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무연 GS안과 대표원장

만추(晩秋)를 지나 어느덧 가지에 붙은 잎이 귀해지는 계절이다.

쌓여있는 은행잎을 치우는 일이 각 구청마다 여간 골치거리가 아니라고 하는데 불과 10 여년 전 은행잎 추출물을 내세우며 여러 회사에서 경쟁적으로 신약 광고를 하던 것을 기억하니 격세지감(隔世之感)이다.

세상사에는 유행이라는 것이 있기 마련이고 그 흐름을 잘 타야 경제적으로 성공하기 쉽지만 쓰레기 봉투에 담겨 청소차로 밀려나는 은행잎 더미가 마치 철없는 유행의 뒷모습인 듯하여 씁쓸한 생각이 든다.

돌이켜보니 의사 생활을 하면서도 의지에 관계없이 무작정 흘러가던 때가 있었다. 매년 이맘때면 각 대학병원에는 인턴, 레지던트는 물론 교수요원 선발 시험이 줄줄이 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레지던트 선발 시험일 것이다.

평생의 전공을 선택하는 일이기 때문에 병원에서 가장 말단의 인턴으로 일하느라 지치고 힘든 와중에도 졸음을 참아가며 책과 씨름을 해야 했다.

전공을 선택할 때 자신의 적성과 취향도 고려하고 어떤 환자를 보는지 무슨 수술을 하고 나중에 어떤 인생을 사는지 잘 따져보고 선택해야 하지만,

어리고 철없을 나이라 그저 경쟁률이 높고 인기가 좋은 과는 다 이유가 있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으로 지원하는 경우도 많았다.

내가 인턴을 마치던 당시에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성형외과, 안과, 피부과 같은 비교적 경미한 환자를 보는 진료과목들에 지원자가 많았다.

의술은 인술이며 남을 위해 사는 삶이라고 어려서부터 배웠지만 막상 직업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그렇게 특별한 인간이란 많지 않았던 것 같다.

몸이 편하고 수입도 안정적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고 남들이 다 지원하고 싶어한다는 사실 또한 무지한 선택을 정당화시켜 주었다.

하지만 어렵게 시험을 통과하고 막상 안과 레지던트 생활을 시작하자마자 기대는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새벽부터 다시 다음날 새벽으로 이어지는 일과도 너무 힘들었고 집에 가지 못하는 불편함도 컸지만 작은 실수 하나에도 난리가 나는, 옹졸해 보이기까지 하는 의국 분위기에 너무 지쳐버렸기 때문이었다.

우리 몸에서 가장 작은 혈관, 가장 좁은 신경을 다루는 학문이다 보니 안과에서는 작은 오차가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일이 많기 때문에 정확성이 생명일 수밖에 없는데 의사로서 스스로의 능력도 잘 모른 채 유행을 따라 지원한 나로서는 접하는 일마다 ‘이게 과연 그렇게 중요한 일인가?’

하는 의문이 들고 이건 내 길이 아닌가 보다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하지만 사람은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며 스스로를 재단하고 조절해가는 능력이 있어서 덜렁거리며 한 해 두 해를 보내고 박사 학위까지 마치게 되었다.

대학병원 교수직과 해외 근무를 거치고 개원을 한 뒤부터는 시력교정술과 노안, 백내장 수술을 주로 하게 되었다.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 시대에 노인성 질환과 유행의 첨단을 달리는 시력교정 수술을 동시에 하는 데 대해 주변의 우려도 있지만 결국 병원을 오래 하다 보면 젊어서 내게 라식,
라섹 수술을 받은 환자들이 노안이 오고 백내장이 올 수밖에 없는데, 그제서 다른 선생님께 부탁을 드리기에는 의사로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적어도 내가 맡은 영역에 대해서만큼은 나이에 관계없이 어떤 질환이든 고칠 수 있는 병원으로 만들고 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잎의 색깔을 바꾸고 겨울이 다가오면 그 많은 잎들을 떨어뜨려 생존에 대비하는 나무들처럼 의료계도 세상의 흐름과 유행에 따라 변신을 요구받고 있다.

급변하는 의료 환경에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하여 유명한 의사는 되지 못하더라도 우직하게 오래 자리를 지켜 가치 있게 살아남는 것으로 마음을 다잡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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