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5월 초 한 신문사 데스크 회의.

  “대단하지 않소? 어린 처자가 미국에서 큰 성공을 거둔 것이니. 요즘 나약한 젊은 여성들에게 좋은   롤모델이 될 것이오.” “방송들이 대대적으로 보도하니까 저희도 비중 있게 다루시죠.” “그럼, 사회면에 사이드 톱으로 올리고 문화면에는 해설박스를 싣도록 하시오. 공항사진은 1면 배꼽 에 넣든가 하고. ” “저... 편집국장님,혹시 그 모델의 모습을 보셨나요?” “경제부장이 왜 신경을 쓰시오? 세계적인 모델이라지 않소?” "젊은 여성들의 롤모델이 되기엔 좀 그래서요. 컴퓨터 화면을 직접 보시고 나서 결정하심이…”

이날 미국 플레이보이지 첫 동양인 표지모델 이승희가 방한했다. 젊은 세대 중심의 PC통신 공간에서 진작부터 스타였던 터라 한국 언론은 무작정 ‘세계적인 성공사례’라고 보도하고 있었다. 내가 적을 뒀던 신문사 데스크 회의에서도 ‘금의환향’으로 다뤄졌다. 김포공항에는 200여 명의 취재진이 몰렸고, 공중파-케이블을 가리지 않고 방송들은 게스트로 모시려고 줄 섰다. CF모델 계약도 잇따랐다. 보수적인 한국사회에서 일개 누드모델이 일으킨 ‘뜬금없는’ 신드롬이었다.

물론 신드롬이 오래 가진 못했다. 취재 목적(?)으로 뒤늦게 PC통신을 배운 언론사 간부들이 ‘적나라한’ 그녀의 모습을 보고 만 것이다. 아무튼 그녀 덕분에 당시 국내 PC통신 가입자는 중년 이상의 세대로까지 급속히 저변을 확대할 수 있었다.

1970년대 중반 비디오테이프 리코더(VTR) 출시 때도 미국 시장의 첫 반응은 뜨뜻미지근했다. 사람들은 이 기기를 가족행사나 미식축구 경기를 녹화해 보는 용도쯤으로 여겼다. VTR로 영화를 보기에는 당시 TV 화면이 너무 작았다.

그러던 어느 날 판매대에 쌓여 있던 VTR이 ‘조용히’ 그러나 불티나게 팔려 나가기 시작했다. 이 기기를 유심히 지켜보던 포르노 제작자들이 VTR 전용 에로물을 집중 제작해 전 세계 안방을 공략한 때문이었다.

 

인간이 하는 모든 일에는 운칠기삼(運七技三)의 원리가 작동하는 것 같다. 훗날 회고할 때는 모든 전개과정이 논리적으로 설명이 가능해 보이겠지만,그 과정 중에 있는 사람의 눈에는 전혀 예상치 못하는 '운명의 돌발'들 말이다.

호사가들의 말마따나,이승희가 인터넷강국의 토대를 깔아주고 포르노감독들이 VTR의 확산을 주도하리라고 누군들 예측할 수 있었으랴.

모두가 포기한 시점에, 될 사업은 되게 만들어 주는 '돌발' 을 "방아쇠(trigger)가 당겨졌다"고 한다. 지지부진하거나 추락하던 매출이 폭발적 성장으로 반전되는 모습이 마치 방아쇠가 당겨져 총알이 튀어나가 듯 하다는 뜻이다.

오래 전부터 방아쇠가 당겨져야 할 것 같던 분야가 있었다. 관전자로서 전혀 답이 없어 보이던 분야,  ‘e북’으로 불리는 ‘전자책’ 이다. 나는 도구의 필요성은 백번 인정하면서도,그 사업이 단기간내에 성공할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지난 10여 년간 스마트폰, 태블릿PC에 이어 전자책 전용 단말기에 이르기까지 도구가 혁신을 거듭했더라도, 과연 도구의 편리함이 종이 책을 버리게 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그런데, 실패로 끝날 것 같던 전자책 시장에도 ‘방아쇠’가 당겨졌다. 출판시장에 19금 소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가 등장한 것이다. 거친 성적 취향이 노골적으로 묘사된 이 3부작 에로소설은 지난해 8월 국내 번역 출간된 이후 전자책이 종이책만큼이나 팔렸다고 한다.

전자책 구매자의 80% 이상이 여성이고, 다운로드 시간대가 주로 심야라고 하니 구매동기는 미뤄 짐작할 만하다. 결국 사람들은 전자책의 경우도 VTR처럼 ‘은밀히 즐겨야 하는’ 성인물에서 첫 쓰임새를 발견한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전자책을 ‘음지’의 포르노소설용으로 폄하할 일은 아니다. 인터넷과 VTR이 그러했듯 ‘양적 변화가 일정 단계에 도달하면 질적 변화를 초래한다’는 마르크스-엥겔스의 양질전화(量質轉化) 원리가 전자책 분야에서도 적용될 것 같다.

양서(良書)인 얀 마텔의 <파이 이야기>는 상반기에만 전자책으로 1만 권이나 팔렸다고 하지 않는가. 전자책의 ‘양지’도 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