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말 영국은 교도소가 차고 넘쳤다. 산업혁명이 시작되면서 농민계층이 몰락하고 도시 빈민층이 늘어나면서 범죄가 급증했다. 1787년 28살이던 영국 총리 윌리엄 피트는 궁여지책으로 호주를 유형지로 삼기로 하고, 이듬해 함대사령관 아더 필립의 지휘하에 중범죄자들을 호주 동쪽 노포크섬으로 이송했다.

당시 호주 총독들은 수감자들에 대한 전권을 갖고 있었다. 형기를 줄이거나 사면해주는 것은 총독 말 한마디에 달렸다. 이에 피트 총리는 1790년 ‘특별권능부여조례’라는 혁신적인 수형제도를 제정했다. 조례의 핵심은 ‘석방증(Ticket of Leave)’이라고 불리는 ‘조건부 사면권’이었다. 일정한 수감 기간을 넘긴 모범수에 한해 석방증을 주어 구금을 풀되 거주지역을 제한하고, 만약 추가범죄를 저지르면 즉각 재수감시키는 제도였다. 노포크섬의 석방증은 지금 전 세계가 채택하고 있는 ‘가석방제도’의 원형인 셈이다.

우리의 가석방제도도 비슷하다. 형법 제72조 1항은 ‘징역 또는 금고의 집행 중에 있는 자가 그 행상(行狀·태도)이 양호하여 개전(改悛·뉘우침)의 정이 현저한 때에는 무기에 있어서는 10년, 유기에 있어서는 형기의 3분의 1을 경과한 후에 행정처분으로 가석방을 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가석방이 되어도 ‘보호관찰 등에 관한 법률’과 형법 제73조에 의해 보호관찰을 받도록 했고, 형법 제75조 ‘가석방자관리규정’을 위반하면 가석방을 취소하도록 했다.

가석방을 길게 설명한 것은 요즘 기업인 수감자에 대한 논쟁이 기초적인 사실관계조차 정리되지 않은 채 겉돌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9월 24일 황교안 법무부 장관이 “기업인이라고 가석방 대상에서 배제하는 불이익을 줘선 안 된다. 기업인도 요건만 갖춘다면 가석방될 수 있다”고 말했다. 가석방이라는 행정처분권한을 갖고 있는 행정기관 수장의 ‘당연한’ 발언이었다.

그런데 이 발언이 나오자마자 야권이 발끈했다. 새정치민주연합 박영선 원내대표는 “법무부 장관까지 나서 감옥의 재벌 회장을 사면하려는 로비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다”고 질타했다. 갑자기 ‘가석방’이 ‘사면’으로 둔갑한 것이다. 야당 대표의 어휘 선택이 의도적인 왜곡인지 실수인지는 알 길이 없지만 이후 언론보도에서조차 가석방과 사면이 뒤섞이기 시작했다.

최경환 경제부총리의 발언은 불 난 데 기름을 부었다. 최 부총리는 “기업인이라고 지나치게 엄하게 법 집행을 하는 것은 경제살리기 관점에서 도움이 안 된다”며 황 장관을 지지하는 의사를 밝혔다. 이 말은 ‘경제살리기’를 위해서라면 무리해서라도 풀어달라는 뜻으로 비쳤다. 급기야 SNS상에서는 ‘무전유죄, 유전무죄’와 같은 해묵은 논쟁으로 비화됐다.

물론 일각의 우려도 이해할 만하다. ‘기업인 범죄 무관용 원칙’은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다. 실제로 현 정부들어 ‘징역 3년·집행유예 5년’-‘대통령 특별사면’으로 이어지던 기업인에 대한 사법적 특혜는 사라졌다. 이런 분위기 탓인지 사법부의 기조도 달라졌다.

요즘은 비리 기업인의 형 집행정지나 보석허가가 남발되는 일이 없다. LIG그룹은 아버지와 아들이, 태광그룹은 어머니와 아들이, SK그룹은 형제가 함께 구속되는 등 기업인에 유난히 가혹하다 싶을 정도다. 야권은 이 같은 사법부의 엄정함이 경제논리 앞에서 또다시 훼손될 것을 우려하는 것이다.

그러나 논쟁의 주제는 가석방이다. 가석방은 형법에 정한 행정처분이다. 정치적 특혜인 사면이 아니다. 원래 가석방은 일정기간 죄값을 치루고 반성의 기미가 확실한 수형자들에게 불필요한 구금을 줄여주고 장래의 희망을 갖게 해주려는, 인권에 기반한 형사정책적 제도이다. 그러므로 가석방은 형법에 정한 일정기준을 충족시키면 누구든 누릴 수 있어야 할 수형자들의 권리이기도 하다.

역대 정부와 달리 기업인의 비리에 엄격한 박근혜정부 하의 법무부일지라도 가석방만큼은 수감자의 신분에 관계없이 객관적인 심사절차에 따라 결정하는 게 옳다. 기업인이라는 이유로 특혜를 줘서도 안 되지만 역차별을 받게 해서도 안 될 일이다.

초기 석방증의 공식명칭은 ‘Ticket of Leave During Good Conduct’ 였다. 번역하자면 ‘선행을 하는 기간의 석방증’이다. 악행을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선행을 하라고 풀어줬던 것이다. 앞으로 가석방되는 기업인이 나온다면 224년전 노포크섬 석방증의 뜻부터 되새겨보길 바란다. <이코노믹리뷰 편집인. 숙명여대 글로벌서비스학부 객원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