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부터 10여 명의 주요기업 총수들이 법정에 서고 있다. 새해 들어 선고를 기다리는 재벌그룹 총수만 8명에 이른다. 새 정부 들어 ‘대기업 총수 수난사’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 정도다.  그룹 총수들의 혐의 가운데 ‘배임’이나 ‘횡령’ 등의 혐의가 빠지지 않고 따라다닌다는 점이 눈에 띈다. 배임 혐의는 기준과 원칙이 불명확 해서 현행법 개정 여론이 일기도 했지만 횡령 혐의만큼은 법리 적용에 이견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최근 CJ 이재현 회장 재판 과정에서 이른바 ‘부외자금(簿外資金)’을 무조건 횡령으로 바라볼 수 있는가라는 논란이 불거지고 있다. ‘부외자금’이란 회계장부에서 누락된 자금을 통칭해서 일컫는 용어로 ‘장부외자금’이라고도 부르고 일반적으로 비자금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문제는 과연 기업에서 장부에 기록하지 않고 사용하는 자금이 있을 수 있는지 여부와 이를 어떤 용도로 사용하고 있는지로 귀결되고 있다.

그동안은 ‘비자금=부정한 돈’이라는 인식과 함께 기업의 총수가 개인적인 용도로 축적하거나 사용해온 자금 정도로 인식돼왔다. 하지만 이재현 회장 재판과정에서 “부외자금 운영은 오랫동안 기업의 관행이었으며 개인적인 용도로만 사용하지 않았다”라는 증언이 나오면서 기업의 부외자금 운영 여부와 사용 용도에 관심이 쏠리기 시작했다.

 

“부외자금? 기업에만 있을까?”

‘횡령’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너무 강한 탓에 기업 담당자들은 이와 관련한 입장 표명에 매우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하나같이 ‘익명’을 요구했지만 부외자금 운영 여부와 어쩔 수 없이 편법과 불법을 오갈 수밖에 없는 현실만큼은 인정했다. 그러면서도 총수나 대표가 기업 자금을 개인적인 용도로 유용하거나 축적, 혹은 해외로 빼돌리는 경우를 배제하고 불가피하게 ‘부외자금’을 운영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토로했다. ‘현금성 자금 운영의 관행’과 ‘한국적 상황’이라는 특수성 때문이라는 것이다.

‘부외자금’이 사용되는 대표적인 예로는 기업의 ‘현장격려금’이나 ‘경조사비’, ‘접대비’, 일부 ‘회식비’ 등을 꼽았다. 기업 대표가 어려운 현장을 방문해 직원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면서 회식비 혹은 격려금 조로 현금을 지급하는 것은 그동안 ‘통 크고 인자한 경영인의 모습’처럼 그려졌다. 하지만 이를 ‘현장 격려금 1천만원 지급’ 이라고 장부에 기록하면 회계상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영수증 처리가 안 되니 장부에 기록할 수 없다는 것. 한 기업 담당자는 “회장님이 오지나 힘든 현장에서 고생하는 직원들에게 회식비를 주면서 급여통장을 이용하거나 카드를 빌려주는 것이 가능하냐?”며 “그렇다고 영수증 챙겨서 꼭 회계 담당자에게 보고하라고 하는 것도 상황에 맞지 않다”고 항변했다.

이처럼 현금성 자금 운영은 기업 경영 차원에서 일종의 필요악처럼 인식되어 관행적으로 이용돼왔고 검찰과 세무당국의 조사에서도 기업의 적극적인 소명이 뒤따른다면 ‘정상참작’이 이뤄지는 부분처럼 인식된 것. 한 그룹사 관계자는 “오너의 다양한 활동과 목적으로 현금성 자금이 필요하고 예전에는 이를 만들기도 쉬웠는데 지금은 세무당국에서 이를 인정조차 하지 않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불법과 탈법을 오가는 것이 현실”이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물론 이런 일이 기업에서만 벌어지는 것은 아니다. 한 기업 담당자는 “가정에서도 가족 모르게 비상금 조로 보유할 수 있고, 때로는 깜짝 이벤트나 선물을 준비할 수 있는데 이를 법적으로 파헤친다는 것은 무리가 있지 않느냐”고 답답함을 토로했다. “하물며 가정에서도 그런데 수천, 수만 명이 근무하는 기업에서 이런 일이 어디 한두 가지겠느나”는 것이다.

