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인·딸 경영 폭 확대… 섬세하고 부드럽고 따뜻한 수평적 영향력

가족경영은 한국경제의 근간이다. 국내 주요 대기업의 대부분은 가족 구성원이 중심이 되어 경영하는 가족기업이다. 최근 이러한 가족경영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기업에서 여성의 역할이 점차 중요해지고 있는 가운데 부인과 딸들이 그 능력을 인정받으며 경영 전면에 나서고 있는 형국이다.

장자 또는 형제 상속의 엄격한 틀 속에 그 동안 뒷전으로 밀리기 일쑤였던 가족기업 내 여성 구성원들의 위상이 몰라보게 달라지고 있다. 전문성과 능력을 바탕으로 때로는 남성보다 더욱 뚜렷한 성과를 보이는가 하면, 창업주로부터 직접 경영권을 물려받은 2세 경영인의 행보도 화제가 되고 있다. <이코노믹리뷰>는 재계의 사례를 통해 대한민국 가족기업에 불고 있는 여풍의 위력을 들여다봤다. <편집자 주>


"부드러운 ‘뚝심’이 또 통했다.” 현대건설 인수전 결과를 두고 나온 말이다. 현정은 회장이 이끄는 현대그룹이 지난 16일 현대건설 인수 우선협상자로 선정됐다. 이로써 현대그룹은 현대자동차를 제치고 오랜 숙원을 이뤄내며 과거 현대그룹의 위상을 회복하는 전기를 마련했다.

현 회장이 현대건설을 다시 품에 안기까지의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그래서 그녀만의 뚝심 경영과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다시 한 번 힘을 발휘했기에 가능했다. 대북사업 중단으로 재무구조 약정 대상자로 선정되자, 채권단을 대상으로 ‘여신규제 중단’을 요구하는 소송을 벌여 판정승을 거뒀다. 또 ‘집안싸움’으로까지 번진 현대차그룹과의 신경전에선 ‘정통성’을 강조한 광고로 명분을 이끌어냈다.

현 회장은 2003년 취임 이후 지속적으로 현대건설에 대한 확고한 인수 의지를 밝혀왔다. 인수전이 시작된 후 지난 취임 7주년을 맞아서는 전 임직원들에게 이메일을 보내 ‘미션 완수’를 뜻하는 스페인어 ‘미시온 쿰플리다(Mision Cumplida)’를 인용하며 함께 현대건설 인수에 대한 힘을 모으자고 당부했다. 역시 그녀만의 따뜻한 감성의 리더십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최근 드라마에서도 여성 대통령이 등장하는 등 여성 리더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부쩍 높아졌다. 얼마 전 막을 내린 G20 정상회의에서도 여성 리더들의 파워는 확인됐다.

영국의 저명한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는 “21세기 사회 변동의 핵심은 여성이다”라고 했다. 존 나이스비트는 20세기에 쓴 저서 <메가트렌드>에서 “21세기는 가상(Fiction), 감성(Feeling), 여성(Female) 등 ‘3F’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여성 특유의 친화력이 갈등 해결 원동력

여성이 세상을 움직이는 당당한 ‘주역’으로 부상한 것이다. 이런 시대적 변화는 기업 경영에서도 나타난다. 전통적으로 보수적 성향이 짙은 가족기업의 경영에도 예외는 아니다.

장자(長子)나 형제에게 무조건 기업을 물려주던 경영 풍습은 남녀를 구분하지 않고 능력 있는 자식에게 승계하는 합리적인 방식으로 바뀌고 있는 분위기다.
아들이 없는 기업은 딸이 자연스럽게 선대의 사업을 물려받는 경우도 적지 않게 나온다.

3세 경영 체제가 본격화되고 있는 최근에는 오너 일가 3세 딸들이 경영의 보폭을 크게 넓히며 큰 활약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가부장적이고 남성 중심의 가풍 탓에 여성의 사회 진출이 제한됐던 재벌 1~2세대의 여성들과는 사뭇 다른 행보다.

세습 경영이 후대 경영인의 전문성, 자질성 부족으로 도마 위에 오르자, 2, 3세 경영인의 능력에 더 많은 초점이 모아지고 있는 것도 맥락을 같이 한다. 즉, 능력만 된다면 여성도 충분히 후계자로 지목될 수 있단 얘기다.

