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글씨를 직접 쓰는 일이 뜸해진 요즘, 아이러니하게 만년필의 인기는 더욱 높아졌다. 아날로그적 감성을 찾는 사람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일부 만년필은 신품보다 중고 가격이 더욱 높아지기도 한다.

지난 1월 22일 종로구의 한 문구점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모나미 볼펜 때문이다. 국민볼펜이라고 불렸던 저가의 모나미153 볼펜, 발매 50주년을 기념해 한정판을 공개했다. 이 모델의 정식 명칭은 ‘모나미 153 리미티드 1.0 블랙’이다. 1만 개 한정 제작했다. 그러나 단 하루 만에 품절되는 기현상이 발생했다.

문구류 파워블로거인 ‘아이러브펜슬’ 운영자 세릭 씨(본명 조세익, 33세)를 만나 모나미 한정판의 뒷얘기와 함께 최근 만년필이 인기를 높여가는 얘기를 들었다.

모나미는 지난해 말 국민볼펜이라고 불렸던 저가의 모나미153 볼펜의 한정판을 생산하기로 했다. 볼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잉크와 심은 독일 필기구 회사인 슈미트 제품을 사용했으며, 보디는 황동 재질에 니켈과 크롬 도금으로 고급스러움을 더했다. 게다가 보디에 ‘153’ 로고를 레이저로 각인해 지워지지 않도록 했다. 가격은 2만원으로 책정했다.

처음 모나미 측은 국내 유명 고급 문구류 판매업체인 교보문고의 핫트렉스나 문구유통 대형 프랜차이즈인 알파 등에 납품을 시도했다. 그러나 대형업체 중 어디서도 납품을 받아주지 않았다. ‘국내 문구업체가 제작한 펜을 누가 2만원이나 주고 사겠느냐’는 이유였다. 결국 중소 문구점 단 한 곳과 3000자루를 판매하기로 계약했다.

그러나 대반전이 발생했다. 완판은커녕 골칫거리라고 예상했던 한정판은 문구류 블로그와 카페를 중심으로 소문이 퍼지기 시작해 판매 당일 오전부터 문구랜드에 긴 줄이 이어졌다. 고급 문구류 판매업체에서 당연히 구매가 가능할 줄 알았던 일부 소비자가 항의하는 사태까지 발생했고, 결국 중소 문구점에 추가납품하기로 했던 한정판 일부는 대형사에 돌아가기도 했다.

완판 비결은 <응답하라 1994> 등 복고 인기, 한정판, 다양성 문화 등이다. 판매 직후 경매 사이트에서는 판매가의 40배가 넘는 가격인 최대 87만원의 호가로 동일 제품이 올라오기도 했다. 현재는 10만원 이내에서 거래가 진행되고 있다.

 

◆ 마니아끼리 통하는 명품도 있어

모나미 한정판 사건처럼 복고의 인기를 실감 나게 보여주고 있는 제품은 또 있다. 바로 만년필이다. 아날로그적 감성을 느낄 수 있다는 이유 등으로 최근 만년필 판매가 증가하고 있다. 일부 만년필의 경우 신품보다 중고가격이 더 높은 것도 있다.

만년필의 전통적인 인기 이유는 품위를 나타내는 척도·상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조금 양상이 다르다. 50만원 이상의 고급 만년필은 경기불황 등으로 판매량이 감소한 대신 10만원 이내의 보급형 만년필 판매량은 오히려 증가했다.

만년필은 공산품이면서도 수제품과 같은 감성을 느낄 수 있다. 즉, 잉크를 넣고 닦아주는 등 관리를 하며, 다른 필기구와 달리 쓰면 쓸수록 사용자의 필기습관에 맞춰 펜촉의 변형이 일어난다. 이런 미세한 변화가 자신만의 만년필을 완성시킨다.

