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가 요즘 통합진보당 해산 심판과 관련,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회사 근처인 헌법재판소 옆을 지날 때마다 헌재 내에 있는 600년 된 백송(白松)에 눈길이 가곤 한다.아마도 이 백송은 수백년간 숱한 풍상을 겪으면서도 꿋꿋하게 제자리를 지켜왔을 터이다.

안국동 인근에는 창덕궁, 운현궁과 북촌마을뿐 아니라 개교 100년을 훌쩍 넘긴 유서 깊은 재동초등학교도 있다. 얼마 전 재동의 유래에 대해 듣고 묘한 충격을 받은 기억이 새롭다. “때는 조선 단종시절.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은 왕의 자리에 오르고자 단종을 따르던 신하들을 무차별하게 참살했다. 영화 ‘관상’에도 등장하는 내용이다. 이때 죽임을 당한 신하들의 수가 하도 많아 흘린 피가 잘 씻기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피비린내도 엄청났다고 한다. 그래서 이를 덮기 위해 신하들이 죽은 자리마다 재를 뿌렸다고 한다. 그래서 이 동네 이름에 잿가루의 재가 붙어 ‘재동’이라는 특이한 이름이 붙었다는 것이다.”

재동의 유래를 들으면서 불현듯 대한민국의 현실이 오버랩되듯 스쳐 지나간다. 조선시대 세조의 ‘신하 물갈이’나 현 박근혜 정부가 진행중인 ‘공사장 물갈이’가 별반 다르지 않은 것으로 비쳐지기 때문이다. ‘왕(대통령)이 바뀌었으니 신하(공사장, 기관장)들은 다 물러나야 한다’는 메시지는 고금(古今)을 막론하고 아직도 유효한 것인가? 이런 메시지를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KT 같은 기업에 적용하면 어떨까?KT는 ‘한국통신’으로 출발했지만 2002년 민영화된 기업이다. 민영기업으로 자리 잡은 지도 벌써 만 11년이 됐다. 그런데도 이석채 회장의 전격적인 사퇴를 ‘보이지 않는 손’, 즉 정권 차원의 손보기로 이해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번에 불거진 이석채 회장 배임 혐의 건은 사퇴 압박을 종용하는 카드라는 말도 나돌고 있다. 이명박 정권 때 취임한 CEO인 만큼 박근혜 정부에서 껄끄러워하는 분위기가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아직도 실질적 주인이 없으면서 공기업 성격이 강한 KT의 최고 수장 자리에는 정부의 ‘낙하산 인사’가 가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냐는 ‘관치(官治) 시각’ 역시 여전히 남아 있다.지난 3일 사의를 표명한 이석채 회장은 임직원에게 보낸 이메일을 통해 솔로몬 왕 앞에서 부모의 마음으로 사퇴 결정을 했다는 주장을 폈다. 지금 물러서면 배임 등 자신을 둘러싼 모든 혐의가 마치 사실인 양 호도될 수도 있지만 회사를 살리기 위해 결단을 내렸다는 목소리였다.

이석채 회장은 KT CEO로 취임해 지난 4년여간 많은 변화를 이끌었다. 실질적 평가는 좀 더 기다려야 하겠지만 총체적으로 사업방향을 잘 잡아놓았다는 긍정적 평가를 받기도 했다. 현재 이동통신사의 국내 수익창출 부문은 포화상태다. 전 국민이 대부분 통신사 가입자다 보니 통신업체 간  뺏고 빼앗기는 무한 제로섬 게임만 진행 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래 수익을 해외에서 찾으려는 이 회장의 시도는 현명한 판단인 것으로 해석된다. 아프리카에 통신 인프라를 깔아 수익을 내면 아프리카의 발전에도 도움이 되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비즈니스라고 할 만하다.일각에선 이번 KT사태의 핵심에 노동조합과의 갈등이 숨어 있다는 설을 제기하기도 한다. KT에는 노조가 두 개다. 한국노총에 가입한 현 KT노동조합과 여전히 민주노총과 끈이 닿아 있는 ‘KT새노조’가 바로 그것이다. 이 회장에 대한 배임 혐의 건은 KT새노조 측이 참여연대, 전국언론노동조합 등과 손잡고 문제 제기를 했다는 것이 소식통들의 관측이다. 과거 민주노총에서 핵심 역할을 담당하던 KT노조가 이석채 회장 취임 후인 지난 2009년 민노총 전격 탈퇴를 선언하자 노조에 밉보인 이 회장이 이들 연합세력의 ‘공공의 적’ 1호가 됐다는 시각도 있다. 통신업계의 한 소식통은 이번 이 회장 사퇴와 관련해 “KT가 민주노총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이 회장 사퇴를 둘러싸고 CEO 자리를 연임한 것이 사태의 화근이라는 시각도 없지 않다. 많은 불만세력을 끌어안지 못한 상황에서 결국 사퇴의 불씨를 자초했다는 지적인 셈이다.이런 상황에서 정준양 포스코 회장의 사퇴설이 솔솔 흘러나오는 것을 지켜보면서 수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정 회장은 이미 이 회장과 비슷한 처지여서 동병상련의 고민을 나눴을 법한 케이스가 아니던가.기업의 수장 자리를 놓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CEO가 부평초처럼 흔들리는 현 상황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 CEO의 임기가 새로운 대통령의 의지나 입김에 좌우되는 것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시시비비야 결국 가려지겠지만 기업 CEO들이 외압에 더는 휘둘리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솔로몬 왕이 환생한다면 이석채 회장, 정준양 회장, 그리고 ‘보이지 않는 손’ 가운데 누구 손을 들어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