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성이 멎어도 고통은 계속된다" 생명을 살릴 마지막 길, 의료 후송

[특별기고] 황지희 국경없는의사회 인도적지원 총괄 협력관

2025-11-25     최진홍 기자

“쾅” 하는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집이 요동쳤다. 순간, 세상이 고요해지고 귀 속에서 ‘삐-‘하는 날카로운 이명이 피처럼 번졌다. 그 소리가 귓속 깊은 곳을 파고들며 의식이 멀어졌다. 눈을 뜨자, 숨이 막힐 듯한 고통이 온몸을 덮쳤다. 자유로웠던 두 팔은 움직이지 않았고, 아버지의 절규가 들려왔다. 그 순간, 내가 두려워하던 불행이 마침내 나에게 닥쳤음을 직감했다. 

국경없는의사회 요르단 암만 재건 수술 병원에서 재활치료를 받고 있는 17세 팔레스타인 소년 카람의 사고 당시를 각색한 내용이다. 가자 중부지역 누세이라트 캠프(Nuseirat Camp)에서 생활하던 카람은 이스라엘 공습으로 집을 잃었으며, 얼굴을 비롯한 신체에 심각한 화상과 팔 부상을 입었다. 공습은 카람의 어머니와 큰형, 그리고 막내 남동생까지 앗아갔다. 카람은 현재 여동생과 같은 병실에서 재활 치료를 받고 있다. 

폭격으로 폐허가 된 가자 지구. 사진=연합뉴스

2025년 10월 10일. 가자 전쟁 발발 2년만에 휴전이 극적 타결됐다. 그러나 가자의 상황은 여전히 어둡기만 하다. 전쟁으로 팔레스타인인 6만7000명이 사망했으며, 이 중 아동 사망자는 2만여 명에 달한다(UN 인도주의 업무조정국, ’25.10.7.기준). 휴전이란 말이 무색하게도 이스라엘은 공습을 재개해 약 2주간 200여명을 사망에 이르게 했으며, 이 중 아동과 여성이 상당수를 차지한다.

문제는 환자들이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해 사망에까지 이른다는 점이다. 가자 지구엔 지난 2년간의 전쟁으로 인해 더 이상 온전히 운영되는 병원이 단 한 곳도 없으며, 36개의 병원 중 14곳만이 부분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2백 만 명 이상의 인구를 대상으로 하는 가용 병상 수는 2,000개 미만이며, 알시파, 알아흘리 등 주요 병원은 200~300%의 수용 초과 상태로 운영 중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국경없는의사회는 가자지구 내에서 치료 불가능한 중증 환자를 인근 국가에서 치료받을 수 있도록 의료 후송을 지원하고 있다.

2025년 8월 기준 공식적으로 1만5600여 명의 환자가 의료 후송 대기 명단에 등록됐으며 이 중 25%가 어린이에 해당된다. 안타깝게도 24년 7월에서 25년 8월까지 총 13개월간 아동 137명을 포함한 최소 740명의 환자가 의료 후송을 기다리다 끝내 사망했다. 복잡한 행정 절차와 의료 후송의 정치화로 인해 환자 후송이 더뎌진데다, 이스라엘 정부 기관의 임의적이고 자의적인 판단으로 후송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환자 후송을 수용하는 국가도 매우 제한적이다. 전쟁 발발 이후 올해 7월까지 인근 국가로 후송된 총 7천6백여 명의 환자 중 90% 이상이 이집트, 아랍에미레이트(UAE), 카타르, 터키 4개국으로만 후송됐다. 현재 인근 국가들 병원은 포화 상태이며 더 이상 다른 환자들을 수용하기엔 어려움이 많다. 이탈리아나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국가나 일본 등 선진국에서 환자를 수용하고 있긴 하지만 후송을 기다리는 인원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수다. 

인근 국가들의 수용역량치료역량이 부족하여, 후송 환자 다수가 대기상태에 있거나 가자로 다시 돌려보낸 사례들도 발생하고 있는 상황이다.  소아암, 신경외과 수술, 고도의 외상 치료 등 전문 치료가 가능한 인근 국가의 수도 극히 제한적이다. 따라서, 한국을 비롯한 우수한 의료 기술을 보유한 국가들이 함께 환자 후송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때이다. 

환자 후송은 간단하지만은 않다. 환자 개인 이외에 보호자가 함께 동반돼야 하며, 수용하는 국가의 병원 역량, 의료 기술, 병상 수도 고려해야 한다. 수용국에서 충분히 치료가 가능한 질병이어야 하며 환자와 보호자들이 수용국에서 안전하고 차별 없이 거주할 수 있도록 비자나 체류 환경 등도 준비가 돼야 한다. 또한, 환자가 치료 후 희망할 경우 팔레스타인으로 자유롭게 돌아갈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 

가자지구 환자들에게 지금 남은 길은 의료 후송뿐이다. 환자를 받아들이는 일에는 분명 현실적인 어려움이 따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결단은 분쟁 속에서도 생명을 지키는 선택이다. 지금이야말로 환자 수용국으로서 인도적 연대와 분쟁 완화의 중심에 서며, 한 단계 더 성숙한 글로벌 리더십을 보여줄 때다. 

전쟁의 상흔이 만연한 이곳 가자 지구는 여전히 참담하다. 한국을 비롯한 국제 사회의 일원들은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해 사망하는 환자들이 더 이상 발생하지 않도록 환자 후송을 위해 적극적으로 앞장서야 한다. 또한 환자 후송 절차가 더욱 신속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지원하며 이스라엘 정부가 의료 후송을 차단하지 못하도록 보장해야 한다. 우리는 이 고통의 현실을 함께 마주한 세대로서, 후대에 부끄럽지 않도록 지금 우리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

황지희 국경없는의사회 인도적지원 총괄 협력관
현재 국경없는의사회 한국에서 인도적지원 총괄 협력관을 맡고 있다. 연세대학교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하고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국제협력학 석사학위를 취득하며 국제개발 및 국제정치에 대한 깊은 관심과 전문지식을 쌓았다