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경제협력 영욕의 12년…북한 강경 기조에 경협 ‘올 스톱’ 위기

1998년 9월 평양을 방문한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김용순 조선노동당 비서와 손을 맞잡고 있다.


<이코노믹리뷰>가 창간한 해인 지난 2000년은 우리 현대사에 있어 새로운 전환점을 제시한 해다. 치열한 적대관계에 놓여 있던 남과 북이 사상 첫 정상회담과 공동선언을 통해 평화적 친선 관계로 변화를 이뤘기 때문이다.

그 중 6.15 남북공동선언은 양국 정상이 남북 교류와 화해의 필요성을 공감하고 남북 경제 협력 관계가 더욱 돈독해질 수 있도록 밑거름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코노믹리뷰>는 창간 10주년과 6.15 남북공동선언 10주년을 맞아 그동안의 남북 경협 성과를 되짚어보고, 남북 교류 관계의 오늘과 미래를 진단해 본다. <편집자 주>

남북 경제협력 사업 중 가장 눈 여겨 볼 만한 부분은 역시 관광 사업이다. 그중 금강산 관광과 개성 관광은 현대아산이 독점적으로 운영권을 갖고 진행해온 대표적인 대북사업이다.

반세기 동안 막혀 있던 금강산 길을 연 것은 다름 아닌 황소였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어릴 적 아버지 소를 몰래 판 빚을 갚고 통일의 길을 열겠다”는 소감을 남기고 1998년 6월 황소 500마리와 함께 방북 길에 올랐다.

당시 소는 단순한 물자 교류의 존재를 넘어 남북 경협의 속도를 더욱 높인 촉매제 역할을 했다. 결국 소떼 방북 이후 현대그룹은 금강산 독점 개발권을 따냈다.

소떼가 뚫은 금강산 길, 영영 멀어지나
금강산 관광은 1998년 11월 여객선을 통한 해로 관광으로 시작됐다. 관광 초창기에는 다수의 관광객들이 실향민이었으나, 점차 관광객들의 범위가 가족 단위까지 늘어나기 시작했다.

2003년 9월 육지를 통한 금강산길이 열리면서 금강산 관광객의 숫자는 가파른 상승세를 보였다. 적자를 기록하던 현대아산이 흑자를 낸 것도 이때부터다. 금강산 관광은 2005년 누적 관광객 100만 명을 돌파했고 2008년 7월까지 195만여 명이 금강산을 찾았다.

금강산 관광 사업에는 시련도 많았다. 그동안 금강산 길이 막혔던 적은 모두 3차례다. 1999년 6월에 터진 등산객 민영미씨 억류 사건을 비롯해 중증 급성 호흡기 증후군(SARS) 사태와 정몽헌 회장의 자살 등으로 지난 10년 간 총 110여 일에 걸쳐 관광이 중단됐다.

현재 금강산 길은 막혀있다. 2008년 7월 발생한 등산객 박왕자씨 피격 사망 사건 때문이다. 사건 다음 날부터 금강산 관광은 잠정 중단됐고, 피격 사건의 책임과 진상 규명에 대해 남북 간 공방이 지속되고 있다.

금강산의 최근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북한은 지난 4월 초 금강산 관광의 장기적 중단에 따른 보복조치로 남측 소유의 금강산 지역 부동산을 동결하고 관리인원을 추방했다.

이산가족 면회소 등 남측 정부 소유의 5개 부동산은 이미 몰수됐고 현대아산 등이 소유하고 있는 민간 부동산은 동결됐다. 북한은 “민족끼리 잘 살기 위해 시작한 금강산 관광이 피해만 됐다”면서 “새 관광 사업자를 찾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통일의 지름길이라고 굳게 믿었던 금강산 관광이 개시 12년 만에 최대의 위기를 맞은 셈이다.


‘초강경의 北’ 더 추워진 개성
남북 교류의 ‘옥동자’로 불린 개성공업지구(이하 개성공단) 역시 지난 10년 간 진행됐던 경협 사업 성과 중 가장 눈 여겨 볼 대목이다.

황해북도 개성특급시 봉동리 일원 800만여 평에 조성된 개성공단은 2000년 8월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고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이 체결한 개성공단 개발 사업권 합의문에 따라 2003년 6월부터 개발이 시작됐다.

착공 1년 만에 1단계 지역이 완공되어 신원, 로만손, 재영솔루텍 등 남측 기업들이 하나 둘씩 입주했다. 이곳에는 현재 100여 개 업체의 공장이 가동 중이며, 그 중 절반 정도가 섬유봉제업 등을 맡고 있는 경공업 공장이다.

개성공단은 서울에서 차량으로 2시간 안에 주파가 가능하다는 접근성과 적은 비용으로 우수한 노동력을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 장점으로 작용해 업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순항하는가 싶었던 개성공단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한 것은 2008년부터. 보수 성향 정권의 출범으로 대북 정책 기조가 바뀌자 남측에 호의적이었던 북한의 태도도 180도 변했다.

북측은 2008년 이른바 ‘12.1 조치’를 발표하며 개성공단 운영에 발목을 잡았다. 12.1조치는 경협 목적 인원 전원의 육로 통행 제한, 남북 육로통행 시간대와 인원 수 축소, 개성공단 상주 인원 감축, 남북 간 철도운행과 개성관광 중단, 경협사무소 폐쇄 등을 골자로 하는 남북관계 차단 조치였다.

이 조치로 경의선 화물열차 운행이 중단됐고, 경의선 도로를 통한 남북 간 왕래 횟수가 매일 ‘출경(방북) 12회, 입경 7회’에서 ‘출입경 각각 3회’로 축소됐다.

또 시간대 당 통과 인원과 차량 대수도 이전 500명과 200대에서 250명과 150대로 각각 줄었다. 최대 인원 6000명, 차량 2400대에 이르렀던 1일 북한 출입 규모는 인원 750명과 차량 450대 수준으로 대폭 제한됐다.

결국 12.1조치로 통행 가능 시간대의 폭이 대폭 줄어들면서 생산품 반입이나 원자재 반출 등이 원하는 때에 이뤄지지 못해 물류 비용이 추가로 발생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여기에 2009년 북측 정부가 개성공단 내 남측 기업에 대한 혜택 부여를 중단하겠다고 선언해 또 한 번 위기를 겪기도 했다. 당시 북측은 “6.15 공동선언과 10.4 공동선언을 부정하는 자들에게 특혜를 줄 수 없다”는 짧은 통지문으로 남측 정부를 압박했다.

사안마다 강경한 태도를 보이며 파국으로 치달았던 개성공단은 2009년 8월 북측이 12.1 조치를 해제하면서 큰 고비를 넘겼다. 경의선 도로 출입경 절차도 예전처럼 늘어나 물류 이동에 다시 숨통이 트였다. 다만 1년 만에 10만여 명의 관광객을 동원하며 인기몰이에 나섰던 개성시내 관광 코스는 다시 열리지 못했다.

정백현 기자 jjeom2@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