관련 전문지식을 바탕으로 전사물류 프로세스와 시스템을 혁신하고 물류체계 구축에 기여한 공로를 높이 평가받았다.

이번 인사에서 최연소 상무 승진자로 이름을 올린 무선사업부 디자인그룹의 이민혁 수석(1972년생)은 2010년 세계적으로 히트한 갤럭시S를 비롯해 스마트폰 디자인 부문에서 탁월한 성과를 인정받았다.

블루블랙폰과 벤츠폰 등 수많은 히트상품을 디자인하며 삼성전자 휴대전화 디자인그룹의 차세대 핵심 디자이너로 주목받고 있는 그는 갤럭시S의 성공에 공헌한 바가 크다는 게 회사 측의 설명이다. 이번에 이 수석은 차장급에서 임원으로 4년을 한 번에 뛰어넘는 파격 승진을 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쉽게 찾을 수 있다. 회사의 실적을 크게 끌어올리는 핵심 사업 부문이나 경영 혁신 분야에서 역량을 발휘, 탁월한 업적과 성과를 남겼다는 것이다. 특히 양준호, 이민혁 수석의 경우 국내 대학 학부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했을 뿐 해외 유학파나 석박사 출신이 아니라는 점에서 철저히 능력과 업무 성과를 인정받은 케이스라 할 수 있다.

내부 승진만으로 임원에 오른 젊은 3인방. 위 왼쪽부터 삼성전자 이민혁 수석, 양준호 수석, 문성우 부장.


기획·법무·신사업서도 역량 발휘

삼성 이외에 다른 대기업에서도 비슷한 사례를 충분히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대개 국내 명문대나 해외 유학파 출신으로 경영기획(혁신), 법무, 신사업 분야 등에 전문성과 능력을 발휘하며 30대에 임원의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이는 국내 기업들의 경쟁력이 글로벌 수준으로 격상되면서 해외 유학, 글로벌기업의 경력 등을 통해 역량을 갖춘 젊은 핵심인재 등용의 필요성이 증가한 데 따른 것으로 분석된다.

현대모비스에서 전략기획사업본부 경영혁신실장을 맡고 있는 윤치환 이사는 2007년 36세의 나이에 현대모비스에 영입됐다. 윤 이사는 서울대 경영대학원을 나와 세계적 컨설팅 회사인 글로벌 경영컨설팅 전문회사인 AT 커니(A.T. Kearney)에서 컨설턴트로 근무했다.

현대모비스가 윤 이사를 긴급 발탁한 것은 변화 관리에 대한 그의 전문성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2007년 당시 현대모비스는 ‘글로벌 톱 5 자동차 부품업체’로의 도약을 목표로 ‘Innovation Inside’라는 혁신 슬로건을 내걸고 혁신 활동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AT커니 컨설턴트로 재직할 때부터 ‘혁신’을 줄곧 주창해온 그는 바로 현대모비스가 바로 원하던 인재였다.

입사 이후에도 윤 이사는 현대모비스 혁신 활동의 방향성을 제시하며 회사의 혁신 수준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해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71년생인 박흥권 두산중공업 전무는 세계적 컨설팅 그룹 맥킨지 출신의 경영전략 전문가다.

현재는 두산중공업 발전BG에서 EPC영업을 총괄하고 있다. 고려대 무역학과와 미국 펜실베니아대 경영학 석사 출신인 그는 2004년 당시 34세의 젊은 나이에 두산중공업 전략기획담당 상무로 스카우트 됐다.

효성에도 경영기획 분야에 30대 임원이 포진하고 있다. 이기원 중공업PG경영기획 상무와 경영혁신팀의 표경원 상무가 바로 그들이다. 법률 전문가도 있다. 특허 등 산업 관련 법 개정이 늘어나면서 새로운 법령 지식이나 정보에 발 빠른 요구가 커지고 있는 가운데 기업 법무 전문성을 갖춘 젊은 인재가 대기업에 영입된 경우다.

1972년생인 S-OIL의 이언주 상무는 비오너가 30대 임원 중 유일한 여성이다. 서울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노스웨스턴대학교 로스쿨 등을 졸업한 해외파로 지난 2008년 2월 외부 영입되어 법무업무를 총괄하고 있다. 이 상무와 동갑인 LG전자의 이진효 상무(법무팀)는 서울중앙지방검 금융조세조사부 검사 출신이다.

신규사업 부문에 30대 임원을 기용한 사례도 있다. 1973년생인 OCI의 김홍욱 상무보는 서울대 기계설계학과 석사 출신으로 VIP단열재사업본부 사업개발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단열재는 화학제품에서 폴리실리콘 등 신재생에너지로 사업을 확대하고 있는 OCI의 신규사업이다. OCI는 지난해 2분기 경영실적 설명회(IR)에서 “자체 연구개발을 통해 2008년 7월 중 VIP단열재 시제품 생산에 성공했다”고 밝힌 바 있다.

정선섭 재벌닷컴 대표는 “최근 대기업들에서 재벌가 출신이 아닌 젊은 리더들이 전면에 부각되고 있는 것은 주력 사업의 무게 중심이 과거 전통적인 제조업에서 첨단기술에 기반한 IT나 전자, 바이오의 신사업으로 옮겨가고 있는데 기인한 바 크다”고 말했다.

최신 기술이나 디자인 경쟁이 치열하고 소비자 트렌드에 민감한 첨단 신사업 분야에서는 ‘올드 패션’의 인적 구성만으로는 경쟁력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 정 대표의 설명이다.

그는 또 “영업·마케팅 분야에 젊은 임원들을 배치하는 데에는 이른 명퇴 바람 등으로 소비 주체의 연령대가 내려가면서 젊은 세대의 니즈를 정확히 읽어내고 그들과 원활히 소통하기 위한 포석이 깔려 있다”고 진단했다.

전민정 기자 puri21@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