한국가족기업경영연구소 자료에 따르면 실제 미국에서는 가족기업의 25% 이상이 차기 최고경영자(CEO)로 여성을 고려한다고 한다. 가족기업에서 여성의 역할론도 크게 대두되고 있다.

남영호 한국가족기업경영연구소 소장은 “여성 특유의 감성과 친화력은 가족기업 내 구성원 간의 갈등 발생 시 조화로운 해결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메리 바렛은 그의 저서 <가족기업 내 여성의 리더십 역할(Women in Family Business Leadership Roles)>에서 보수적 성향의 가족기업에서 성공한 여성 CEO 리더십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이들은 단순한 부드러운 리더십은 경계한 대신 상황에 따라 융통성 있게 발휘되는 리더십을 중시 여겼다. 또한 종업원의 가정 사정까지 배려하며, 기업의 정체성을 경영에 적용했다. 특유의 친화력으로 지역사회와 좋은 관계를 맺었다. 상상력을 불러일으켜 제품 개발의 원동력으로 삼게 하거나 새로운 비전을 심어주기도 했다. 즉, 여자라서 더 잘할 수 있는 것들을 충분히 기업 경영에 활용한 것이다.

21세기를 ‘감성시대’라고 한다. 이에 걸맞게 오늘날엔 ‘섬세하고 부드러운’ 핑크 리더십이 각광받고 있다. 기업 경영에도 마찬가지다. 양인숙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산업구조가 생산 중심에서 서비스 지향적으로 바뀌면서 전통산업에서 요구되던 남성 중심적인 군림형·수직적 리더십은 그 경쟁력을 잃고 있다”며 “미래에는 기업 경영에 있어서도 창의력, 유연함을 강점으로 한 민주적이고 인간관계 중심의 여성의 수평적 리더십이 더 각광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남성 위주의 후계 방식에는 큰 변화가 없다는 지적이다. 양 연구위원은 “우리나라의 오너 가족경영 체계에선 경영권 승계를 받아야 하는 구조적인 한계를 갖고 있어 여성의 경영 활동이 위축되어 왔고, 또 그들의 경영 능력을 조명 받을 만한 시간적 여유나 사회적 분위기도 형성돼지 못했다”며 “그럼에도 삼성, 현대 등 국내 굴지의 대표 기업에서 오너 가족 중 여성 경영인의 높은 성과를 나타낸다면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이나 경제 주체로서의 역할 제고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피죤·보령제약, 아버지 이어 딸이 나서다

실제 국내의 주요 가족기업에서도 가족 내 여성 구성원들이 핵심 경영진으로 두각을 나타내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찾을 수 있다. 종합생활용품 전문기업 피죤은 아버지와 딸이 함께 호흡하며 회사를 경영하는 ‘부녀경영’의 대표 사례로 손꼽힌다. 그 주인공은 이윤재 회장과 그의 장녀인 이주연 부회장이다.

1996년 피죤 디자인 팀장으로 입사한 이 부회장은 입사 초기부터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 당시 출시되던 모든 제품의 패키지 디자인 개발에 관여하며 생활용품 디자인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이 부회장은 생활용품의 블루오션을 개척해 피죤의 사업 영역을 지속적으로 확대했다. 기존 생활용품에서는 방충, 냄새제거 기능을 첨가한 ‘피죤 참숯 제습제’를 개발해 히트시켰다.

또 국내 최초로 액체세제 ‘액츠’를 기획해 출시 한 달 만에 20억 원의 매출을 달성, 현재 액체세제 시장의 76%를 점유하는 성과를 이끌어냈다. 이 부회장은 디자인과 마케팅에 있어서 무한히 혁신적인 아이디어와 상상력을 발휘하려 하지만, ‘제품력’과 ‘친환경’에 있어서는 절대 타협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평소 여성스러운 모습의 그녀지만 과감한 투자와 추진력 있는 시장 개척 등 경영 활동에 있어서는 늘 적극적이라는 것이 대내외의 평가다. 최근 그녀는 중국 시장 공략에 고삐를 바짝 죄고 있다. 피죤은 지난 6월 톈진 빈하이 경제특구에 연간 2만5000여t 규모의 섬유유연제와 액체세제 제품을 생산하는 공장을 준공했다. 고급생활용품에 눈 뜬 중국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2014년까지 중국에서만 매출 1조 원을 올린다는 복안이다.

