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아들에게 준 8자 : 연암 박지원이 종채에게 ⓵

인순고식 구차미봉(因循姑息苟且彌縫)-이 여덟 글자 때문에 사람이 망가지는 것이다(과정록)

[한자 풀이] 因 인할 인, 循 미적할 순, 姑 시어머니 고, 息 쉴 식, 苟 구차할 구, 且 또 차, 彌 두루 미, 縫 꿰맬 봉

 

박지원을 두고 서울대학교 국문학과 박희병 교수는 영국의 셰익스피어, 독일의 괴테, 중국의 소동파와 견줄 수 있는 ‘중세기 최고의 대문호’라고 평한 바 있다. 박지원의 역작 <열하일기(熱河日記)>는 2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스테디셀러로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독자들에게 열렬히 사랑받고 있는 것이다.

 

연암 박지원. [사진=위키 백과]
말에는 사람의 육성(肉聲)으로 전해지는 말과 문자를 통해 전해지는 말, 두 가지가 있다. 박지원이 종채에게 한 말이 대표적으로 그러하다.

 

아버지께서 만년에 병환 중이실 때 붓을 잡아 큰 글자로 ‘인순고식, 구차미봉(因循姑息, 苟且彌縫)’이라는 여덟 글자를 병풍에 쓰셨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천하 만사가 이 여덟 글자로부터 잘못된다.”

라고 하셨다. (박종채 지음, 박희병 옮김, <나의 아버지 박지원>, 돌베게 펴냄)

 

아버지는 조선 말기 대실학자인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을 말한다.

“천하 만사가 이 여덟 글자로부터 잘못된다.”

이 말을 들은 것은 차남 종채(宗采)다. 아버지의 육성은 병환 중에도 또렷했을 거다. 추측건대 목소리도 카랑카랑했을 거다. 그 후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셨다.

 

병풍 앞에서 부자가 마주(面授)하다

병풍에 적어 주신 8자, ‘인순고식 구차미봉(因循姑息 苟且彌縫)’을 마주할 때마다 사랑받고 있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면수(面授)’를 온몸으로 체득했으리라. 면수란 원래 스승과 제자가 밀실에서 마주 앉아 스승이 법문의 비밀(秘密)하고 중요한 것을 제자에게 말해주는 것을 의미한다.

부자가 서로 마주하고, 아버지의 육성이 다시 들려오는 듯한 거리에서 종채는 뭔가를 듣고, 보고, 깨닫고 잡아챘을 것이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 어느덧 해는 계유년(1813)으로 다시 봄은 왔다. 이때부터다. 종채는 저술을 시작한다. 책 제목도 이미 정했다. <과정록(過庭錄)>이 그것이다. 제목 과정록은 <논어>의 계씨에서 착안한 것이다.

공자가 집 마당에서 아들 리를 붙잡고 ‘시를 배웠느냐(學詩乎), 예를 배웠느냐(學禮乎)’라고 말한 것처럼 내가 아버지께서 남기신 자취를 모아서 후손에게 전하려고 한다. 다음은 박종채가 쓴 자서(自序) 내용의 끝부분이다.

계유년 봄부터 시작했으니 이제 4년이 되는 셈이다. 마침내 번잡한 것을 깎아내고 중복된 것을 없애니 2백여 조목이 남았다.

자못 들은 대로 기록하여 신중함이 결여된 듯도 하지만, 감히 함부로 덜거나 깎아내지 않은 것은 아버지의 풍채와 정신이 오히려 이런 곳에서 잘 드러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읽는 사람들은 아무쪼록 너그럽게 헤아려주길 바란다.

병자년(1816) 초가을에 불초자 종채(宗采)가 울며 삼가 쓴다.(박종채 지음, 박희병 옮김, <나의 아버지 박지원>, 돌베게 펴냄)

자서에서도 말했듯이 박종채의 <과정록>은 4년 동안 쓴 작업 결과물이다. 종채는 생전에 아버지께서 하신 말을 ‘들은 대로’ 하나하나 기록하고 모아서 책으로 엮은 것이다.

종채는 8자가 적힌, 병풍 앞에 책상을 두고 날마다 달마다 기록하여 그것들을 차곡차곡 글상자에다 옮겼으리라. 또 번잡하거나 중복되는 내용을 깎고 다듬고 매끄럽게 문장을 일일이 고쳤을 거다. 4년 동안 작업함에 있어 시간을 쓰고 자료를 정리하며 온갖 정성을 다했을 거다. 아버지의 정신을 살리고, 계속해서 아버지와 대화를 하고 싶은 마음에서 그러했지 싶다. 비단 사소한 일이나 자잘한 것일지라도 빠트리지 않고 잡아내려고 했을 거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생전 모습을 책을 통해 후손들이 기억하길 원했을 거다.

