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나이 56세. 환갑을 넘기기도 전에 글로벌 경제에 이처럼 큰 영향력을 끼친 사람은 없었을 게다. 투자의 귀재 워렌 버핏(81)보다 25살, 세계적 부동산 재벌 도널드 트럼프(65)보다는 9살이 적다.

국내 최고 기업인으로 꼽히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69)에 비하면 13살이 어리다. 매킨토시와 아이폰으로 유명한 애플 스티브 잡스의 얘기다. 그는 2009년 <포춘>이 선정 한 ‘최고의 CEO’로 선정 됐다. 애플을 세계 최고 IT기업으로 키워냈고, 손을 댄 제품마다 연달아 히트 시키며 경영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대가다.

부와 실력을 모두 갖춘 스티브 잡스. 그런데 완벽해 보이는 그에게도 커다란 약점이 하나 있다. 건강 문제다. 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건강 상태에 따른 회사의 주가 하락이다. 2004년 췌장암 수술과 2009년 간 이식 수술을 받은 그다. 건강이 악화됐다는 소식이 알려질 때면 그가 이끌고 있는 애플의 주가는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2009년 애플의 주가는 150달러 안팎. 스티브 잡스의 간 이식 수술 소식이 돌면서 90달러 아래로 떨어졌다. 아이폰 출시 이후 주가는 300달러를 향해 달리고 있지만 건강 악화 우려는 주가 상승폭에 여전히 제동을 걸고 있다.

스티브 잡스도 갖지 못한 한 가지

“밭을 매는데 주인이 아흔아홉 몫을 한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리더의 역할이 중요하다. 또 제대로 된 역할을 하기 위해선 CEO의 건강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애플의 주가에서 알 수 있듯이 CEO의 건강은 기업의 핵심 경쟁력이 될 수 있다.

건강한 CEO가 버티는 회사의 주가와 매출은 상승할 수 있고, 그렇지 않다면 반대의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높다. 급변하는 글로벌 경제 상황에서 CEO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트렌드에 맞는 경영전략 수립과 빠른 투자 결정은 매출과 주가 상승에 직결된다. 이 과정이 원활하지 않을 경우 회사에 엄청난 손실이 발생하기도 한다.

박광서 타워스왓슨 사장은 “급변하는 시장에서 CEO의 건강은 중요한 투자정보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CEO의 건강이 장수기업으로 성장하는 초석이 된다는 얘기다.
베지밀 생산 업체인 정·식품을 보자. 30년 넘는 장수 브랜드를 앞세워 매년 높은 성장세를 기록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구순이 넘긴 나이에도 회사 업무를 돕는 정재원 명예회장(93)은 정·식품만의 경쟁력이다. 그는 지난달 16∼9일 미국 국제대두(대두)심포지엄에 참석하기 위해 출장길에 올랐다. 가족과 회사 임원은 건강을 이유로 만류했지만 그 는 굽히지 않았다.

처음 회사를 설립할 때 가졌던 ‘인류의 건강을 지키겠다’라는 사명감을 위해서다. 유당불내증을 해결, 건강에 좋은 콩 음료만을 생산해온 정·식품의 경영전략과 똑같다. 덕분에 정·식품의 매출은 매년 꾸준한 상승세를 기록하고 있다. CEO의 건강이 회사의 경영전략과 함께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는 것이다(표 참조).

반대로 CEO의 건강 악화로 회사의 매출과 주가가 곤두박질치는 사례도 있다. 미국 인터넷 식품유통업계 1위 피포드는 2000년 3월17일 주가가 반 토막이 났다. 54.5%의 하락. 창사 이래 가장 큰 수치다. 투자를 약속했던 업체들도 투자계획을 철회했다. CEO인 빌 말로이가 건강을 이유로 사퇴를 발표 한 지 하루 만의 일이다.

삼성그룹의 주가도 이건희 회장과 맥을 같이 한다. 2005년 폐암 수술이 알려지자 주식시장이 들썩였다. 50만 원대였던 주가는 40만 원대로 떨어졌다. 누가 바통을 이어받을지에 대한 관심이 뜨거웠고, 과연 이 회장을 대신할 만한 이가 있는지에 이목이 집중됐다.

이후 이 회장의 건강 호전 소식과 함께 삼성전자 주가는 60만 원대로 상승했다. 일신상의 이유로 이 회장이 사퇴를 했던 중 2008년 3월 47만 원 까지 곤두박질쳤던 주가는 지난해 3월 복귀와 함께 80만 원대로 상승하기도 했다.

대기업 사장단 몸 만들기 한창

삼성경제연구소에 따르면 국내 대기업 CEO의 건강 상태는 그리 썩 좋지 않다. 격변하는 시장에 대처하기 위해 과도한 업무가 원인으로 꼽혔다. 수면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업무에 쏟는다는 것. 건강 상태는 적신호가 켜지기 바로 전 단계에 다수 분포돼 있다고 추정했다.

보고서가 처음 나온 2000년 4월과 비슷한 수치다. 일부에선 오히려 더욱 많아졌을 것이란 의견도 있다. 급변하는 경제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스트레스의 강도는 더욱 높아졌다. 그렇다고 CEO로서 업무를 소홀히 할 수도 없는 노릇. 하루라도 업무를 손에서 놓을 경우 일 년 농사를 망칠 수 있다. 대기업과 중견 기업 할 것 없이 CEO라는 자리는 기업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그런 존재다.

