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보다 진한 눈물겨운 사업

한지붕 아래 살았던 자매는 결혼 후에도 성북동에서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 만큼 가까운 정(情)을 나눴다고 한다. 그러나 이 자매에게는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보다 ‘피보다 더 진한 것이 비즈니스’라는 말이 더 어울리겠다.

최근 유동성이 악화된 동양그룹이 도움을 요청했지만 오리온그룹은 지난 23일 “그룹과 대주주들은 동양그룹에 대한 지원 의사가 없다”고 명확히 선을 그었다. 동양그룹 현재현 회장·이혜경 부회장 부부, 오리온그룹 담철곤 회장·이화경 부회장 부부 등은 이번 추석 때 지원 여부를 논의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담 회장은 당시 논의에서 보유 중인 오리온 지분을 담보로 제공했다가 그룹 전체 경영권을 위협받을 수 있다는 점을 크게 우려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혜경 부회장과 이화경 부회장은 동양그룹 창업주 고 이양구 회장의 딸로 현 회장과 담 회장은 동서지간이다. 이번 오리온그룹의 결정으로 그동안 비교적 순탄한 관계를 이어왔던 양자 사이에 성북동 담벼락이 아닌 보이지 않는 ‘벽’이 생긴 것 아니냐는 주변 판단도 더해졌다.

그동안 두 자매는 그룹에서의 활동 방향이 달랐다. 동생인 이화경 부회장은 ‘철의 여인’으로, 언니 이혜경 부회장은 ‘내조의 여왕’으로 통했기 때문이다.

1956년 2월 15일생인 이화경 오리온그룹 부회장은 이화여자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했다. 화교 집안 출신인 남편 담철곤 회장과는 국내 외국인고등학교에서 만나 10년 연애 끝에 1980년 결혼에 성공했다. 재벌가에서는 보기 드물게 연애결혼을 했기 때문에 이들의 러브스토리는 재계에서 큰 관심거리로 떠오르기도 했다. 두 사람은 담 회장이 미국 조지워성턴대로 유학을 가 4년간 떨어져 지냈을 때도 편지로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애틋한 사랑을 키워왔을 정도로 재계에선 잉꼬부부로 통한다.

이 부회장은 현장에서도 잔뼈가 굵다는 평가를 받는다. 다른 2세 경영인들과 달리 이 부회장은 동양제과(현 오리온제과)에서 인턴사원부터 시작해 모든 부서를 돌았다. 내부 직원들 사이에서는 ‘철의 여인’으로 불렸다는 게 관계자들의 얘기다.

1975년 동양제과에 사원으로 입사해 구매부 차장, 조사부 이사, 마케팅부 이사 등 각 부서에 근무하면서 사원의 눈으로 본 현장 분위기와 실무진의 고충까지 포괄하는 여성의 섬세함을 보여줬다. 2000년 11월, 입사 26년 만에 대표이사 자리에 올랐다.

마케팅 담당 상무 시절에는 ‘정(情) 시리즈’ 광고 덕분에 초코파이 매출을 두 배 이상 끌어올리는 대박을 터뜨렸다. 이를 계기로 ‘오리온 초코파이=정(情)’이라는 공식을 많은 소비자에게 인식시켰다. 이 사장은 1998년 스위스 경제포럼(WEF)이 뽑은 1998년 ‘미래의 세계지도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 부회장은 지난 1997년 사내 보급용으로 아버지의 일대기를 담은 책을 발간해 사내 직원들과의 감정 교류에도 적극 나섰다. 서남 이양구 회장의 일대기를 담은 <사람을 사랑한 함경도 아바이>에서 이 부회장은 “친구 같은 아버지셨고, 비즈니스에서는 좋은 역할 모델이다. 어떤 난관 속에서도 긍정의 힘을 발견하는 불굴의 의지나 자유정신을 지금 본받으려 한다”며 “사업을 할수록 아버지를 닮아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 부회장이 남편 담철곤 회장과 경영 일선에 나서는 것과 달리, 언니인 이혜경 동양그룹 부회장은 ‘내조의 여왕’ 스타일이다. 1952년 3월 19일생인 이 부회장은 중매로 만난 남편 현 회장에게 경영 대부분을 맡기고 본인은 가정살림에 충실해온 것으로 전해졌다.

아울러 이 부회장은 전공을 살려 동양메이저와 동양매직 고문 등으로 활동해왔다. 일선에는 직접 나서지 않았지만 필요할 때는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 스타일이라는 것.

지난 2008년 동양그룹이 디자인경영을 선언하면서 이 부회장은 이화여대 생활미술학과를 졸업한 이력을 살려 그룹의 디자인경영을 총괄하는 CDO(Chief Design Officer)로 나섰다. 그는 전문가적인 감각과 실무능력을 발휘하며, 1990년부터 동양매직 디자인 담당 고문으로 일해왔다. 동양증권 골드센터도 이 부회장의 작품이다. 을지로 본사, 강남 목동의 골드센터 디자인 작업에 참여한 이 부회장은 직원 회의실 탁자와 의자까지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고 한다.

웨스트파인 골프장의 클럽하우스 디자인도 이 부회장이 직접 도안했다. 클럽하우스 지붕은 실내온도를 자연적으로 조절할 수 있도록 설계했으며, 천장을 높게 지어 맞바람 효과를 노렸다고 한다. 관계자에 따르면 디자인경영을 선언한 후 경영 디자인과 관련해서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만 그 외에는 남편 현재현 회장을 내조하는 데 집중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재계에서는 오리온그룹이 동양에 대한 지원불가 의사를 밝힌 데 대해 내부적으로 자금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내놓았다. 이에 대해 한 측근은 “바이더웨이, 온미디어, 제미로 엔터테인먼트를 팔아 2조원의 유동성을 확보한 상태”라며 “자금 부실이 아니라 경영권 안정화를 위한 결정이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스포츠 토토, 쇼박스도 잘되고 있으며 매년 4월 고 이양구 회장의 추도식과 10월 이관희 서남재단 이사장의 생일에도 정기적으로 모인다”며 동서·자매지간 역시 전혀 문제가 없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