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유가 톺아보기] 급락의 공포 커진다...WTI 57.95달러

우크라이나 종전 기대감이 부른 역설 50달러대 추락 제재 빗장 풀린 러시아산 원유 유입 시나리오에 시장 출렁

2025-11-26     최진홍 기자

우크라이나 평원 위로 짙게 드리웠던 전운이 걷힐 기미를 보이자 뉴욕 금융시장이 가장 먼저 반응했다. 전쟁 리스크가 사라진 자리를 공급 과잉이라는 새로운 공포가 채우면서 국제유가는 단숨에 50달러대 중반으로 미끄러졌다.

뉴욕상업거래소는 25일 1월 인도분 서부텍사스산원유(WTI)가 전장 대비 0.89달러 내린 배럴당 57.95달러에 거래를 마쳤다고 밝혔다. 이는 지난달 21일 이후 한 달여 만에 기록한 최저치다. 런던 ICE선물거래소의 내년 1월물 브렌트유 역시 0.89달러 하락한 62.48달러로 장을 마감했다.

시장심리를 뒤흔든 것은 백악관과 주요 외신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온 종전 시그널이다. 이날 미국 ABC방송과 CBS 등은 우크라이나 대표단이 미국 측과 잠재적 평화협정 조건에 합의했다고 보도했다. 한 미국 관료는 ABC와의 인터뷰에서 정리해야 할 세부 사항이 약간 있지만 그들은 평화협정에 동의했다고 확인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발언은 이러한 관측에 쐐기를 박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열린 추수감사절 칠면조 사면식에서 우리가 합의에 매우 가까워지고 있다고 생각한다며 우리는 거기 도달할 것이라고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루스템 우메로프 우크라이나 국가안보국방위원회 위원장 역시 며칠 내 젤렌스키 대통령이 방미해 트럼프 대통령과 종전 거래를 마무리할 가능성을 언급했다.

국제유가가 1.5% 넘게 주저앉은 배경에는 단순한 전쟁 종료를 넘어서 거대한 글로벌 에너지 공급망의 변화가 자리 잡고 있다. 시장은 종전이 곧 대러시아 제재 해제로 이어질 것이라는 시나리오를 가격에 반영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서방의 강력한 제재로 묶여 있던 러시아산 원유가 다시 글로벌 시장에 본격적으로 유입될 경우 공급 과잉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된다.

필립노바의 프리양카 사크데바 수석 시장 분석가는 보고서를 통해 단기적으로 가장 큰 위험은 공급 과잉이며 현재 가격 수준은 취약해 보인다고 진단했다. 지정학적 불안정성으로 인해 유가를 떠받치던 리스크 프리미엄이 소멸하고 그 자리를 공급 쇼크에 대한 우려가 대체한 셈이다.

사진=연합뉴스

다만 유가의 추가 폭락을 방어한 것은 달러의 약세였다. 원유는 달러로 거래되기에 달러 가치가 떨어지면 유로화 등 다른 통화를 보유한 매수자들의 구매력이 상대적으로 높아져 수요를 자극하는 효과가 있다. 이날 주요 6개 통화 대비 달러 가치를 나타내는 달러인덱스(DXY)는 100선 아래로 떨어졌다.

달러 약세의 기저에는 트럼프 대통령의 경제 참모 인선 소식이 있었다. 블룸버그는 케빈 해싯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이 차기 연방준비제도 의장으로 유력하게 거론된다고 보도했다. 해싯 위원장은 연준 의장 후보군 중 금리 인하 등 통화 완화를 선호하는 가장 비둘기파적인 인물로 꼽힌다.

시장은 우크라이나 평화라는 지정학적 호재를 에너지 시장의 공급 과잉 악재로 해석함과 동시에 차기 연준의 완화적 통화 정책 가능성까지 복합적으로 계산하며 숨 고르기에 들어갔다. 57달러 선까지 위협받던 WTI가 장중 낙폭을 줄인 것은 공급 확대의 공포와 달러 약세의 지지력이 충돌하며 만들어낸 결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