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훈의 부자팔자(父子八字)-아버지가 아들에게 준 8자

수부수빈 개구소인(隨富隨貧 開口笑人)-부유하면 부유한 대로,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하하 웃자

[한자풀이]隨 따를 수  부자 부  가난할 빈  열 개  입 구  웃을 소  사람 인

아버지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선대회장(왼쪽)과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 [사진=이코노믹리뷰 DB]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성철 스님이 한 말이다. 한학자 청명 임창순 선생은 ‘山外無山 水外無水(산외무산 수외무수)’라는 글로 화답한 바 있다. “산 밖에는 산이 없고, 물 밖에는 물이 없다”라는 뜻이다. 오로지 흙(山)밖에 없고, 오로지 물(水)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울산 동구에 갔을 때다. 수많은 자동차를 보았다. 그중에 ‘현대’가 아닌 게 없었다. 수원 영통에 갔을 때다. 거리에는 ‘삼성’을 단 자동차만 휙휙 지나갔다.

정주영의 소싯적 이야기

현대그룹 창업자는 정주영(鄭周永, 1915~2001)이다. 삼성그룹 창업자는 이병철(李秉喆, 1910~1987)이다. 정주영의 호는 아산(峨山)이고, 이병철의 호는 호암(湖巖)이다. 아산의 선봉이 어디던가. 울산(蔚山)이다. 또 호암의 선봉은 어디던가. 수원(水原)이다.

‘지자요수 인자요산(知者樂水 仁者樂山)’이라고 했다. 국내 최고 그룹 창업자의 성격을 두고, 한 사람은 물을 닮은 지자(知者)로, 다른 한 사람은 산을 닮은 인자(仁者)로 구분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이병철은 자신의 호에다가 '물(湖)'을 갖다 붙였고 정주영은 자신의 호에다가 '흙(峨)'을 끌어다 붙였다. 여하튼 정주영 얘기만 하자. 이병철에 대해서는 따로 논하겠다.

정주영은 하동 정씨다. 양반 가문이다. 500년 조선을 새로 건국하는 일등공신 정도전도 하동 정씨이고, 중기의 성리학 대가 정여창도 하동 정씨다.

그러나 흘러가는 세월 앞에 가문의 영광은 희미해질 수밖에 없다. 삼국지에 나오는 유비를 보라. 그는 한고조 유방의 후손이었다. 하지만 소싯적엔 별 볼일 없었다. 생계가 어려워서 짚신을 삼고 돗자리를 짜 시장에 내다 팔아 목숨을 연명했다. 다음은 소싯적 정주영의 모습이다.

정주영은 강원도 통천 시골 바닥에 태어나 아버지를 따라 새벽 4시면 논에 나가고 별을 보아야 돌아오는 고생을 많이 해서 전형적인 시골 촌놈의 인간 냄새가 나는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쌀가게 잔심부름꾼으로 출발해 세계적인 기업가로서의 입지에 오르기까지 그야말로 구두쇠의 생활과 모습을 보이면서 서민적인 행동을 해왔다.

정주영의 아버지(정봉식)는 전형적인 농부였다. 어머니(한성실)도 시골 아낙네였다. 주영은 6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집안의 장남이었기 때문에 초등학교(송전공립보통학교)를 다니면서도 틈틈이 아버지의 농사일을 도와주고 거들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부지런했다. 새벽 4시면 논에 나가고 별을 보아야 집에서 발을 씻을 수 있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하지만 중학교엔 진학하지 못했다. 아버지의 뜻이었다. 아버지는 장남을 농부로 키우고자 했다. 하지만 아버지 장남의 속은 그렇지 않았다. 달랐다. 시골을 벗어나 도시로 나가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랬는가. 주영은 네 번이나 가출을 한다. 가출 중에 한 번은 아버지의 전 재산이던 소 판 돈(70원)을 훔친 적도 있다. 기차를 타고 서울로 도망간 것이다. 하지만 번번이 가출은 실패하고 말았다. 곧 아버지에게 붙잡혔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었다. 일자리를 쉽게 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가출에 성공하기에 이른다. 인천부두에서 막노동을 했다. 그런가 하면 서울의 학교 신축공사장에서 일을 얻기도 했다.

그러다가 쌀가게 점원이 된다. 쌀 배달원으로 취직을 한 거다. 부지런하고 성실함 때문일까, 주인에게 인정을 받아 좋은 조건으로 쌀가게를 인수하기에 이른다. 처음으로 사장이 되는, 창업자가 된 것이다. 그렇게 해서 1935년에 서울 신당동에 경일상회(京一商會) 간판을 단다. 이때 정주영 나이는 스물한 살이었다.

