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내에서 잠수정을 발견한 미 구축함 모나간함은 잠수정 상부를 통과하면서 충돌 공격으로 잠수정을 침몰시켰다. 다른 한 척의 잠수정은 수로로 접근하던 중 나침의 고장으로 방향을 잃게 돼 항구 근처의 바위에 좌초하고 말았다. 정장인 카츠오 사카마키 중위는 갖은 노력으로 잠수정을 이초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압력선체 손상부분에서 침수가 발생하고 해수가 축전지실로 들어와 축전지실에서 염소가스가 발생해 이초를 포기해야 했다. 그는 자신의 배에 폭약을 설치하고 배를 빠져나와 무사히 육지로 올라왔으나 해안을 지키고 있던 미군에게 붙잡혔다. 결국 태평양 전쟁에서 최초의 포로가 됐다. 그는 심문과정에서 일체의 질문에 모른다고 응답했다. 즉각 총살시켜 줄 것을 줄기차게 요구했다.

결국 부두에 계류 중인 대형 군함들을 공격하고자 항만 깊숙이 침투했던 잠수정들은 임무를 달성하지 못한 채 침몰 또는 좌초되고 말았다. 그 결과 5척의 잠수정과 9명의 승조원이 희생됐다.

전쟁이 끝난 뒤 일본은 에타지마에 있는 해군사관학교에 잠수정 승조원 추모 사당을 건립하고 여기에 9명의 승조원 이름을 새겼다. 하지만 살아서 포로가 된 정장 카츠오 사카마키의 이름은 새기지 않았다.

오하우 섬을 포위하고 있던 일본 잠수함들의 전과도 보잘 것 없었다. 일본의 항모 함재기들이 진주만에 기습공격을 펼치는 동안 부근을 통행하던 5척의 미국 수송선박만 침몰시켰을 뿐이다. 항만을 이탈하는 미국 항공모함에 어뢰공격을 감행하지는 못했다.

전쟁의 종말이 가까워지며 패전의 궁지에 몰린 일본은 궁여지책으로 자살공격 전력을 더욱 증강시켜 나갔다. 미국을 상대로 정상 작전을 펼칠 수 있는 항공기와 수상함 전력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미국 잠수함에 의해 원자재 도입이 근본적으로 차단되고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전력 건설의 대안도 없는 상태였다.

당시 일본 국민은 어려서부터 세계를 지배하는 신성한 민족으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죽음을 재촉하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자살에 대해서는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의명분이 있는자결은 사무라이 정신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었다. 잠수함 부대는 잠수정과 어뢰의 특성을 살린 자살 병기로서 2명이 조종해 표적에 돌진할 수 있는인간어뢰를 개발하고 카이텐(Kaiten) 이라고 이름 붙였다.

Kaiten’(廻天)하늘’(Sky)바꾸다’(Change)의 뜻을 합친 일본어다. ‘하늘의 도움을 얻어 기적과 같이 전세를 역전시킨다는 뜻이다.

레에테 해전에서 가미카제 특공대가 미국 항모를 손상시키는 공격 효과를 발휘하자 혼슈 부근 오츠지마 섬의 카이텐 비밀기지에서 훈련 중이던 젊은 카이텐 승조 장교들도 항모를 공격하겠다며 의욕을 불태웠다. 그러나 카이텐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몇 가지 어려운 문제점에 봉착하게 됐다. 그로인해 3척의 모() 잠수함에 탑재된 12척의 카이텐은 레에테 해전에는 참가하지 못했다.

카이텐의 작전 투입 기회를 엿보고 있던 일본은 미국이 서 캐로린 제도의 유리티와 팔라우 군도의 코솔에 함대세력을 전진배치하자 정찰기로 미국 함대 정박 상태를 확인하고 두 곳의 전진기지에 카이텐을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11 7일 카이텐을 실은 잠수함들이 출항하기에 앞서 제6함대 사령관인 미와 중장은 12척의 카이텐 승조 장교들을 위한 성대한 출정식을 거행했다. 이 자리에서 미와 중장은 가미카제 조종사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찬양한 뒤, 출항하는 카이텐 승조원 모두에게 자결용 단검을 증정했다.

미와 중장은 카이텐을 건조할 때 카이텐 조종석에 긴급이탈 장치를 설치해 카이텐이 표적에 가까이 접근했을 때 조종사가 탈출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탈출 장치의 실용성에 대해 구체적인 검증이 없었기 때문에 조종사의 생존은 보장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이미 모든 사람과 승조원들은 자살공격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작전에 참가하는 잠수함은 B-1형 대형 초계 잠수함인 I-36 I-37, C-1형 공격 잠수함을 개조한 C-2, I-47함 등 3척이었다. B-1형 잠수함 2척에는 함수 갑판의 비행기 격납고와 함수포를 제거하고 카이텐 8척을 탑재했다. C-2형 잠수함도 함수 갑판포를 제거한 위치에 카이텐 4척을 탑재했다.

11 8일 최초로 작전에 투입되는 카이텐 승조 장교들은 카이텐이 탑재된 모 잠수함에 올랐다. 모 잠수함 승조원들과 행사 참가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모 잠수함 갑판에서 환송 행사가 거행됐다. 카이텐의 젊은 장교들은 신성한 임무를 의미하는 백색의 머리띠를 두르고 사령관이 하사한 단검을 허리에 매단 채 각자가 몰게 될 카이텐 옆에 결연한 표정으로 꼿꼿이 서 있었다. 행사 참가자들은 그들에게 뜨거운 성원과 격려를 보냈다. 젊은 생명을 죽음의 길로 내모는 환송식이었다. 식이 진행되는 동안 카이텐 조종사들은 미국 대형함을 공격해 수천 명의 침략자들과 함께 장렬히 산화함으로써 전쟁영웅으로 후세에 이름을 남길 것을 꿈꿨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한낱 환상에 불과했다. I-37함은 카이텐을 발진시킬 목표지점에 채 도달하기도 전인 팔라우 외해를 향해하던 중 미국 구축함에 발각돼 폭뢰와 헷치호크 공격을 당해 침몰하고 말았다.

나머지 두 척의 잠수함은 11 19일 유리티 외해에 도착하고 카이텐을 발진시키기에 앞서 잠망경으로 미국 선박의 정박상태를 관측했다. 관측을 마친 잠수함들은 외해에서 밤을 보냈다. 20일 아침 I-47은 탑재하고 있던 4척의 카이텐을 모두 발진시켰으나 I-36함은 3척의 카이텐에 고장이 발생, 1척만 발진시킬 수 있었다.

카이텐을 발진시킨 다음 잠수함 함장들은 카이텐이 목표 미국 함선을 격침하는 강한 폭발음을 듣는 순간만을 간절히 기다렸다. 그러나 항만으로 들어간 5척의 카이텐 중 결과적으로 1척의 카이텐만이 미국 유조선에 돌진해 유조선을 격침시켰다. 나머지 4척은 모두 침몰 또는 격침됐다. 한 척은 암초에 부딪쳐 가라앉았고, 3척은 발각돼 함포 사격이나 폭뢰공격을 받고 침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