보령제약 또한 창업주인 김승호 회장과 장녀인 김은선 회장의 부녀경영으로 순항하고 있다. 김승호 회장은 지난해 1월 초 김은선 부회장을 핵심 계열사인 보령제약 회장으로 승진시켰다. 국내 제약업계에서 창업주 2세 여성이 계열사 회장에 오른 것은 처음 있는 일로 당시 큰 화제를 모았다.

김은선 회장은 지난 1986년 보령제약에 입사한 후 전 부서를 두루 거치면서 일찌감치 경영수업을 받아왔다. 2001년부터 부회장을 맡으며 그룹 내 혁신활동인 이노비알(inno-BR)을 주도해 온 것으로 전해졌다.

김 회장의 섬세하고 부드러운 리더십 덕분인지 보령제약은 어려운 제약업계의 현실에도 탄탄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지난 상반기 신제품의 고른 성장과 A형 간염백신사업의 호조로 전년 동기 대비 25% 성장한 115억 원의 영업이익을 올리며 사상 최대 실적을 달성했다. 지난 3분기에도 전년 대비 286.7% 증가한 68억 원의 영업이익으로 실적 호조세를 이어갔다.


오리온·한섬, 부부는 경영도 ‘일심동체’

기업 경영에 있어서도 ‘부창부수’가 미덕이던 시대는 갔다. 부부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동등한 관계 속에서 회사를 이끌어 나갈 때 더 큰 성과를 보이는 경우도 있다.
한섬은 시스템, SJ, 마인, 타임 등 유명 여성복 브랜드를 대거 거느린 자타 공인 국내 여성복 업계의 최강자다. 창업자인 정재봉 사장과 부인인 문미숙 이사의 ‘부부경영’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기업이기도 하다.

디자이너 출신인 문 이사는 한섬 디자인 업무를 총괄하며 안방 안주인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한섬은 탄탄한 부부경영을 바탕으로 견고한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토종 브랜드가 줄줄이 쓰러졌을 때도 한섬의 ‘타임’ ‘마인’ 등은 백화점에서 효자 브랜드로 대접받았다.

또 지난해 경기 불황에도 매출 3869억 원, 영업이익 657억 원을 올려 전년 대비 15.6%, 19% 증가하는 고성장세를 보였다. 지난 3분기에는 수입명품과 시스템 옴므 등 신규 브랜드 매출 호조에 힘입어 전년 대비 3% 증가한 854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

오리온 그룹은 역시 재계에서 보기 드문 ‘부부경영’으로 유명하다. 동양그룹 창업주 고 이양구 회장의 둘째 딸인 이화경 사장과 남편 담철곤 회장이 함께 이끌고 있다.
이 사장은 동양그룹에서 분가한 후 오리온의 외식사업과 엔터테인먼트사업을 성공적으로 진두지휘하며 남편 못지않은 경영 능력을 인정받아 왔다.

현재 오리온그룹은 온미디어를 CJ그룹에 매각하고 건설, 레저, 금융을 신성장동력 축으로 삼아 그룹의 제2도약을 꾀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이 사장도 이들 사업을 접고(마켓오 제외) 해외사업에 올인 하면서 그룹의 마케팅과 기획부문에 집중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핑크 리더십이란?

미국 내 스킨케어 화장품 점유율 1위 업체 ‘메리 케이’사의 창업자인 메리 케이의 따뜻한 여성 리더십을 일컫는 용어다. 그녀는 불과 5000 달러를 가지고 48세에 회사를 창업, 전 세계 37개국에 180만 명의 뷰티 컨설턴트를 거느린 연매출 24억 달러의 세계적 화장품 업체로 성장시킨 주인공이다.
메리 케이는 회사를 경영하면서 골든 룰(남에게 대접받으려면 먼저 남을 대접하라)을 기반으로 조화와 상생을 강조하는 독특한 리더십을 펼쳤다. 또한 주부를 여자의 미덕으로 여기던 시대에 세상에 나와 ‘기업이 아닌 가족을 위해 일한다’는 ‘마더(Mother) 리더십’을 전파했다.

전민정 기자 puri21@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