➄ 임은주 해담골 대표

찬거리로 담근 장…이제 해외서도 찾는다

나이 든 시부모님 밥상에 매끼 따뜻한 국물과 반찬을 올리기 위해 장을 담그기 시작했다. 그러다 시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자녀들은 출가했다. 적적한 시골에서 소일거리 삼아 5년 전부터 장을 담가 팔기 시작했다. 연간 된장만 1톤 정도 판매하고 있으며 지역 농산물을 이용한 딸기 고추장, 토마토 고추장 등을 생산하기도 한다. 과일을 넣은 고추장은 외국인 입맛에도 잘 맞아 수출 가능성도 확보했다.

사진: 이코노믹리뷰 이미화 기자

 

처음 장을 직접 담근 건 나이 든 시부모님을 모시기 위해서였다. 이를 팔기 시작한 건 소일거리가 필요해서였다. 연구를 거듭하며 완성도를 높였던 건 ‘마냥 재밌었기 때문’이란다. 텃밭 구석에 자리했던 외로운 장독대는 이제 50개로 늘었고, 식구 수에 맞췄던 된장의 양은 어느새 톤(t) 단위가 됐다. 장독 안의 장이 그렇듯, 임은주 해담골 대표의 포부도 점점 숙성돼간다. 기술 전수로 전통을 이어가려는 계획도, 세계화를 통해 한국의 맛을 알리겠다는 목표도 생겼다. “좋은 장맛은 인내의 결과”라고 했던가. 25년의 인내가 만든 변화다.

‘해담골’이 위치한 동네(논산시 광석면)는 외진 곳이다. 그래도 지금은 교통편이 많이 나아졌는데 한때는 ‘구석진 곳’이라는 뜻의 ‘궉뜸’으로 불렸었다. 찬거리를 사러 시장에 가려면 하루에 몇 대 없는 버스를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다. 사시사철 뜨거운 국물을 찾는 시부모님을 모시기가 까다로울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친정은 가까웠다. 친정에는 동네 최고의 ‘장맛’을 자랑하는 외숙모가 있었다. 임은주 대표는 “어느 날 외숙모가 ‘나이 든 시부모님을 모실 때는 직접 장을 담그는 게 좋다’고 하더라”며 “그래서 다짜고짜 알려달라고 졸랐다”고 했다. 외숙모의 일손을 도우며 지냈던 20년, 그의 손맛은 고스란히 임 대표의 것이 됐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시부모님과 외숙모 모두 세상을 떠나셨어요. 남편은 원래 다른 사업을 했었고, 자녀들은 출가했고요. 시골에서 적적하게 지내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 장을 조금씩 담가 팔기 시작한 겁니다.” 집 앞 텃밭에 조그만 장독대를 갖추고, 집 안에는 솥 두 개를 걸었다. 부모 봉양하고, 남편 챙기고, 아이들 양육했을 때는 몰랐던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5년 전, ‘해담골(해를 담는 고을)’이라는 브랜드는 그렇게 생겼다.

 

추억의 맛 구현해 차별화 성공

막상 사업화를 하려고 보니, 시장이 만만치 않았다. 임 대표는 “지방에서 전통장을 만들어 판매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무척 많았다”고 했다. 지역마다 손에 꼽히는 사람 하나쯤은 여지없이 있을 정도였다. 외숙모에게 배운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싶었다. 다른 전통장도 맛이 좋기는 마찬가지였다. 차별화에 초점을 맞춰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흔하지 않은, 특별한 장을 담가야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복안이었다. 차별화 작업의 시작은 ‘가장 인상 깊었던 장맛을 떠올려보는 것’이었다.

“10살 때쯤 강경에 살았는데 아주머니들이 커다란 젓갈 바가지를 머리에 이고 다니면서 팔았어요. 젓갈과 함께 조금씩 팔았던 것 중에는 된장도 있었죠. 맛있는 된장을 떠올리던 중 그 맛이 생각났어요. 당시 우리 형편이 어려워 많이 살 수는 없었지만, 아주머니가 올 때마다 손가락으로 푹푹 찍어 먹던 그 맛이 떠오르더라고요. 일반 장하고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감칠맛이 지금도 생생해요. 정말 맛있어서 어머니께 ‘이건 어떻게 만드는 거냐’고 물었을 정도였죠.”

당시 어머니는 “생선이나 고기를 된장에 박아놓고 먹기도 하는데, 그런 된장은 특별히 더 맛있다”는 대답을 들려줬다. 임 대표는 이처럼 옛 기억을 하나하나 끄집어내며, ‘전설의 맛’ 되살리기에 나섰다. 기억과 함께 옛 문헌들도 찾아봤다. 거기서 아주머니 장맛의 정체를 알았다. 어육장(魚肉醬)이었다. 조선 후기 여성생활 백과인 <규합총서>(1809년)에는 “바다, 육지, 하늘에서 나는 귀하고 맛난 고기를 듬뿍 넣어 메주와 소금물을 붓고 땅속에서 1년을 숙성시켜 만드는 장”이라고 나와 있었다. 이는 왕실이나 사대부 계층에서나 먹을 수 있었던 명품 장이다. 기억 속에서만 존재했던 맛이 손에 잡히는 듯했다.

