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벽당(環碧堂) 솔바람 소리, 5m×1m90㎝ 환벽당 흙+장지에 수묵담채 혼합 2010.

백일홍이 만발했으니 아마도 늦여름 즈음인가 보다. 환벽당(環碧堂) 앞 용소(龍沼)에 청룡이 하늘을 승천하는 것이었다. 낮잠을 자다 꿈을 깬 사촌(沙村) 김윤제(1501~1572)가 용소를 가보니 한 소년이 멱을 감고 있었다. 바로 그 소년이 송강(松江) 정철이다.

가사문학의 대가인 그가 벼슬길에 나아가기까지 머무르며 공부를 했다는, 사방 푸르름을 두른 이곳에서 가까운 식영정은 훗날 그가 고향에 내려와 있을 때 머물던 정자로 성산별곡의 창작 무대이기도 하다.

“잔 구름 흩어지고 물결이 잔잔할 적에/하늘에 돋은 달이 솔 위에 걸렸거든/달 잡으려다 빠졌다는 이태백이 야단스럽구나.”(성산별곡 중 일부)

신동철 작가는 바로 이곳 환벽당 때 묻지 않은 흙을 화면에 녹여냈다. 소나무 아래 황토(黃土)를 채취해 약탕 도구로 미세하게 갈아 색을 낸 것이다. “그곳의 흙으로 채색하는 것이 그곳의 정신을 올곧게 담는 것이다.

 

 

소쇄원(瀟灑園) 달빛 내리고, 160×130㎝ 장지에 수묵담채 2010.

황토와 먹빛이 어우러져 조화롭게 한지에 스며들며 녹아들 때면 그 기운을 강하게 느끼게 되는 경이로운 경험을 하곤 한다.”

그래서인가. 황토와 소나무가 강조된 그의 화면 둥그런 돌에 앉노라면 한편의 시가 떠오른다. “우리는 유사 이래/하늘보다/ 황토 위에서 참 되었습니다 (중략) 민중이란 섬기는 사람이 아니라/날마다 일하는 사람입니다/정든 쇠고랑을 박고 발보면/재 너머로 넘어가는/끝없는 황토 길이 우리 절경입니다/저만치서/말없이 살고 있는/아버지 황토 무덤이 우리 절경입니다/(고은시집, 조국의 별 ‘황토’ 중에서)

소나무를 화재(畵材)로 즐겨하는 그는 “소나무의 품격과 그 영혼까지의 토로(吐露)를 존중하기 때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작가의 붓과 먹이 풍부한 정취를 구함으로써 펼쳐지는 화면에는 그래서 색이 먹의 장애가 되지 않고, 먹이 색의 장애가 되지 않는 정점을 보여주고 있다.

‘내’가 태어났을 때 새끼줄을 건 소나무이자 황토 흙 속 아버지 관으로, 한결같은 지조와 절개로, 우리들 그 자체로 다가오는 나무인 것이다.

푸근한 취기에 저 달 희롱했을까

 

 

 

 

백두에서 한라까지, 54×33㎝ 장지에 수묵담채 2010.

어느덧 해가 저무는가! 정감의 기억과 생명과 기록을 나르는 비 개인 가을밤 맑고 가지런한 달빛 한 자락이 물 맑고 깊은 소쇄원(瀟灑園)의 제월당(霽月堂)을 드리운다.

어느 한 시절, 이 황홀한 풍광에 의탁한 한 선비는 신화와 전설을 떠올렸을까 아니면 장진주사(將進酒辭) 푸근한 취기에 저 달을 희롱했을까. 원림(園林)의 고요를 깨우는 계곡의 물줄기가 달빛에 희디흰 살빛을 드러내고 있다.

안과 밖 나누지 않은 담을 나와 산길을 걸으면 청량한 바람이 어느새 차갑다. 어디에서 불어왔나. 저기 산을 넘으면 보일 듯한 무등산에서 한걸음 달려왔을까. 그렇게 산과 산이, 바다와 바다가 교통하며 작가는 ‘백두에서 한라산까지’ 확장하고 있다.

천지(天池)의 기운은 정자가 보이는 소나무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다 은은한 빛줄기로 한라산 제주 바다를 비춘다. “인간이 거닐고 노닐며 삶을 도모할 수 있는 것이 곧 자연이자 그 품이다. 나는 그것을 화폭에 담고 싶다”고 그는 말했다.

그러기 위해 그는 “현실에 바탕을 두고 호흡하고 교감할 수 있는 또 다른 자연을 구축함으로써 자신의 산수 이상을 표출하고 있는 셈이다.”(김상철 미술평론가)

그것을 육화(肉化)시킴으로써 더욱 농밀해지기를 원하는 그는 “부드러운 것이 거친 것을 이기는 섭리와 선비의 철학 그 발자취까지 담아내는 것이 작가로서 의무이고 세계이다. 앞으로 역사성에 더 무게를 두고 민족혼(民族魂)을 일깨우는 한국적 미학세계에 정진 하겠다”고 작가노트에 적고 있다.

추운 겨울이 가고 봄날 일제히 움트는 초록 생명의 힘. 지상의 그 어느 것도 막아내지 못할 환희로운 아름다움의 근원을 신동철 작가는 길에서 길을 묻고 있지만, 아마도 지금은 보일 것이다.

권동철 문화전문 기자 kdc@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