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에서 정보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며, 정보 및 역정보의 판단 유무로 승패가 갈리는 경우도 역사 속에서 자주 등장한다. <손자병법(孫子兵法)>의 황금율 중 하나인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 백번 이긴다(知彼知己 百戰不殆)”는 말도 이 점을 강조하고 있고, 19세기 프러시아의 전략가 클라우제비츠(Carl von Clausewitz, 1780~1831)는 “정보란 적과 적국에 관한 지식의 전체를 의미하기 때문에, 전쟁에서 아군의 계획과 행동의 기초를 이루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따라서 군에서 정보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며, 이런 이유로 정보를 다루고 적의 역정보를 방어하는 전문적인 정보기관이 군에서 태어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세계 최초의 ‘전문적인’ 정보기관은 독립전쟁 중이던 미국이 1775년경 대륙회의 산하에 첩보부서를 설치한 것이 효시지만 임무와 역할이 제한적이었다. 최초의 독립 정보기관은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1863년 미 연방군(The Union Army: 북군)에 설치된 것으로, 포토맥 군 사령관이었던 조제프 후커(Joseph Hooker, 1814~1879) 소장이 만든 군사정보국(BMI: Bureau of Military Intelligence)이었다. 당시 군사정보국은 남군의 첩보를 수집해 이들의 전력을 다각도로 분석했으나 후커 장군이 이 정보를 감당하지 못해 챈슬러스빌(Chancellorsville)의 대패를 야기했다. 결국 군사정보국은 남북전쟁 종전과 동시에 해체됐으며 그 부산물로 위폐 단속 및 금융범죄 수사를 목적으로 하는 재무부 산하의 비밀수사국(USSS: The United States Secret Service)이 탄생했다. 하지만 오늘날 대통령 경호업무까지 관장하는 비밀수사국은 말 그대로 수사 및 경호기관이지, 정보기관과는 거리가 멀다.

물론 상설 ‘기관’의 창설은 미국이 앞섰을지 모르나, 체계적인 정보 및 첩보 체계는 당연히 전 세계 바다를 넘나들며 세계를 지배한 영국이 먼저 시작했다. 첫 독립기관인 해군 정보과(NID: Naval Intelligence Division)를 1882년에 창설한 영국은 왕립 해군의 대양 전략을 위해 첩보 수집을 실시했으며, 1887년 에는 DNI로 명칭을 변경하면서 ‘39호실(Room 39)’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특히 1차 세계대전 중에 창설되어 신호정보를 주로 처리한 ‘40호실(Room 40)’은 독일이 멕시코로 쏘던 전신을 가로챈 ‘치머만 노트(Zimmermann note) 사건’으로 유명하다. 만약 멕시코가 미국 후방을 교란해 미국의 1차 대전 개입을 막아준다면 나중에 캘리포니아-아리조나-텍사스를 멕시코에게 넘겨주겠다는 내용의 전신이었는데, 영국 해군정보국 측은 이 전신을 가로채 해독한 후 미국에게 넘겨주어 미국의 참전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지대한 공로를 세웠다. 이 해군정보국에서 2차 대전 내내 정보장교로 활약한 이언 플레밍(Ian Flemming, 1908~1964)은 랄프 이저드(Ralph Izzard, 1910~1992), 멀린 민셜(Merlin Minshall, 1906~1987)이라는 실존 요원들을 모티브로 삼아 첩보소설을 써 오늘날 ‘첩보물’ 교과서가 된 ‘007 제임스 본드’ 시리즈를 탄생시켰다.

하지만 영국 역시 범국가적인 상설 정보기관을 창설한 것은 20세기 초인 1909년이었다. 원래 1차 세계대전 이전 독일 제국의 움직임을 판단하기 위해 설치한 비밀첩보국(Secret Service Bureau)에는 기능별로 MI1부터 MI19까지 부서를 두었으며, 각각 암호해독(MI1), 미주 정보(MI2), 서유럽 정보(MI3), 항공정찰 해독(MI4: JARIC으로 이관), 방첩(MI5), 해외정보(MI6), 선동대응 및 검열(MI7), 통신정보(MI8), 해외 반군지원(MI9), 무기 및 기술분석(MI10), 군사 보안(MI11), 공보부 및 군사검열기관 연락업무(MI12), 독일 및 독일 점령지역 첩보수집(MI14), 항공정보 수집(MI15), 과학정보(MI16: 1945년 창설), 군사정보(MI17), 전쟁포로 심문(MI19)으로 분야를 나누었다. 이들 부서는 1차 세계대전 후 대부분 통합됐고, 다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을 기점으로 조직을 개편하면서 국내 첩보 및 방첩을 맡은 보안국(SS, Security Service: MI5)과 해외 첩보를 맡은 비밀정보국(SIS, Secret Intelligence Service: MI6)으로 통폐합됐다. 이후 여러 국가가 이들을 모델로 삼아 ‘해외첩보’와 ‘방첩’ 기구를 이원화하는 경향이 생겼다.

