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대하사극 ‘정도전’이 인기를 끌고 있다. 정도전이 우리로 하여금 생각게 하는 것 중 하나는 진정한 충성이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군주에게 충성하는 것과 국가, 백성을 위하는 것이 정렬화돼나가면 좋지만 그것이 배치될 때 어느 것을 선택할지는 이론처럼 쉽지는 않다. 백성과 국가를 해치는 못난 군주가 있을 때 그를 따르는 것은 진정한 충성인가, 단지 인간적 신의일 뿐인가. 거기에 수많은 인재의 인간적 고민이 있었고, 역성혁명의 명분이 있었다.

정도전은 거기에서 군주를 넘어선 국가란 명분 카드를 택한다. 능력이 없고 신망도 잃은 우왕은 자신의 폐위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정몽주와 정도전을 불러서는 이성계에게 자신의 진심을 전달해달라고 청한다. 용서라는 단어까지 사용하며 통사정하는 우왕을 본 정도전은 공민왕이 과거 자신에게 아들을 부탁한다고 했던 것을 떠올렸다. 인간적 갈등이 없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정도전은 결국 새로운 군주옹립이라는 카드를 택한다. 새로운 군주상을 묻는 이성계에게 정도전은  “믿고 따를 수 있고 신뢰하는 군주다”라고 대답한다. 정도전은 군주에 대한 신의를 저버린다며 분개하는 정몽주에게 우왕을 도적이라고 칭하며 맹자를 언급한다. 기록에 의하면 정도전은 <맹자>를 하루에 한 장 혹은 반 장씩 차근차근 정독하며 역성혁명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30년지기 절친 정몽주가 선물해준 <맹자>를 보며 정도전은 오히려 군주에 대한 충성이 아닌, 혁명사상을 꿈꿨던 것이다. 같은 상황, 같은 책을 보면서 해석의 관점과 시각이 달랐던 것이다. 정몽주에겐 혁명을 일으켜 군주를 유폐하고 폐위한 이성계 일파가 도적이었지만, 정도전에겐 나라를 기울게 하고, 백성을 궁핍하게 한 우왕이 ‘나라의 도적’이었던 것이다. <맹자>의 해당 대목은 이렇다.

“제나라 선왕이 맹자에게 ‘신하가 군주를 죽이는 것은 불의가 아니냐’고 물었다. 그러자 맹자는 ‘만약 어짊과 올바름을 해치는 자라면 군주가 아니라 한낱 사내일 뿐’이라고 대답했다.”(<맹자> ‘양혜왕 하’) 즉 민심에 반하는 군주는 군주가 아니라 한 사람의 사내일 뿐이며, 그런 사내는 죽여도 된다는 것이다.  정도전은 훗날 <조선경국전>에서 “백성의 마음을 얻으면 백성은 복종하지만 백성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백성은 임금을 버린다”(‘정보위·正寶位’)고 말했다.

정도전뿐 아니라 왕조의, 왕의 교체기에는 늘 신하들의 이 같은 고민이 존재했다. 왕을 택할 것인가, 국가를 택할 것인가. 고려시대의 정몽주 vs 정도전뿐 아니라, 조선시대의 성삼문 등 사육신 vs 신숙주가 그랬다. 누구를 충신이고 간신이라 할 수 없는 딜레마가 역사에서 계속 반복된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인의예지신을 주장한 공자는 어떤 입장일까. 물론 공자는  인재의 요건, 신하의 조건으로 도덕성과 인품을 누누이 강조했다. 공자는 도덕성이 갖추어지지 않은 재능은 승냥이나 이리와 같으니 가까이하지 말라고 강력히 경고한다. <공자가어>에는 인재의 요건에 관한 언급이 나온다.

노나라 애공이 공자에게 “청컨대 사람 쓰는 법을 묻습니다”라고 하자 공자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일은 책임을 맡은 관리에게 맡기십시오. 너무 민첩하게 말 잘하는 자를 쓰지 마시고 망언을 하는 자도, 말이 많은 자도 쓰지 마십시오. 너무 민첩한 자는 탐심이 있으며, 망언을 하는 자는 혼란을 야기하며 말이 많은 자는 황당한 짓을 잘합니다. 말이란 부려본 뒤에 잘 달리기를 바라야 하며, 선비란 반드시 성실한 뒤에 슬기롭고 재능이 있는 자를 구해야 합니다. 성실치 못하면서 재능만 많은 자는 비유컨대 승냥이나 이리 같으니 가까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도덕성이 갖추어지지 않은 재능은 승냥이나 이리와 같아서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자가 보수주의자, 구체제지향자로 비판받는 발언 중 하나는 ‘군군신신(君君臣臣)’론이다.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한다는 논리다. 이 말은 한 꺼풀 벗기면,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면 신하도 신하답지 않게 된다”이다. 즉 신하의 본분을 잃게 된다는 혁신적인 말로 오히려 바꾸어 해석할 수도 있다. 공자가 중시한 인재의 요건 ‘도덕성’은 ‘군주에 대한 충성’의 개념보다 백성을 위한 마음이 ‘상위법’으로 작용하는 차원이었다.

