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으로, 다시 사업가로
사업을 접은 마윈은 1998년 공무원으로 변신한다. 운 좋게 중국 대외경제무역합작부에 취직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그는 또 한 번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야후의 공동 창업주인 제리 양을 만나는 행운을 거머쥐었기 때문이다. 당시 마윈은 중국여행을 온 제리 양의 만리장성 투어 가이드로 일했다. 당시의 인연으로 2005년 야후가 알리바바에 10억 달러의 유치를 단행하고, 구글의 공습으로 위기에 몰렸던 제리 양이 알리바바의 2대 주주인 야후의 재발탁으로 알리바바의 이사회에 진입해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는 것은, 아직 먼 훗날의 일이었다.

한편 마윈은 공무원 생활이 적성에 맞지 않았다. 그는 1995년 미국 시애틀에서 만났던 인터넷을 잊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짧은 공무원 생활을 접고 1999년 자신의 아파트에서 두 번째 인터넷 회사를 차린다. 바로 '알리바바'였다.

▲ 알리바바 로고. 사진제공 - 알리바바

마윈이 자신의 두 번째 회사 이름을 알리바바로 정한 것에는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 그는 어느 날 카페에서 회사이름을 고민하다가 종업원에게 물었다. "알리바바를 아느냐?" 종업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마윈은 "무얼 아느냐?"고 물었다. 종업원은 "열려라 참깨를 안다"고 답했다. 즉시 마윈은 밖으로 나가 행인 20명을 붙잡고 같은 질문을 했다. 모두 알리바바를 안다고 했다. 결국 새로운 회사의 이름은 알리바바가 됐다.

마윈이 알리바바를 창업한 1999년은 공교롭게도 국내의 네이버가 출범한 해다. 당시는 실리콘밸리의 '닷컴 버블'이 꺼지며 인터넷 사업의 새로운 동력이 필요한 때이기도 했다.

당시 마윈은 자신과 함께 창업한 17명의 동료들에게 일장연설을 했다. "우리 경쟁 상대는 중국 기업이 아니다. 바로 미국의 실리콘밸리에 있는 기업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글로벌 기업이 돼야 한다. 실리콘밸리 사람들을 보라. 정말 열심히 일한다. 우리가 그들을 이기려면 오전 8시에 출근해 오후 5시에 정확히 퇴근하는 자세로는 불가능하다. 그렇게 하려거든 지금 당장 그만두는 게 낫다. 믿도록 하자. 우리한테는 머리가 있고 강한 정신력이 있다.” 당시 결혼한 마윈의 아내도 창업주 17명 중 하나였다. 그녀는 알리바바의 설립자금을 위해 1000만 위안을 빌려 보태는 수완을 보이기도 했다.

시련을 먹고 일어서다
알리바바의 17명 공동 창업주 중 하나는 대만의 변호사이자 홍콩 사모펀드에서 근무한 적이 있었다. 마윈은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로 마음먹는다. 마윈은 그를 연결고리로 삼아 골드만삭스와 소프트뱅크의 자금을 끌어오는데 성공한다. 특히 소프트뱅크의 손정의 회장과 단 6분만에 거액의 투자금을 유치받은 일화는 거의 전설처럼 내려오고 있다.

하지만 시련도 찾아왔다. 창업한지 3주동안 아무도 물건을 팔지않아 직원이 직접 물건을 올리고 구매하는 '꼼수'를 부린것은 약과였다. 2001년에 갑작스러운 재정난으로 한 사업부의 직원 전체를 해고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난은 2003년 개인 간 거래, C2C 전자상거래 사이트인 타오바오를 설립해 당시 이베이가 장악한 중국 전자상거래 시장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밀며 배가됐다.

2008년에는 아마존과 유사한 소매 사이트 티몰까지 열었다. 이 과정에서 마윈은 이베이와 출혈경쟁도 마다치 않으며 괴로운 싸움을 시작했다. 바오타오에 무료 수수료를 앞세워 공격적인 자세로 이베이를 공략했다. '소모전'을 시도했다는 뜻이다. 여기서 그는 2위 사업자의 겸손함을 대외적으로 피력하며 내부적으로는 이베이를 공략할 10명의 '특공대'를 조직하는 치밀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미국 언론은 마윈을  '미친 잭'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결국 승리는 '미친' 마윈의 것이었다. 2007년 타오바오의 중국 전자상거래 시장 점유율은 80%에 육박했으며, 이베이는 중국을 떠났다. 업계에서는 당시의 상황에 대해 전자상거래 시장의 지배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이베이가 플랫폼 자체에 무리한 변화를 줬고, 여기에 불편함을 느낀 고객들이 동요하자 출혈경쟁을 앞세운 마윈이 재빨리 행동에 돌입해 성공했다고 평가한다. 적의 틈을 노리는 '타이밍'이 좋았다는 뜻이다. 마윈은 이를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비유하기도 했다.

이후 마윈은 2011년, 야후와의 관계가 틀어지며 또 한번 일생일대의 위기를 맞기도 했다. 마윈이 1대 주주인 소프트뱅크와 2대 주주인 야후와 상의없이 알짜로 통하던 알리페이를 분사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마윈은 자신의 선택을 "회사 경영자로서 덩샤오핑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고 회고했다. 그가 간혹 '독재자'로 불리는 이유도 바로 이런 사업 스타일에 있다.

알리바바, 황금을 얻다
이후 마윈의 알리바바는 화려하게 뉴욕증시에 입성했다. 그는 뉴욕증시 상장식에서 회장이 상장벨을 울리는 관례를 깨고 8명의 중요 고객에게 벨을 울리게 하는 파격을 선보여 눈길을 끌었다. '알리바바의 성공은 중소기업의 성공'이라는 경영철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돈이 없었고, 기술을 잘 몰랐으며, 심지어 계획도 없었습니다"
최근 블룸버그 통신과 인터뷰한 마윈이 남긴 말이다. 얼핏 들으면 아무 대책 없이 사업을 남발했던 그의 일생과 묘하게 오버랩되는 부분이다. 하지만 이는 역으로 돈이 없으니 최대한 신중했으며, 기술을 몰랐기에 최고의 인재를 데려와 귀를 기울였고, 계획이 없었으니 변화에 맞춰 기민하게 행동했다는 뜻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포기하는 것이 가장 큰 실패"라고 말하는 마윈의 성공신화는 지금부터다.

마윈은 본인을 '창조적 파괴자'라고 부른다. 자신을 오래된 관습을 깨고 새로운 비지니스의 지평을 여는 아웃사이더라 부르기 때문이다. 실제로 역사는 아웃사이더가 파격적인 혁명의 기치를 걸고 역사의 중심으로 진격할 때 발전했다. 1999년 알리바바 설립 당시에 세운 102년 역사의 첫걸음은 이제 풍운의 일보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