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코노믹리뷰 안영준 기자]


서울 외곽 250평 부지 ‘호떡카페’ 론칭 또 다른 꿈

시작은 평범했다. 특별한 노력만이 있었을 뿐이다. 어느 날 갑자기 자신도 모르게 스타가 되어 있는 남자, 특별할 것 없는 ‘호떡’ 하나로 성공을 일궜다. 비결은 ‘행복경영’이라고 했다. 단 돈 500원짜리 호떡 하나를 웃음과 희망으로 구웠더니 인생이 행복해졌다. 남들에게도 자신이 가진 행복을 전파하겠다는 노점상 주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마케팅 달인 입소문 스타강사로

김민영(55) 왕호떡 대표는 양복에 나비넥타이를 매고 서울시 용산구 갈월동 노점상에서 호떡을 굽는다. ‘김민영 왕호떡’이라는 상호가 크게 걸린 노점상은 그가 받은 각종 상패와, 그동안 보도된 방송, 신문을 스크랩한 자료들로 가득하다. 언론에 소개된 횟수만 210여 회에 달한다고 했다.

‘김민영 왕호떡’이 유명세를 타자 여기저기서 그를 찾는 사람이 많아졌다. 한 달에 5~6회, 많게는 한 주에 2~3회 대학이나 군청, 기업 사내 연수원 등 각종 기관에 강의를 나간다. 경희대, 숙명여대, 한밭대 등 출강한 대학 수만 28군데. 한 대학 교수는 학생들에게 ‘김민영 왕호떡’에 가서 마케팅 전략을 배워오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한 번 강의할 때마다 강사료를 100만원씩 받기에 호떡 팔아 남는 돈 외에 부수입도 짭짤하다. 김 대표는 무엇을 강의할까. 주제는 ‘행복경영’이다. 그가 낸 책 제목이기도 하다. 성공적인 창업을 이루기 위한 근본적인 비결을 많은 이들에게 전파하고 있다. 오늘도 그는 직접 구운 호떡 수십 장을 포장해 강의를 하러 전국 각지를 돈다.
과거에 김 대표는 안정적인 직장에 다니고 있었다. 시골 농고 출신이었지만 스스로의 약점을 극복하고 공부해 1985년 한국통신 공중전화(현 KT링커스)에 공채로 입사했다. 이후 17년간 근무하며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가 인생의 고비를 맞게 된 계기는 1997년 동료의 권유로 주식 시장에 발을 들여놓게 된 때다. 98년도에 주당 만 원에 샀던 주식이 99년이 되자 주당 31만원으로 올랐다. 2000년 김 대표의 주식 값은 12억원을 상회했다. 당시 김 대표가 살던 익산의 아파트 12 채 가량을 사고도 남을만한 액수였다. 하루아침에 주식 부자가 된 김 대표에게 주변 지인들이 투자를 맡기기도 했다.

그러나 주가가 폭락하는 것은 순간이었다. 2001년 초 12억원은 몇 백만원도 안 되는 수준으로 추락했고 빚까지 짊어지게 됐다. 주식으로 재산을 탕진하면서 주변사람과 친척들로부터 끌어다 쓰고 갚지 못한 돈도 꽤 됐다. 가족들과도 사이가 멀어질 수 밖에 없었다. 결국 가진 대부분의 자산을 처분하고 빚을 갚기 위해 직장을 그만둔 시기가 2000년이었다.


김 대표는 막노동과 퀵서비스 일을 전전하며 번 일당으로 아내와 딸 셋을 먹여 살리기 시작했다. 이 때 착실히 모은 돈으로 김 대표는 새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 작은 일부터 시작해 보려는 심산으로 김 대표는 호떡 장사를 선택했다. 재료비가 많이 들지 않고 마진이 많이 남는다는 생각에서였다.

초기 자본금은 점포비용 3000만원과 장비, 재료 구입에 드는 기타 제반 비용을 포함해 3200만원가량이었다. 2001년 7월, 김 대표는 1평짜리 노점상을 오픈하고 ‘김민영 왕호떡’이라는 상호를 내걸었다.

여름이라 날씨 탓에 호떡장사가 잘 안될 것이라고 주변 사람들은 혀를 찼다. 그러나 김 대표는 ‘이열치열’의 이치를 믿었다. “더운 사람은 호떡을 굽는 나 자신이지, 호떡을 사 먹는 고객은 아니지 않냐”며 넉살좋게 웃는 까닭이다. 또 당시 주변에서 호떡을 파는 다른 경쟁자들이 없는 것을 기회로 여겼다.

맛에서도 차별화 전략을 구사했다. 왕호떡에는 해바라기씨, 호박씨, 계피 등 8가지의 속재료가 쓰인다. 반죽도 특별하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김민영의 ‘왕호떡 믹스’로 제작됐다. 김 대표는 반죽에 쓰일 밀가루 제작을 국내 유수의 밀가루 제조업체에 맡기기로 했다. 처음에는 여러 차례 거절당했지만 결국 한 업체와 밀가루 주문 제작 계약을 맺을 수 있었다.