개인적인 용도가 아닌 부외자금 사용의 또 다른 예는 그야말로 이른바 경영적 판단에 따른 것이다. 경영권 확보나 방어 차원에서 장외 지분을 추가로 매입하거나 때로는 해외에서 자재를 구입, 선비축하는 데 사용됐다. 이른바 기업 총수의 비자금 조성으로 인한 횡령 혐의가 적용되었지만 사적 유용 혹은 불법 로비자금은 아니라는 것이 해당 기업의 입장이다.

회계의 투명성이라는 대전제를 외면하거나, 반대할 사람은 없겠지만 한국만의 특수성을 감안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이른바 로비 자금에 대해서는 기업의 책임만 묻는 것은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로비 자금이 필요한 것은 어느 기업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라며 “그동안 관행처럼 이뤄진 정관계 로비 자금이 주는 쪽이 아니라 받는 쪽에서 먼저 요구하는 경우 많아 어쩔 수 없이 부외자금을 보유할 수밖에 없다”고 공공연한 비밀을 전했다. 그는 “로비 자금 문제는 우리 사회가 함께 풀어야 할 숙제이고 계속해서 기업에만 책임을 묻는 것은 지나치다”고 덧붙였다.

“기업만 책임질 문제 아니다”

결국 총수가 개인적 용도가 아닌 기업 차원으로 운영되는 부외자금을 과연 어떻게 투명화할 것인지와 ‘회장님 처벌’ 외에 다른 대안은 없는지 성숙한 논의가 필요한 상황이다.

이와 관련해서 지난해 일부 공론화가 진행된 ‘배임’ 혐의 예외 논의도 회계 부분에서 적용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제시됐다. 한국경제연구원 기업정책연구실 신석훈 박사는 “해외 선진국들은 사안별로 접근하는데 우리나라는 법 적용을 획일화하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개인적 유용이 아닌 회사 운영과 관련된 자금 비축은 다른 판단이 필요하다”며 “선진국들처럼 배임 혐의에 대한 경영판단의 원칙도 횡령 부분에서 일부 적용할 만하다”고 설명했다.  ‘경영판단의 원칙(Business judgement Rule)’이란 기업의 임원과 이사가 내린 결정이 손실로 이어졌더라도 ‘선의(good faith)’에 의한 것이었다면 소송이나 처벌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는 것이다. 경영판단의 원칙은 자유로운 기업활동을 보장하기 위해 미국과 독일, 일본 등 선진국에서는 이미 시행되고 있는 대표적인 제도다.

부외자금에서 가장 문제되는 로비 자금 사용과 관련해서도 로비 자금 조성만 처벌할 것이 아니라 기업에 대안을 제시해줄 필요가 있다는 주장도 있다. 한국회계사협회 법제팀 최광선 변호사는 “외국은 로비스트 등록 절차를 갖추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로비와 관련된 어떠한 규범이나 제도가 없다”면서 “로비와 관련된 부외자금 운영을 형법 20조 정당행위 차원에서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형법 20조 정당행위란 법질서 전반에 걸쳐 허용되는 행위로 그동안 음성적으로만 진행되진 일들을 사회적으로 합의된 가이드라인을 분명히 제시하고 제도권 안에서 논의하자는 내용이다.

부외자금을 회사 운영에 사용한 것이라면 양형기준도 바뀔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법무법인 광장의 김상곤 변호사는 항목유용을 부외자금에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항목유용은 책정된 예산이 다른 용도로 사용된 경우 횡령이 아니라는 판례에 기반한다. 김상곤 변호사는 “총수가 개인적으로 이득을 취하거나 착복한 것이 아니라면 항목유용을 적용할 필요가 있다”면서 “총수가 기업에 손해를 끼쳤다면 손해배상이나, 민사, 행정조치로도 충분히 처벌할 수 있는데 너무 과하게 형법을 적용하고 그마저도 액수가 많으니 지나치게 과도한 양형기준에 따르게 된다”고 지적했다. 김 변호사는 “배임과 횡령이 항상 같이 따라다니니 기업하는 사람들은 늘 교도소 담장 위를 걷는 기분이 든다고 한다”라고 심정을 전했다.