아이러브펜슬 운영자 세릭은 “사실 만년필이 인기가 있는 이유는 높은 가격 때문인 것 같다”며 “남성의 시계와 같이 품격을 나타낼 수 있는 하나의 도구”라고 말했다. 아울러 그는 “만년필은 보통의 펜과 달리 공산품이면서도 수제의 감성을 느낄 수 있다”며 “사용자의 필기습관에 따라 펜촉의 미세한 변화가 발생한다. 이런 변형으로 쓰면 쓸수록 자신만의 펜이 되어 간다”고 말했다.

만년필은 관리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이런 점이 매력 포인트다. 마치 연인과 줄다리기를 하는 듯한 기분이 느껴진다. 자주 사용하지 않거나 닦아주지 않으면 보기에 좋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용하기에 불편할 정도로 잉크가 굳어버린다. 바쁜 일상에서도 짬을 내어 연인과 데이트를 하듯이 만년필과 데이트를 해야 한다. 만약 잉크가 굳으면 연인을 달래주듯 뜨겁지도 그렇다고 차갑지도 않은 물에 살살 풀어주어야 한다.

이렇게 관리가 쉽지 않지만 매력적인 이유는 만년필은 아무리 저렴한 보급품이라도 볼펜과 달리 잉크 냄새가 나며, 연필을 쓸 때와는 또 다른 사각거리는 촉감이 있다. 또한 그립감도 만년필마다 차이가 난다. 오감을 자극하는 이런 느낌 때문에 한번 만년필의 매력에 빠진 사람은 더 좋은 제품, 조금 다른 제품을 기대하는 것이다.

만년필도 한정판이 있다. 그러나 일부 제품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 홍보성인 경우가 많다. 그야말로 ‘한정’이라는 단어로 관심을 불러일으키겠다는 마케팅 전략이다. 또한 최고가로 가격을 책정하는 것도 마케팅 전략 중 하나다. ‘만년필=고급’이라는 이미지를 각인시키기 위해서다. 사람들은 아래를 보지 않는다. 항상 더 높은 곳을 향하려고 한다. 즉, 일반적인 서민이 사용하기 힘들다는 이미지가 마케팅에 더 도움이 되는 것.

‘몽블랑’은 물론 ‘펠리칸’이나 ‘라미’ 등의 유명 브랜드를 보유한 독일의 경우 고급품은 물론이지만 1만원 이하의 보급품들이 학생들에게 많이 팔리고 있다. 최근에는 일본에서도 보급 만년필의 수요가 증가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만년필의 이미지는 고가·성공·품위 등의 상징이미지와 겹쳐 저가의 만년필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문구유통업체에서 몇 번 들여오기도 했지만 거의 판매가 되지 않았다고 하다.

또한 사람들이 구입할 때 가장 중점적으로 보는 것도 사실 필기감 등 사용자 편의성이 아닌 브랜드다. 즉, 자신이 구입하기보다 선물용 만년필이 더 많이 판매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최근 만년필을 수집하는 사람들이 더욱 늘어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다양성 문화가 퍼지면서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만의 취미를 즐기는 사람들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만년필은 다른 수집품에 비해 가격이 그리 고가는 아니지만 만족도는 높다. 특히 과거 만년필을 주로 썼던 사람들이 다시 옛날 만년필을 찾으면서 일부 제품의 경우 중고품이 신품 가격을 훨씬 웃돌기도 한다.

세릭은 “만년필을 사용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낭창낭창 부드럽게 나아가는 느낌이 좋기 때문인 것 같다”며 “소득수준이 높아지면서 과거 가지고 싶었던 만년필을 소장하는 사람도 증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울러 그는 “만년필 마니아들은 제품마다 미세하게 다른 필기감을 즐긴다. 덕분에 마니아들 사이에서만 명품으로 통하는 제품도 있다. 이런 제품들은 대부분 더는 생산되지 않는다”며 “본인이 좋아하는 상품이 중고로 나온다면 신품의 몇 배의 가격을 주고도 소장하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설명했다. 덧붙여 “우리나라는 만년필 거래가 활발하지 않다. 인구 자체가 적어 시장 형성이 힘든 것이 사실”이라며 “인터넷 동호회 등에서는 중고품이 신품보다 더 비싼 가격에 거래되지 못하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마니아들이 증가할수록 만년필 중고거래도 활발해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