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정권의 경제정책은 시작부터 난관이었다. 경제는 1963년 초부터 심상치 않았다. 성장은커녕 위축일로였다.

박 대통령은 부랴부랴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발표한 지 1년 만에 성장에서 안정으로 후퇴하고 목표성장률도 낮췄지만 약효가 없었다. 급기야 1964년 도매물가는 35.4%나 뛰었다. 소비자물가도 29.6% 상승. 가히 살인적이었다. 원료와 자본재 수입은 외화부족으로 막혀 광공업 생산은 멈추기 직전이었고, 소비재는 품귀였다.

이때 박정희 대통령은 건곤일척의 승부수를 던진다. 비관료 출신의 신문사 사장을 경제총수로 발탁하여 경제정책에 관한 한 전권을 부여한 것이다. 그가 훗날 ‘개발불도저’로 불렸던 2대 경제부총리 장기영이다.

그는 취임사에서 “물가를 때려잡겠다. 국민은 6개월만 기다리시라”고 선언한 이후 그 같은 경제기조를 관철하기 위하여 3년 5개월간 상공부 등 경제부처들을 장악하고 의회, 금융계, 민간기업은 물론 식당과 다방까지 쥐고 흔들었다.

장기영은 말 많던 엘리트 출신 경제장관들을 툭하면 세종로 경제부총리 집무실 옆방 일명 ‘그린룸(녹실)’으로 소집했다. 말이 경제장관협의회이지 협의내용이 기록되지 않는 비공식 모임이었는데 이 자리에서 주요 정책을 결정했다. 그는 혼자 이른 식사를 마친 뒤 저녁 6시쯤 장관들을 소집하여 자정을 넘길 때까지 회의를 강행했다. 간식도 주지 않았다. 허기에 지친 장관들은 결국 배부른 부총리의 주장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을 ‘장군대위(general captain)’라고 불렀다. 최고 지휘관이지만 중대장 노릇도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에 따라 기획원뿐 아니라 재무부, 상공부, 농림부 등 다른 부처의 간부들까지 수시로 불러 지시하고 기합을 줬다.

국회 예산심의 계수조정 단계에서도 국회 눈치를 보지 않았다. 기획원 측과 계수조정소위 여야 국회의원들 간의 밤샘 삼각협의가 이뤄지는 호텔방의 옆방을 몰래 얻어 푹 자고 새벽녘에 나타나서는 정신이 몽롱한 의원들을 설득하여 기획원 안이 통과되도록 했다.

 서울 본전다방이 커피값을 20원에서 30원으로 올리자 업주를 불러 직접 인하압력을 가하고, 밀주 단속현장까지 달려가 세무서 요원들을 진두지휘하기도 했다. 매일 새벽 5시에 물가 담당 관리들에게 전화하여 생필품 가격을 물어보는 통에 관료들이 새벽 4시부터 지프차를 타고 중앙시장, 동대문시장을 훑고 다녀야 했다.

마침내 장기영의 위세 앞에 꺾일 줄 모르던 물가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도매물가는 1965년 9.1%로 급락하더니 1967년에는 6.6%로 잡혔다. 소비자물가도 취임 첫해 13.8%로 반 토막 나서는 1967년 10.9%로 한 자릿수에 육박하기에 이르렀다.

50년 전의 이 신화적 인물이 요즘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현오석 부총리의 정책조정능력을 비판하면서 비교대상으로 등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이 바뀌었다. 기준은 다르지만, 1965년 경상GNP는 30억달러였지만 2012년 GDP는 약 1조2000억달러다. 1인당 국민소득은 같은 기간 105달러에서 2만달러가 됐고,수출은 1억7500만달러에서 5480억달러로 급증했다. 하늘과 땅 차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부총리 한 명이 무소불위의 경제권력을 휘두르는 게 타당할까. 아무리 급하다 해도 각 부처의 입장을 무시하고 일사분란만 요구하는 게 합리적일까. 5년 만에 부활한 경제부총리에 거는 기대치는 과도하게 높으며, 실망감은 지나치게 큰 것 같다.

“서울 사람은 비만 오면 풍년 든 줄 안다.” 현 부총리가 지난 4월 기획재정부 직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타 부처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달라며 인용한 속담이다. 그는 동시에 협업의 제도화와 함께 소통과 배려를 강조하기도 했다. 업무조정 방식에 관한 한 나름의 리더십을 세우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 박근혜 대통령도 경제 컨트롤타워로서 잘하고 있다며 그에게 힘을 실어줬다. 답답해 보이긴 해도 좀 더 지켜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