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부채 1000조, 은행예금 1000조

돈맥경화부터 풀어야

 

우려했던 가계대출 1000조원 시대가 결국 현실화됐다. 사실 시간문제였을 뿐 예정된 행보였다는 게 시장의 반응이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은행 예금 잔액 역시 사상 처음으로 1000조원을 돌파했다. 저금리 기조에도 불구하고 마땅한 투자처가 없어 손해를 보느니 원금이나 지키자는 심리가 작용했기 때문.

참으로 아이러니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갚을 돈이 없어 빚에 깔려 죽는 이들이 넘쳐나는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투자할 곳이 없어 돈을 움켜쥐고 있는 상황이라니.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양극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이와 관련 백홍기 현대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물론 양극화가 심해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라며 “하지만 근래 요구불예금에 자금이 몰리는 데에는 미래가 불안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넣어두는 케이스가 더 많다”고 말했다.

한국은행과 금융권에 따르면 지난해 10월 기준 국내 은행의 평균 예금잔액이 1001조4370억원으로 사상 처음으로 1000조원을 넘어섰다. 월말 잔액 기준으로도 지난해 6월에 이어 9월, 10월 등 세 차례나 1000조원대를 유지하면서 은행 예금 1000조원 시대의 본격적인 신호탄을 쏘아 올린 게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지난해 10월 보통예금, 당좌예금 등 단기성 자금으로 분류되는 요구불예금은 101조9120억원으로 전년 대비 13.4%나 증가했다. 반면 정기 예▪적금 등 저축성예금은 907조4275억원으로 전년 대비 2.7% 늘어나는 데 그쳤다.

백 연구위원은 “현재 한국의 경제성장률이 2%대에 머물러 있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 회복세로 돌아서고 있으며 1인당 국민소득도 늘고 있다”며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에 대한 기대감 상실로 소비시장이 살아나지 못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언제 해고될지도 모르는 상황에 비정규직은 늘어나는 등 일자리 불안과 대책 없는 부동산 시장으로 인한 주거불안, 노후불안 등으로 소득이 오르고 경제가 성장하더라도 당장 돈을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다. 백 연구위원은 “따라서 요구불예금의 급증은 오히려 경기가 좋지 않음을 반영해주는 사례”라고 말했다.

하지만 역시나 한국 경제의 발목을 잡는 가장 큰 문제는 가계부채다. 경제가 회복세로 돌아서고 있다고 하지만 돈을 벌기가 무섭게 빚 갚는데 사용하는 게 국민의 현실이다. 정부는 “현재 1000조원에 이르는 가계부채는 충분히 관리 가능한 수준”이라고 말한다. 사실 경제 규모가 커지면 부채가 늘어나기 마련이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핵심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며 “요점은 부채 규모가 아니라 부채의 증가 속도”라고 지적했다.

2004년 당시만 해도 약 494조원이던 가계부채는 8년여 만에 두 배 이상 불어났다. 매년 50~60억원의 가계빚이 늘고 있다. 소득보다 빚이 늘어나는 속도가 더 빠르다고 한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실제 지난해 6월 말 기준 개인 가처분소득에 대한 가계부채 비율은 137%를 찍을 예정이다. 이는 역대 최고치다.

우리 경제의 최대 뇌관이라 불리는 가계부채. 과연 해결방안은 없는 것일까. 열쇠는 부동산 시장에 달려 있다. 하지만 이 역시 마땅한 답이 없다. 현 정부가 부동산 시장을 살리기 위해 지난해 시행했던 ‘4▪1 부동산 대책’과 ‘8▪28 전월세 대책’으로 부동산 매매가 어느 정도 살아나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가계부채를 더 키웠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심지어 ‘빚 권하는 정부’라는 말까지 나돈다.

임희정 현대경제연구원 경제동향분석실장은 “경기가 2~3%대로 전환되는 회복시기에 정부가 대출을 좀 더 유도해야 할 것”이라며 “금리를 낮춰 가계빚에 허덕이는 서민들의 부담을 덜어주고 돈을 움켜쥐고 있는 사람들은 돈을 쓸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임 연구위원은 이어 “물론 금리를 낮추면 당장 일시적으로는 가계부채 규모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지금 더욱 시급한 문제는 막혀 있는 자금의 흐름을 뚫어 선순환을 이루게 하는 것”이라며 “정부는 대출을 좀 더 많이 해주는 은행에 어느 정도 인센티브를 주고 은행은 현행의 리스크 강화 규제를 완화시켜 서민들이 이자를 갚을 수 있도록 저리에 대출을 받게끔 유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장기적 측면에서 보면 결국 사람들이 소비를 시작하게 될 것이고 시장에 돈이 돌면 투자가 이뤄지고 이에 따라 고용이 창출되는 등 자금흐름이 선순환 구조로 돌아설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정부는 ‘가계부채 1000조원’이 현실화되자 부랴부랴 대책 마련에 고심하고 있다. 이달 중 ‘가계부채 관리방안’을 마련해 대응에 나설 예정이라고 한다. 하지만 금리가 높은 제2금융권의 대출규제를 강화하고 고액 전세대출을 억제하는 등 단순한 처방에 그칠 것이라는 게 알려지면서 오히려 국민의 우려만 키우고 있다. 버는 돈보다 갚아야 할 빚이 더 많거나 돈이 있어도 미래가 불안해 차마 쓸 수 없는 국민의 팍팍한 삶에 언제야 해 뜰 날이 찾아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