이거다 싶었다. 어육장을 자신만의 장으로 특화시키기로 마음먹었다. 생선과 고기가 들어가는 만큼 어육장은 미생물과 발효 부분을 더 세밀하게 가다듬어야 한다. 폴리텍대학이나 농업기술원 등에 검사를 의뢰하며 기준을 세워나갔다. 집안 대대로 어육장을 계승하며, 지난 2010년에는 대한민국 식품 명인으로 임명되기도 했던 권기옥 명인(경기도 용인시 백암면)을 찾아 조언과 학문적인 자료를 구하기도 했다. 임 대표는 “옛 문헌에만 의존했기 때문에 맞게 하고 있는 건지 고민이 많았는데, 권기옥 명인은 연구기관에 의뢰한 조사도 많고, 좋은 자료들도 많이 가지고 계셨다”며 “자료들을 보면서 내가 하고 있는 방법이 옳다는 것을 알았고, 자연스럽게 자신감도 붙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자신감은 개선을 낳았다. 기존 자료에만 의지해 똑같이 흉내 내기보다는 소비자 중심으로 생각했다. 다시 혼자만의 연구가 이어졌다. “어육장이라는 게 특별한 계층이 먹던 것이다 보니 굉장히 비싸요. 500g에 10만원 정도예요. 저는 이 맛있는 장을 누구나 맛볼 수 있게 하고 싶었어요. 원래 어육장에 들어가는 생선은 농어, 광어 같은 종류인데, 이를 쉽게 구할 수 있는 등 푸른 생선으로 대체해봤어요. 꿩, 노루 등도 닭고기로 바꿨고요. 덕분에 가격을 절반으로 낮출 수 있었습니다.”

선인들의 지혜는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소신도 놓치지 않은, ‘해담골 된장’은 그렇게 탄생했다. 반응은 뜨거웠다. 새벽 1~2시까지 일해도 물량을 댈 수 없을 정도였다. 밀려드는 주문에 집 전화는 아예 뽑아 놨다. 인근 축협 같은 곳에 소량으로 나가는 물량을 제외하면 전량이 휴대폰을 통한 단골장사다.

 

딸기·토마토 고추장… 해외서 먹혔다

특별한 장맛이 호응을 얻자, 지자체도 관심을 기울였다. 지역 생산물과 연계해볼 것을 제안해 왔다. 임 대표 역시 농업 교육을 다니며 바람직한 지역 연계 방안에 대해서 고민했던 차였다. 이 과정에서 논산의 특산물인 딸기를 활용한 ‘딸기 고추장’이 탄생했다. 인근 지역인 부여의 토마토 단지에 착안, 토마토 고추장도 만들기 시작했다.

임 대표는 “해담골 된장만의 특징 중 하나는 지역 농산물을 잘 이용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기본이 되는 것은 역시 원료인 콩. 임 대표는 “부녀회를 통해 지역 농가에서 재배하는 콩을 모아 거두고 있다”고 했다. 모자라는 양은 공주, 의당 등지의 농가와 연무대에서 콩 농사를 짓는 친정 오라버니를 통해서 공급받는다. 100% 국내산 콩만 쓴다.

지역 특산물의 적극적인 활용은 지역경제 활성화 이상의 효과를 가져왔다. 임 대표는 “딸기 고추장 샘플을 일본 주재 한식연구소에 보내봤는데, 현지인들의 반응이 좋았다”며 “과일 향과 달달한 맛이 첨가돼 자연스레 외국인들의 입맛을 맞출 수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토마토 고추장 역시 영국, 프랑스 등지로 보낼 예정이다. 농업 교육을 받으며 영국, 프랑스의 한인 타운 임원들을 알게 된 것이 계기가 됐다. 임 대표는 “냄새나 생김새 때문에 외국인들의 장에 대한 관심이 덜했던 것이 사실”이라며 “최근 해외에서 비빔밥의 인지도가 높아졌기 때문에 퓨전 스타일로 그들의 입맛에 맞춘 장을 제공할 수 있다면 세계화의 성공 가능성도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임 대표는 현재 푸드 코디네이터 관련 공부를 하고 있는 딸과 의견을 교류하며 해외 진출의 기회를 엿보고 있다. 가시적인 수출 계획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현지인들의 반응을 통해 이미 가능성은 확인해놓은 상태다.