이듬해에는 결혼에 골인한다. 두 살 아래, 고향처녀(변중석)와 말이다. 그해에 득남(몽필)을 했다. 2년 뒤에, 강원도 통천에서 차남(몽구)을 얻었다. 이 해에는 조선총독부의 쌀 배급제 실시로 경일상회 간판을 내려야 했다. 그리하여 쌀가게를 정리해 고향으로 내려갔던 것이다. 고향으로 돌아간 정주영은 아버지에게 논 2000평을 사주었다고 한다. 십대 때 훔친 소 판 돈의 몇십 곱을 더해서 아버지께 갚았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몸은 고향에 있었다. 하지만 그의 정신은 서울에 있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준 일자사(一字師) ‘勤(근)’

1940년이 되었다. 서울에서 가장 큰 경성서비스공장의 직공으로 일하던 이을학의 도움으로 ‘아도서비스 공장’을 설립한다. 해방이 되었다. 이듬해인 1946년 봄에 ‘현대자동차공업사’가 탄생한다. 1947년 현대토건사를 설립한다. 자동차에 이어서 건설업에도 손을 댄 것이다. 1950년 1월 현대토건사와 현대자동차공업사를 합병, 현대그룹의 모체가 된 현대건설주식회사를 설립하였고 6·25전쟁이 지나고 1971년 현대그룹 회장에 취임한다. 그의 나이 53세 때다. 이때부터 최고 전성기를 맞이한다.

1987년이 되었다. 정주영은 경영 현장에서 물러난다. 명예회장이 된 것이다. 통일국민당을 창당한다. 정치에 뛰어든다. 대표최고위원이 되었고, 제14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전국구의원으로 당선된다. 어마어마한 저력이 아닐 수 없다. 이 해(12월)에 열린 대통령선거에 통일국민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아쉽게 낙선한다. 경제인으로 삶은 승승장구 성공했지만 정치인으로 삶은 결과적으로 실패한 것이다. 아니다. 실패가 아니고 시련이라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정주영은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필자의 강의는 현대와 깊다. 현대경제연구원·현대하이스코·현대카드·현대자동차 사람들과 인연이 닿았기 때문이다. 2013년 여름에는 울산 HMC 인문학 아카데미에 두 차례 다녀왔다. 강의가 시작되기 전에 복도에 걸린 커다란 편액을 본 적 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인상적인 글귀가 한자로 적혀 있었다.

'一勤天下無難事, 百忍堂中有泰和(일근천하무난사, 백인당중유태화)'

뜻은 이렇다. “하나같이 부지런하면 못 해낼 일이 없고, 백 번을 참을 줄 안다면 집안에 큰 평화가 유지된다”로 풀이할 수 있다. 중국 속담이라고 한다. 이 속담은 대련(對聯)으로 문과 집 입구 양쪽에 거는 용도로 자주 쓰인다. 여하튼 14자의 기막힌 글귀는 생전에 현대그룹 창업자 정주영 회장 자택(청운동)에 걸려 있다가 최근에는 현대자동차 정몽구 회장 자택(한남동)에 걸려 있다고 한다.

정주영의 장남은 몽필이다. 하지만 그는 1982년에 먼저 세상을 떠났다. 따라서 차남 몽구가 집안의 장남이 된 것이니 자연스런 승계라고 할 수 있다.

총 14자의 한자 중에 ‘근(勤)’은 ‘부지런함’을 뜻하는 말이다. 아버지 정봉식이 장남 주영에게 물려준 것은 오직 하나 ‘부지런함’이었다. 일자사(一字師)로 말하자. ‘勤’자 하나다. 이 ‘勤’자 는 다시 장손 몽구에게 이어졌다. 정봉식→주영→몽구 3대가 모두 ‘부지런한 사람들’이다. 이뿐만 아니다. 현대그룹 사람들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2014년, 현대자동차 정몽구 회장은 희수(喜壽, 77세)를 맞이한다. 그럼에도 꼬박꼬박 새벽 6시가 되면 회사로 출근을 한다고 그런다. 대단한 열정이다. 부지런함이다. 아버지 정주영이 아들에게 물려준 가장 큰 유산일 것이다. 4대째, 정몽구의 장남 의선도 부지런하다고 한다. 한 신문에 따르면 ‘어김없이 6시 30분이면 출근한다’고 해서다. 집안 내력이다. 내력은 어쩔 수 없고 정말 못 말리나 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