미국 또한 평시의 해외정보 수집까지 아우르는 첫 상설 정보기관인 해군정보실(The Office of Naval Intelligence)을 1882년 3월에 창설했으며, 해군참모총장실 산하에도 ‘해군 통신실 제20과 통신보안 G반’, 일명 OP-20-G라는 암호해독 전문 부서를 1922년에 설치했다. 1946년까지 존속했던 이 부서의 가장 큰 업적은 조제프 로슈포르(Joseph Rochefort, 1900~1976) 대령 주도하에 일본군 암호해독 작업을 실시해 미드웨이 공격의 단서를 입수했던 사건이다. 그는 일본이 계속 ‘JN-25’로 언급하는 대규모 집결지점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여 이곳이 알류산 열도, 포트 모레즈비(뉴기니), 서부 미국 해안 혹은 미드웨이 중 하나라고 확신했다. 그는 태평양함대 사령관인 체스터 니미츠(Chester W. Nimitz, 1885~1966) 원수의 재가를 얻어 그중 가장 심증이 가던 미드웨이에 ‘식수시설이 고장났다’는 평문을 일부러 날린 후 일본군의 반응을 보았다. 로슈포르는 일본군이 이 평문을 접수한 후 ‘JN-25에 식수시설 이상’이라는 메시지를 본국으로 보내던 것을 가로채면서 이들의 대규모 집결지점이 미드웨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미군은 이 정보를 토대로 사전집결한 덕에 오히려 일본 연합함대를 완파했으며, 이 해전을 기점으로 일본은 수세로 돌아선 후 끝내 회복하지 못했다. 로슈포르 대령은 이 공로로 해군 십자훈장을 수상했고, 추후 OP-20G를 승계한 미 국가안보국(NSA: National Security Agency) 명예의 전당에도 헌정됐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적지 내에서 정보를 입수하고 파병 중인 미군 내의 적 교란활동을 막아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어 최초의 해외첩보기관인 전략사무국(OSS: Office of Strategic Service)을 창설했다. 사실 1차 대전 전후에는 미 육군과 해군이 별도의 암호해독 부서를 갖고 있었으나 헨리 스팀슨 국방장관이 “신사들은 남의 편지를 뜯어보지 않는다”라는 입장을 표명하며 이 부처들을 1929년에 전부 폐쇄했다. 1933년에 대통령으로 취임한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 1882~1945)는 이로 인해 미군의 정보수집 능력에 허점이 있다고 판단하여 영국의 MI6과 특수작전실행국(SOE: Special Operations Executive)을 모델로 한 정보기관의 설계를 윌리엄 도노번(William J. Donovan, 1883~1959) 대령에게 명령했다.

도노번 대령은 1941년 7월자로 ‘정보협조관(COI: Coordinator of Information)’에 임명되어 ‘정보선진국’ 영국의 도움을 받으며 미국 내 모든 부서의 정보를 OSS로 취합하려 했으나, 국내 방첩업무를 실시 중이던 미 연방수사국(FBI)의 에드거 후버 (J. Edgar Hoover, 1895~1972) 국장을 비롯한 기존 기관들은 모두 적대적이거나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하지만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기습 사건이 터지면서 OSS에 힘이 실리게 됐다. 첫 OSS 요원들은 영국 MI6가 미국에 설치한 영국 보안협조국(BSC: British Security Coordination) 지도하에 캐나다에서 훈련을 받았고, 1942년 6월 13일부터 대통령령(令)으로 OSS가 본격적으로 임무를 시작했다. OSS는 우리 광복군과도 연계작전을 펼쳐 광복군 대원들에게 특수교육을 시키기도 했고, 국내 진공을 시도하기도 했으나 일본이 조기 항복하는 바람에 성과를 내지 못했다. OSS는 1947년 국가안보법이 통과되면서 창설한 중앙정보국(CIA: Central Intelligence Agency)으로 승계됐다.

이렇듯 군과 정보는 서로 떼놓을 수 없는 관계이며, 현대적인 정보기관 대부분이 군 조직에서 태어났을 뿐 아니라 군과 밀접한 관련을 가져왔다. 특히 한국전쟁 전 북한과 중국의 침공 징후를 잘못 읽은 뼈아픈 실수를 한 트루먼 대통령은 아이젠하워 원수의 참모장을 지낸 월터 베델 스미스(Walter Bedell Smith, 1895~1961) 대장을 1950년 제4대 미 중앙정보국(CIA) 국장에 임명했다. 그는 3년간 CIA 국장으로 재직하면서 대대적인 조직개편을 단행했으며, 흔히 오늘날 ‘CIA’라고 하면 떠올리게 되는 비밀임무 수행에 특화된 조직으로 탈바꿈시켰다.

특히 OSS시절부터 CIA까지 활약한 인물 중에는 존 싱글러브(John Singlaub, 1921~) 장군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2차 세계대전 중인 1943년에 소위로 임관한 그는 OSS 소속으로 1944년 8월부터 독일 점령지에 홀로 낙하산으로 잠입한 후 프랑스 레지스탕스와 연합군 간의 연결을 주도했었고, 전쟁 후에는 CIA의 창설 주역이 되어 중국 문화혁명 중에는 만주에서 첩보활동을 수행하고, 베트남의 호치민 트레일 작전과 니카라과의 콘트라 반군 지원 등의 비밀작전을 수행했다. 1977년 카터 대통령의 주한미군 철군계획안에 강하게 반대했기 때문에 보직해임을 당하고 소장으로 전역했다.

이런 군과 정보기관의 밀접성은‘테러와의 전쟁’ 이후부터 다시 부각됐다. 17개가 넘는 군, 정부 산하 및 독립 정보기관의 정보통합을 위해 2005년부터 국가정보국장(DNI: Director of National Intelligence)직이 신설됐으며, 오바마 집권 1기 시절에는 군-정보기관의 협조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육군 대장 출신의 데이비드 페트레이어스(David H. Patraeus, 1952~) 장군을 CIA 국장에, 커리어 정보맨인 리언 패네타(Leon J. Panetta, 1938~) CIA국장을 국방장관에 임명하기도 했었다. 최근에는 미 국방정보국(DIA) 부국장에 CIA 출신인 더글러스 와이즈(Douglas Wise) 씨가 임명된 사례도 있다. 전장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비정규전과 테러가 새로운 전쟁의 양상이 된 금세기에는 더더욱 군과 정보기관의 협조관계가 중요해질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