책은 ‘나주의 반남현(지금의 전라남도 나주군 반남면)을 본관으로 삼아 반남 박씨가 되었다’라는 얘기부터 시작하여 서울 서소문 밖에 있던 동네에서 아버지가 출생했는데 고대 중국의 문장가인 한유(韓愈, 768~824)와 소식(蘇軾·소동파, 1037~1101)과 같은 ‘마갈궁’ 사주라는 이야기, 또 집안이 대대로 가난하여 청빈했고 물욕이 없었노라고 시시콜콜 소개한다. 다음은 그중 하나로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그대로 옮긴다.

열여섯 살에 관례(冠禮)를 올리고, 처사(處事)인 유안재(遺安齋) 이공(이보천)의 집안에 장가 드셨다. 처사는 근엄하고 청렴고결하여 예법으로써 자신을 단속하였다. 그 아우 학사공(學士公) 양천(亮天)은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아주 좋아했으며, 문장에 뛰어났다. 아버지는 처사에게서 <맹자(孟子)>를 배우고 학사에게서 사마천의 글을 배워 문장 짓는 법을 대강 터득하셨다. 하루는 ‘항우본기’를 모방하여 ‘이충무공전’을 지었는데, 학사공이 크게 칭찬하시며 반고와 사마천과 같은 글솜씨가 있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약관 때부터 지기(志氣)가 높고 매서웠으며 자잘한 예법에 구애되지 아니하며 가끔씩 해학과 유희를 하곤 하였는데, 처사는 특별히 아버지를 애지중지하여 가르치고 꾸짖었으며 절실한 말로 바로잡아 옛사람이 이룬 바와 같은 성취를 기대하셨다. 처사는 언젠가 학사공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지원이는 그 재기(才氣)를 보니 범상한 아이와 크게 다르더라. 훗날 반드시 큰사람이 될 게다. 다만 악을 지나치게 미워하고 뛰어난 기상이 너무 드러나 그게 걱정이다.”

아버지는 처사를 마음속 깊이 존경하셨다.(박종채 지음, 박희병 옮김, <나의 아버지 박지원>, 돌베게 펴냄)

‘사위 사랑은 장모’라고들 한다. 하지만 앞에 글을 보듯 박지원의 경우는 다르다. ‘사위 사랑은 장인’이라고 고쳐야 해서다. 그럴 정도로 장인 이보천의 사위 박지원 사랑은 극진했다. 애지중지(愛之重之)로 특별했다. 한없이 사랑스러우면서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무게감이 느껴지는 그런 박 서방이었다. 박 서방 역시 장인의 마음을 잘 알고 있어서 장인을 마음속 깊이 존경한 것이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준 8자의 숨은 뜻

박지원은 아들 종채에게 8자의 한자를 적어 보이면서 “천하 만사가 이 여덟 글자로부터 잘못된다”라고 말했다. ‘인순고식 구차미봉(因循姑息 苟且彌縫)’이 그것이다.

이를 해석하려면 두 글자씩 떼어 읽어야 한다. 그러면 사주(四柱)로 나뉜다. 인순·고식·구차·미봉이 맞다. 여기서 나는 또 팔자(八字)로 끝내주는 아버지의 센스를 발견하고는 기막혔다. 이른바 ‘사주팔자’라고 할 수 있어서다. 한국인은 사주팔자를 참 좋아한다. 너나 할 것 없다. 특히나 성공은 모르겠지만 실패를 하면 사주팔자 탓을 한다. 명리(命理)로 돌리고 만다.

먼저 인순부터 말하자. 인순(因循)은 뭔가. 소극적인 것을 뜻한다. ‘내키지 않아 머뭇거림’을 말함이다. 따라서 박지원은 종채에게 매사 ‘적극적이어야 한다’라고 가르친 것이다.

다음에 고식(姑息)이란 뭔가. 이것은 ‘낡은 습관이나 폐단을 벗어나지 못하고 눈앞의 안일(安逸)만 추구하는 것’을 의미함이다. 당장에 탈이 없는 것, 잠시 동안의 안정을 말함이다. 이런 것들에 유혹돼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또 구차(苟且)는 뭔가. 이런 뜻이다. 말이나 행동이 정당하지 않고 ‘떳떳하지 못함’을 가리킴이다. 잘못 했다면 반성해야 된다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미봉(彌縫)은 말 그대로다. 임시변통과 상통한다. 이를테면 어떤 일이나 사건이 문제로 발생하면 피하지 말고 정면을 맞닥뜨리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이런저런 핑계나 이유로 요리조리 피하거나 도망을 다니지도 말며 뻔히 보이는데 어설프게 꿰매려 들지 말라는 뜻이다. 이렇게 하면 반드시 사단이 벌어진다. 나의 잘못이 드러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