그래서일까. 최근 일부 대기업의 CEO 선발 조건에 건강도 포함돼 있다고 한다. 금연은 하고 있는지, 하루에 운동을 30분 이상 하는지 등을 따지는 것. 또 연임 여부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최근 건강 관리에 나선 CEO가 부쩍 증가한 이유다.

CEO의 건강관리법은 다양하다. 가벼운 걷기에서부터 헬스, 마라톤까지 각양각색 천차만별이다. 이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신세계그룹의 정용진 부회장(43). 2009년 12월 신세계 총괄 대표이사로 승진한 이후 꾸준히 건강 관리를 하고 있다.

2004년 37살의 나이임에도 몸에 이상을 느끼고 병원을 찾은 뒤 ‘운동을 하라’는 처방을 받고 헬스를 시작, 5년 만에 몸짱 CEO로 거듭났다. 하루에 3시간 이상 헬스에 투자하고, 운동을 돕는 트레이너만 4명에 달한다고. 사실 여부를 떠나 정 부회장이 건강 관리를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또 그는 2000년 골프에서 손을 뗀 뒤 9년 만에 다시 골프를 다시 시작했다. 체력을 바탕으로 국내뿐 아니라 해외 업무까지 모두 총괄하기 위한 건강 관리 차원에서 택한 일이다. 정 부회장은 취임 이후 국내외 활동과 함께 이마트 중국 진출 등 글로벌 전략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매출 확대를 통한 유통업계 1위 자리를 놓고 롯데와 한바탕 경쟁을 벌이는 중이다.

최태원(51) SK그룹 회장은 운동광으로 유명하다. 테니스 등 활동적인 운동을 즐겨하지만 최근 일정이 빡빡해 사무실 옆에 별도의 트레이너 기구를 들여놓았다. 국내뿐 아니라 해외 시장 진출의 바쁜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선 체력이 곧 경쟁력이라는 게 이유다.

또 사격을 통해 집중력을 높이는 등 스포츠를 통한 건강관리에 각별히 신경을 쓴다. 실제 그는 체력을 바탕으로 미국과 중국, 동남아시아 시장 확대를 위한 수많은 출장길에 직접 오르며 SK글로벌 경영의 최전방에 서 있다.

국내 최대 재보험 회사 코리안리의 박종원(64) 사장은 등산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인사이다. 소백산, 태백산 등 국내 유명산을 직원들과 함께 오른다. 등산에 나섰다 하면 맨 앞에 서서 무리를 이끈다. 자신의 체력 단련은 물론 직원의 건강관리를 동시에 해결하기 위해서다. 고령의 나이임에도 등산 일정에 단 한 번도 빠진 적이 없다.

체력을 바탕으로 전문 산악인도 힘들어 하는 일정을 꿋꿋이 소화 해 냈다. 등산 후 힘이 들면 하루 정도 업무에서 손을 놓을 법도 한데 그는 취임 이후 단 한 차례도 결근을 한 적이 없다. 여기에서 박 사장의 보인 놀라운 경영실적표를 짚어 볼 필요가 있다. 그는 1998년 코리안리에 사장으로 취임한 뒤 5연임에 성공했다.

1999년 1조5009억 원이던 총 자산은 2008년 4조1765억 원으로 증가했고, 당기순이익은 294억 원에서 608억 원으로 증가했다. 강철 체력이 아니었다면 과감한 결단과 빠른 투자가 경쟁력으로 작용하는 재보험사의 특성상 이루기 힘들었을 성적이다(표 참조).

이밖에 이승한 홈플러스 회장, 최현만 미래에셋증권 부회장, 원종석 신영증권 사장 등도 건강 관리를 통해 높은 경영 실적을 유지하고 있다.

직급 따른 복지혜택 지원 필요

CEO의 건강이 기업에 미치는 영향력은 엄청나다. 이에 반해 CEO에 대한 기업이 제공하는 복지 혜택은 턱없이 부족한 듯 보인다. 건강 관리에 나서고 있는 CEO들의 경우 대부분 오너 일가, 창립 멤버에 국한돼 있는 경우가 많다.

경영 능력을 바탕으로 선발된 CEO는 업무 능력을 보여줘야만 생존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최근 글로벌 경제의 트렌드는 인재 경영이다. 인재 경영이란 적재적소에 인력을 배치, 업무 효율성을 높이는 것을 말한다.

특히 각각의 인재가 위치에서 최대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돕는 복지 혜택을 제공하는 것도 포함돼 있다. 익명을 요구한 국내 굴지 S그룹의 한 CEO는 “기업의 인재 경영 차원에서 복지 수준을 높이고 있지만 CEO는 배제되는 경향이 많다”고 했다. 또 “혜택이 제공된다 하더라도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선 업무에만 몰두 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CEO는 기업을 대표하는 얼굴이다. CEO의 건강 관리는 단순한 체력 증진이 아닌 기업 경쟁력에 영향을 미친다. 당장 눈앞의 현실을 위해 건강을 포기할 것인가,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건강 관리에 나설 것인가.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김세형 기자 fax123@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