 

시행착오 후 진정한 삶의 의미 얻어

‘해담골’의 5년, 임 대표는 그간의 시간을 ‘시행착오의 연속’이라고 말했다. “32살 새댁에게 장 담그기는 마치 놀이 같았어요. 곰팡이가 피고 콩이 부글부글 거리는 것을 보면서 시간 가는 줄 몰랐죠. 근데 막상 혼자 판매를 하려고 보니 힘든 일도 많더라고요. 일단 양을 감당하기가 어려웠어요. 소금 간을 하는 것조차 무게가 엄청나서 여자 혼자는 힘들거든요. 게다가 장은 굉장히 예민해요. 항아리 위치, 바람 방향 같은 것에 따라 맛이 천차만별이에요. 야외에 두니 맛이 계속 변해서 비닐하우스나 차광막을 만들어 비, 바람, 일사량을 조절하기도 했죠. 메주를 말리는 것도 굉장히 중요한데, 그게 잘 안 돼 버리기도 참 많이 버렸죠. 그럴 때면 ‘내가 왜 이러고 있나’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괜히 여기까지 왔나 싶기도 했고요.”

모든 시행착오를 이길 수 있는 힘은 ‘선택’에 대한 자부심이었다. 임 대표는 “갱년기에 들어서면서 공허함을 많이 느꼈는데 그때마다 이 일을 통해 나를 찾고, 내 삶의 의미를 새로 찾을 수 있었다. 그간은 나를 위해 살았던 적이 없었다”고 했다. 임 대표는 이를 “매출보다 훨씬 귀한 소득”이라며 “힘든 일이 생길 때 마다 극복해나갈 수 있었던 힘도 여기서 나왔다”고 덧붙였다.

‘기다림의 미학’도 5년간의 경험이 준 수확 중 하나다. 가을에 콩을 추수해, 겨울에 메주를 만들고, 이듬해 초 장을 담그면, 가을에 맛이 드는 장. 온전히 1년이 소요되는 대장정이다.

임 대표는 “인내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했다. 사방에서 주문이 밀려들 때면 제대로 익지 않은 장이라도 적당히 팔고 싶은 마음이 들지만, 이를 참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는 “이 일을 하면서 참고 기다릴 줄 아는 마음이 많이 생겼다”고 했다. 불티나게 팔려 나가도 당장 생산량을 늘리지 않는 것, 해외의 호평에도 덜컥 수출에 나서지 않는 것도 그로부터 비롯된 정중동의 자세다.

해담골은 이제 완연히 된장 공장의 모습을 갖췄다. 저온시설 등을 갖춰 1년 내내 위생적이며, 일률적인 맛을 낼 수 있도록 했다. 현재 1년에 된장 1톤과 고추장 600kg 정도를 생산한다. 이제 슬슬 대량생산 체제를 고려해볼 만한 시기. 임 대표의 고민이 시작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는 “현재 갈림길에 선 상태”라며 “생산에 집중하느냐, 후진 양성에 집중하느냐를 선택하는 기로에 있다”고 했다.

두 방향 모두 어느 정도의 준비는 필요하다. 먼저 규모화를 하려면 인력 보충이 필수적이다. 혼자서는 생산량을 증대시킬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섣불리 선택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는 “규모가 커지면 어느 정도는 내 손을 벗어난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고용인들 손에 의해 공정이 진행되는 것은 물론, 기계화 및 시스템화도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손맛’이 경쟁력이 되는 업의 특성상 위험요소가 될 수 있는 부분이다. 생산에 집중했을 때의 최종 목표는 ‘일자리 창출’이다. 임 대표는 “나 역시 숫기 없는 시골 여성에 불과했지만 일을 하면서 많은 부분이 변했다”며 “그런 경험을 시골 여성들이나 노인들과 나누고 싶다”고 했다. 젊은이가 떠나는 시골의 약점을 메우고 싶다는 욕심도 있다. 임 대표는 “시골에서도 도시 못지않은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전통의 맛을 전수하고 싶은 마음도 강하다. 어육장을 연구하면서 숱한 시행착오를 겪은 만큼, 이제는 이를 공유하고 교육할 시점이 됐다는 판단이다. 임 대표는 “본격적으로 교육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교육을 좀 더 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면서도 “하지만 내가 아는 범위 내에 있는 것들도 누군가에는 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미 인근 지역의 초ㆍ중ㆍ고교에는 ‘방과 후 학교’ 제안서도 넣었다. 학생들이 방과 후에 전통장 제조 과정을 배우고,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서다. 여전히 농업 교육현장을 찾아다니며 배움을 놓지 않는 것도 향후 누군가와 교육을 주고받을 채비인 셈이다. 임 대표는 “장을 만들면서 나를 재발견했다”며 “이를 잃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강한 만큼, 더 많은 사람이 같은 경험을 했으면 하는 욕심도 생긴다”고 말했다.

 

장인수첩

새댁 때 인근에 살던 외숙모께 장 담그는 법을 배웠다. 당시 지역에서 장맛으로 꽤 입소문이 나 있었던 외숙모와 20년을 장을 담그다 보니 실력은 절로 몸에 뱄다. 한데 막상 판매하려고 보니 차별점이 없었다. 옛 기억을 떠올리고, 명인을 만나고, 문헌을 찾다 ‘어육장’을 접했다. 값비싼 어육장의 단가를 낮춰 차별화를 꾀했다. 또 지역 특산물인 딸기와 토마토를 이용해 고추장을 담갔더니 해외서 반응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