호떡 맛이 차별화되자 자연히 고객도 늘었다. 매일 다른 무늬의 나비넥타이를 매고 아침부터 밤까지 호떡을 굽는 남자를 인근에서 모르는 이가 없었다. 젊은 층의 고객도 많지만 30~40대의 중·장년층 고객수도 그에 못지 않다. 대량주문 손님과 단골손님도 많아졌다. 100장 이상의 호떡을 지방까지 배달하기도 했다.

고객 서비스도 유별났다. 단 돈 500원을 계산해도 카드 결제가 가능하도록 했다. 1000원 이상만 카드 결제가 되는 시스템에 따라 1000원을 결제하고 500원은 현금으로 고객에게 되돌려줬다. 단 한명의 고객도 정성으로 대하니 왕호떡은 입소문을 탈 수 밖에 없었다.

김 대표의 고객 서비스에는 마술 공연도 포함된다. 취미로 배운 마술의 종류만 100여 가지라, 배달이나 강의를 나갔을 때 고객들에게 마술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는 마술 3급 자격증 외에도 레크리에이션, 웃음치료사 자격증을 보유했다. 고객에게 자신이 배운 유머를 응용해 퀴즈를 내거나 마술을 보여주면, 덩달아 호떡을 하나 더 구매하기도 한다고 했다. 덕분에 전 직장인 KT 연수원에서 주1회 임원을 대상으로 ‘변화와 혁신’이란 주제의 강연도 하고 있다.

김 대표는 장사를 시작한지 2~3년 후 쌓였던 빚을 서서히 청산해 나갔다. 얼마 되지 않아 빚을 전부 갚고 가족이 오순도순 살 33평짜리 아파트까지 장만할 수 있었다. 그가 유일한 동업자인 아내와 함께 10년간 호떡가게를 즐겁게 경영하는 이유다.

가맹비도 무료 넉넉한 마음 씀씀이

가게는 하루 평균 고객 200명 이상에, 월 매출 700만~800만원 이상을 유지해오고 있다. 이 중 순수입만 500만원 이상이다. 한창 매스컴에 등장하며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을 때는 매출이 더 많았다. 그러나 현재 김 대표는 강연을 통해 누군가에게 인생의 선생님이 되는 편이 더 즐겁다.

유명세를 타며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한 ‘김민영 왕호떡’의 가맹점은 전국에 40여 군데 이상이다. 초기에는 가맹비 50만원을 받았지만 지금은 크게 돈 욕심이 없어 공짜로 가맹점을 내 준다.

신규 창업자는 원하는 지역에 점포만 마련하면 재료, 장비 구입 비용 200만원가량으로 ‘김민영 왕호떡’의 가맹점을 낼 수 있다. 물론 김 대표의 고생과 땀이 서린 ‘왕호떡’ 브랜드를 아무에게나 내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고려하는 요소가 창업자의 자세, 입지의 타당성 여부다. 이 절차를 통과하면 김 대표가 호떡 반죽법과 고객 서비스 노하우 등을 철저하게 제공한다. 왕호떡의 상징인 나비넥타이까지 납품해 준다.

김 대표는 창업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꼭 유명 프랜차이즈만 고집할 필요는 없다”고 강조한다. “2억원 투자해 월 2000만원 수입 얻는 것과 2000만원 투자해 월 2000만원 수입 얻는 것 중 어느 편이 낫겠느냐”고 되묻기도 했다. 사업을 반드시 거창하게 시작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김 대표의 본점보다 유동 인구가 많은 가맹점은 장사가 훨씬 잘 된다. 한계령 휴게소점은 일 매출 100만원으로 월 매출이 3000만원이다. 또 일산 라페스타점은 월 매출이 2000만원이다. 얼마 전 개업한 김해점은 첫 날만 매출 52만원을 달성했고 이후 매일 30만원 이상의 매출을 유지하고 있다. 또 부산 남포점과 김포 강화점이 3월 내 개업을 앞두고 있다. 올 해 안에 김 대표는 가맹점을 100여 군데까지 늘릴 계획이다.

과거 12억원을 잃고 자살 시도까지 했던 김 대표는 호떡 하나로 인생 재기에 성공한 비결로 남들과 같아지기를 거부한 점을 꼽는다. 작은 노점상이지만 특별한 점포가 되게 하려는 일념 하에 펼친 마케팅이 빛을 발한 것.

김 대표는 월 3회 이상 보육원, 양로원 등 복지시설에서 봉사 활동을 한다. 노인, 장애인 등에게 호떡을 구워 제공하고 마술 공연을 선보이며 특강도 한다. 넉넉하게 살만큼 돈을 벌었으니 일정 부분 사회에 환원하려는 의도다.

호떡으로 남은 인생의 3막을 열 계획도 있다. 앞으로의 꿈은 ‘호떡카페’를 만드는 것이다. 서울 외곽 지역에 250평 규모의 땅을 매입해놨다. 여기에 창업 교육장과 호떡, 음료 등을 즐길 수 있는 카페를 동시에 지을 예정이다. 건물 설계, 건축 등 남은 과제가 많지만 아직 시간은 많다. 언젠가 내걸 ‘김민영의 왕호떡 카페’에 대한 희망에 에너지가 끓어오르는 남자, 끊임없이 행복경영을 외치며 또 다른 인생의 밑그림을 그린다.

백가혜 기자 lita@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