그 일단을 살펴볼 수 있는 것이 제나라 재상을 지낸 관중에 대한 인물평이다. 관중과 포숙은 제나라에서 죽마고우로 함께 큰 사이다. 당시 제나라 군주 양공(襄公)은 폭군이었다. 이복(異腹) 동생들을 죽이려 하니 공자 규(糾)는 관중과 함께 노나라로 망명했고, 공자 소백(小白)은 포숙아와 함께 거(莒)나라로 망명했다. 포숙은 제(齊)나라 공자(公子) 소백(小白)을 섬기게 되었고, 관중은 공자 규(糾)를 섬기게 되었다. 양공(襄公)이 살해당하여 군주의 자리가 비자 규(糾)와 소백(小白)이 군주의 자리를 다투게 되었다. 관중은 소백에게 활을 쏘아 죽이려 했지만 화살은 허리띠에 맞았다. 소백은 죽은 시늉을 해서 살아남아 몰래 제나라 서울 임치(臨菑)로 먼저 숨어들어가 제후의 자리에 올랐으니 바로 제환공이다. 공자 규(糾)는 자결하고, 그를 모시던 관중은 처형을 당할 운명이었다. 그때 포숙이 관중을 천거해 등용되어 제나라의 국정을 맡게 되었다. 이로써 제 환공은 천하의 패자가 되어 제후들과 여러 차례 회맹하고 천하를 바로잡았다. 이는 모두 관중의 지모(智謀)에 의한 것이었다.

자신이 모시던 공자 규를 배반하고 라이벌인 소백(제환공)의 밑에 들어가 재상까지 지낸 것은 ‘일반적 의리’의 개념에선 불충이고 변절이다.  자로가 “환공이 공자 규를 죽이자 (규를 모시던 신하) 소홀은 따라 죽었지만 관중은 죽지 않았으니, 어질지 못한 것이겠지요?”라고 묻는다. 이에 공자는 “환공이 제후를 규합하면서 무력을 쓰지 않은 것은 관중의 힘 때문이니 어질다고 할 수 있다! 어질다 할 수 있다.” 라고 답한다.(子路曰: 桓公殺公子糾,召忽死之,管仲不死。曰: 未仁乎?子曰: 桓公九合諸侯,不以兵車,管仲之力也。如其仁。如其仁-헌문-)

자공이  “관중은 어진 사람이 아니지요? 환공이 공자 규를 죽였을 때, 따라 죽지도 않고 오히려 재상이 되어 그를 도왔습니다” 라고 물었을 때도 공자의 대답은 한결같다.

“관중이 환공을 보필하여 제후의 패자가 되어 천하를 한 번 바로잡아, 백성이 지금까지 그 혜택을 받는다. 관중이 아니었다면 나는 피발좌임(머리를 풀고 옷깃을 왼쪽으로 여밈, 즉 오랑캐의 복식)을 하고 있을 것이다. 어찌 필부필부처럼 작은 의리를 지킨답시고 스스로 목을 매 도랑에 뒹굴어 아무도 몰라주는 것과 같겠는가?”(子貢曰:管仲非仁者與?桓公殺公子糾,不能死,又相之。子曰:管仲相桓公,霸諸侯, 一匡天下, 民到于今受。其賜微管仲,吾其被髮左衽矣。豈若匹夫匹婦之為諒也?自經於溝瀆,而莫之知也-헌문-)

공자는 “환공(桓公)이 비참한 수단에 호소하지 않고 제후들을 복종시킬 수 있었던 것은 관중의 활약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관중은 환공을 보좌하여 제후의 맹주가 되게 하고 천하의 질서를 회복했으며, 그 은혜는 오늘날까지 미치고 있다. 만약 관중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오랑캐의 풍속을 강요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높이 평가한다.

자로, 자공과 관중에 대한 인물평을 통해 공자가 생각하는 도덕성, 충성의 개념은 기본적으로 군주를 위한 것이 아니라 백성을 위한 것임을 살펴볼 수 있다. 비록 충성할 군주를 바꿨지만, 백성에게 혜택을 미쳤다는 점에서 오히려 큰 의리를 베풀었다는 게 공자의 시각이었다. 궁극적 충성을 군주 개인이 아닌 올바른 도(道)에 바쳐야 하는 법이라고 생각했다.

여러분은 어떤가.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구분하는 것은 보통사람도 할 줄 안다. 하지만 옳은 것과 더 옳은 것을 구분하고 선택해야 하는 데 번민이 있다. 진정한 충(忠)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정도전의 번민과 ‘관중’에 대한 공자의 인물평을 보며 드는 단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