 

“결국엔 경영권 강화 수단인가”

그럼에도 관련 학계나 법조계 등 대다수는 기업의 부외자금, 혹은 비자금 운영과 관련해 비판적인 목소리가 압도적이다. 이들은 일부 기업의 부외자금 논란과 관련해 ‘기업을 어떻게 바라볼지 철학과 가치관이 왜곡된 것’이라고 강조한다. 한국경제법학회 회장인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김상규 교수는 “기업은 법인이고 법인도 하나의 인격체로 봐야 한다”고 못박았다. “기본적으로 기업의 돈은 총수나 일가 개인 것이 아니다”고 전제하고 “기업 자금을 총수 마음대로 사용한다면 주주나 채권자 등은 뭐가 될 것인가”라고 반문했다. 기업 자금의 운영과 관련해서는 자유로운 기업 운영을 강조하는 선진국에서 더욱 엄격하고 냉철하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선진국들은 자기 돈이 아닌 자금을 사적으로 이용하는 것에 매우 엄격하다”면서 “그 용도가 아무리 선하고 때로는 개인적이지 않다고 하더라고 출처가 부정하거나 공금 성격이 있다면 반드시 처벌하는 양상”이라고 지적했다.

심지어 미국과 영국 등 선진국에서는 기업의 로비 자금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경제개혁연대 이지수 변호사는 “선진국에서는 이해단체가 등록된 로비그룹을 운영하고 사용 금액은 반드시 기록에 남기도록 하고 있다”면서 “기업이 사용하는 로비 자금은 뇌물로 엄히 다스리는 상황”이라고 비판했다. 또 이 변호사는 기업이 불가피성을 주장하는 현금성 부외자금과 관련해서도 “결국은 총수와 일가가 경영권을 강화하기 위한 사적 용도”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기업 회장이 현장에서 금일봉, 격려금 등 이른바 거마비를 사용하는데 그로 인해 총수 개인이 직원들에게 칭찬을 듣지 다른 등기이사에게 공이 넘어가지 않는다”며 “기업의 매출을 위한 판공비나 접대비도 세무당국에서 일부 인정해주긴 하지만 갈수록 줄어드는 추세”라고 강조했다.

 

경실련 경제정책팀 김한기 팀장 “기업 예외 두면 공익보다 사익으로 갈 것”

부외자금 논란은 결국 기업 투명성과 지배구조 문제로 귀결된다. 회사에 아무리 총수 일가의 지분이 많다 하더라도 주주나 이해당사자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부외자금을 개인적인 용도로 착복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해관계가 다른 구성원들이 존재할 수 있다. 기업의 자산은 총수나 일가의 개인 재산이 아니다. 회계 투명성이 선행되어야 건전한 지배구조도 만들어질 수 있다. 그동안 관행처럼 불법 로비 자금을 형성하고 사용할 때 개인적인 용도나 투자가 아니었다고 항변하지만 부외자금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만큼 전횡이 관행처럼 있어 왔다는 것이고 결국 총수나 일가의 지배력을 확장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든 것이다. 회계를 투명하게 기록하고 이를 주주나 이해관계자에게 공개해 함께 판단해야 지배구조도 투명해질 수 있다. 기업의 행태는 그 나라, 사회의 문화나 경제발전 구조와 함께 간다. 기업 활동이라도 그동안 재벌이 성장해온 것처럼 예외를 두고 인정한다면 그 이익은 국가 전반의 이익보다 개별기업, 총수 일가의 사익으로 흘러갔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한국경제연구원 기업정책연구실 신석훈 박사 “처벌만이 능사 아니다”

기업들의 비자금을 옹호할 생각은 없다. 다만 사적 운영이 아닌 부외자금 축적과 처벌하는 지금의 상황은 과도기라고 봐야 한다. 현실과 법이 충돌하는 상황인데, 문제는 권력이 이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한쪽에 죄를 묻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가장 가혹한 형법으로 처벌하고 있다. 형법은 무죄 아니면 유죄다. 다른 조치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행정조치나 민사도 있는데 형법으로 처벌하니 곧바로 죄인, 범죄자라는 낙인이 찍히는 극단적인 방법이다. 그렇다고 기업의 부외자금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는지 묻고 싶다. 기업 총수가 부외자금을 운영하는 가장 큰 이유는 경영권 안정화와 방어 차원일 수 있다. 총수 입장에서는 기업과 경영권이 사방으로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데 이를 막아줄 제도나 규제가 없다. 그러니 전쟁이 안 나도 국방비를 늘리는 심정으로 비축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그 나마 경영권 방어 수단 역할을 해 온 게 순환출자방식이었는데 이마저도 금지되고 말았다. 외국은 ‘포이즌필(poison pill)` 이나 차등의결권과 같이 돈을 들이지 않고 경영권을 방어할 수단이 있는데 한국은 그렇지 못하다. 로비자금 운영도 마찬가지다. 과잉된 정부규제와 인허가 등 때문에 다양한 형태의 지출이 필요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